그런 여러 얼굴의 니체 가운데 그동안 우리가 만난 니체는 대체로 온건한 표정의 니체였다. 진리 문제에 몰두하는 학자 같은 니체였다. 신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안고 대낮에 램프를 들고 배회하는 광인 같은 니체라고 해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약간 이상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생각이 깊은 니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어권에 니체를 알렸던 월터 카우프만이 그런 니체상을 유포한 사람 가운데 대표자였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발견한 니체는 ‘의심의 대가’다. 이 철학자들의 묘사 안에서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도덕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진리의 폭정을 허물어뜨린 위대한 반형이상학자로 나타난다. 특히 들뢰즈의 해석 속에서 니체는 ‘다름’을 창출하고 ‘다름’을 향유하는 차이의 철학자, 긍정과 기쁨만을 아는 밝고 환한 철학자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들이 주목한 니체는 싸우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싸움은 철학자가 철학의 역사를 대상으로 벌이는 지적인 싸움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니체의 정복 대상은 인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칸트의 상상력 안에서 시작한 모험은 그 인식의 바다를 벗어나 삶 그 자체의 전장으로 나아간다. 니체의 분신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제자들에게 삶의 전쟁터에 선 전사가 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니체가 니체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니체는 감추지 않고 강자의 승리, 강자의 지배를 옹호한다. 그는 연민과 같은, 약자를 이롭게 하는 감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민주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념도 부정한다. 약자를 이롭게 하고 약자의 삶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신념도 가치도 모두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런 위험하고 잔인한 측면을 외면하고서는 니체 사상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니체가 고통을 긍정한 것은 니체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질병의 침탈과 회복의 반복이 니체의 일생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니체는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지나고 나면 그는 다시 새로운 삶을 의욕했고, 창조의 의지로 불탔다. 니체에게 삶은 끝도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삶은 또 그 고통을 넘어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이었다.

니체의 언어로 말하면, 테세우스는 권력의지이고, 아리아드네의 실은 진리 의지다. 권력의지가 진리 의지의 힘을 빌려 괴물의 실체와 만날 수 있을지, 한번 용기를 내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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