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는 크레온 왕국의 지배 하에서 살게 된다. 그녀 자신이 왕의 딸이고 하이몬의 약혼자이므로 그녀는 영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크레온 자신도 아버지이자 남편이므로 혈연의 신성함을 존중해야 하며, 이 경건성에 대립되는 어떤 명령도 내려서는 안 된다. 이처럼 그들 두 사람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양면성이 내재하면서 서로 대항하고 뒤바뀌며 강조되며, 그 개인들은 바로 자신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파멸한다... 고대와 근대 세계의 모든 뛰어난 예술작품들 가운데 <안티고네 Antigone>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만족스러운 작품으로 보인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3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헤겔의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 Mit einer Einfuhrung hrsg>에서 소포클레스(Spphokles, BCE 497~406)의 <안티고네 Antigone>를 근대까지의 문학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안티고네>가 갖는 뛰어난 문학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쟁하는 개인과 그들이 저항해 싸우는 것과의 대립구조가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만약 파토스의 일면성이 충돌의 근거가 되면 다름 아니라 그 파토스는 생생하게 행위로 드러남으로써 어느 특정한 개인만이 파토스가 되었다는 것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만약에 그 일면성이 해소되어야 한다면, 그 파토스는 오직 하나의 파토스로만 행동해야 하므로 결국 제거되고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개인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란 오직 이 하나의 삶일 뿐이기 때문이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32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서 설명되는 직접적인 대립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다. 사자(死者)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은 신의 법칙과 인간 법칙이라는 인륜(人倫)의 대립, 여성의 원리와 남성의 원리, 무의식과 의식의 대립으로 전환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는 <안티고네>에서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헤겔은 <안티고네>를 높게 평가한다.


 인륜적 위력들 서로 간의 운동과 인륜적 위력들을 생명과 행위 속에 정립하는 개체들의 운동은 양측이 다 똑같은 파멸을 경험하는 데에서 그 참된 결말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 위력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실체의 좀 더 본질적인 계기가 되는 데에 하등 앞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측의 동등한 본질성 그리고 그것들의 아무런들 상관없는 병존이 곧 그것들의 자기(自己)를 결여한 존재이다. 행실 속에서는 그것들이 자기 본질로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상이한 것으로서 존재하는데, 이는 자기(自己)의 통일과 모순되고 또 그것들의 무법성과 필연적 파멸을 이루는 것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6


 크레온이 상징하는 인간적 법칙은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되는 정신적 본질이다. 이에 대항하는 안티고네가 상징하는 신적 법칙은 자기 의식이다. 보편적인 정신적 본질과 개별적인 자기의식은 대립하지만, 사실 그들의 뿌리는 서로에게 두고있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기에 , 그들의 대립은 어느 일방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어느 한편에 의한 다른 편의 전복이 일어나는 그 지점에서 승리는 패배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자리 전환이 일어나면서 모두가 부정되며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적 본질은 우선 자기의식에 대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칙(법률)으로서 존재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성이 아닌 형식적 보편성이었던 검증의 보편성은 지양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정신적 본질은 또한 영원한 법칙인데, 그런 영원한 법칙은 바로 이 개인의 의지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히려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며, 직접적 존재의 형식을 가진 만인의 절대적인 순수 의지이다. 이 만인의 순수 의지는 또한 단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뿐인 계율이 아니며, 그것은 존재하고 또 유효하다. 정신적 본질은 직접적으로 현실인 범주의 보편적 자아이고, 또 세계는 오직 이 현실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존재하는 법칙이 단적으로 유효하다고 해서 자기의식의 복종이 결코 자의적으로 명령하고 그 안에서 자기의식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할 터인 그런 주인에 대한 봉사는 아니다. 오히려 법칙은 자기의식이 스스로 직접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자신의 절대적 의식의 사고이다. _ 헤겔, <정신현상학 1> , p417


  <안티고네>에서 결말은 안티고네와 약혼자 하이몬, 크레온의 부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생존자는 크레온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진정한 승리자는 모든 것을 잃었고, 패배자는 죽었다.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이제 정신은 어떻게 고양될 수 있을까.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다음 상황에서 소외된 정신과 국가 권력과의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면서 정신의 고양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안티고네>에서는 이러한 고양이 표현되어 있을까?


 권력을 지니고서 백일하에 놓여 있는 법칙에 맞서 무의식적 정신은 현실적 수행을 위한 도움을 오직 핏기없는 그림자에서만 지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와 어둠의 법칙으로서 무의식적 정신은 처음에는 환한 대낮과 힘의 법칙에 굴복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권력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그 명예와 위력을 탈취한 현실적인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먹어 치운 셈이다... 공개적인 정신의 완성은 그 반대로 전환되며, 그는 자신의 최고 권리가 최고의 불법이고 또 자신의 승리가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파멸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네이케스나 안티고네처럼) 자신의 권리를 훼손당한 사자(死者)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그를 침해한 위력과 동등한 현실성과 권력을 갖춘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위력들이 적대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힘인 가족 간의 공경심을 모독하고 부숴버린 공동체를 파괴한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60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헤겔의 미학강의>로 돌아가자. 헤겔은 본문에서 합창(코러스)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이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서정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는 최종 주제가 담긴 구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 <안티고네>에서 코러스에 의한 마무리는 휘브리스에 대한 경구로 끝맺음된다.


 합창은 사실은 행위 속으로 파고들어가 이와 관계하지도 않으며, 투쟁하는 주인공들에 대항해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심판을 내리고 경고하고 연민을 보이거나, 상상 속에 지배하는 신들의 영역으로 외화되는 신적인 권리와 내면적인 위력에 호소한다. 이렇게 표현될 때 이미 보았듯이 합창은 서정성을 띤다. 왜냐하면 합창은 행동을 하지 않으며, 또 어떤 사건도 서사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본질적이고 보편성을 띤 서사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_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 p924


코러스 : 양식(良識)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네. 신들에게 불경을 범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오. 뽐내며 허풍을 떨면 언제나 큰 매를 벌기 마련. 나이를 먹으며 지혜를 배우게 되는구나. _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 p80/332


 개인적으로 <안티고네>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변증법적 구도 안에서 무리하게 해석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앞선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 사실은 그 이전에 있었던 오이디푸스 아들간의 대립의 연장 구도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공격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 안티고네와 크레온 이전에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있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공동체를 점유하지 못한 채 그 정상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그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폴리네이케스)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한낱 개별자로 포착할 줄 알고 이런 무력함 속에서 추방하는 자(에테오클레스)는 권리를 자신의 편에 둔다. _ 헤겔, <정신현상학 2> , p458


  크레온은 테베를 지키려는 에테오클레스를 인정하는 대신, 공격해온 폴리네이케스를 부정하고 매장을 금지한다. 이때,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 것에 대해 헤겔은 신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소포클레스의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우리는 신의 저주를 아버지로부터 받는 폴뤼네이케스를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 너는 추방한 아우를 죽이고 아우의 손에 죽게 되리라. 그렇게 저주하노라. 너에게 새 집을 주라고 아버지 타르타로스의 가증스러운 어둠을 부르고 여기 복수의 여신들을 부르며, 너희들의 마음에 무서운 증오를 불어넣은 전쟁의 신 아레스도 부르노라. 자, 내 말은 다 들었으니 이제 가거라. 가서, 모든 카드모스인들과 그 믿음직한 동맹군들에게 말해라. 오이디푸스가 그런 저주를 두 아들에게 상으로 주었다고.


 코러스 : 폴뤼네이케스여, 당신의 과거 행적이 마음에 들지 않소. 이제 서둘러 돌아가시오. 


 폴뤼네이케스 : 아아, 내가 온 길이여, 내 임무는 실패로 끝났구나. 아아, 동료들이여. 아르고스에서 군대를 이끌었지만, 어떤 종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불행한 자로다.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39/332


 결국 폴뤼네이케스가 선택한 것은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나 반항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에 따라간 어쩔 수 없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티고네의 선택 또한 인간 법칙에 대한 거부와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안티고네>의 마지막 코러스에서 드러나듯 신들에 대한 불경(휘브리스 hybris)의 대가를 치루는 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공동체 윤리와 정신과 같은 냉정한 분석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점에서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에 감탄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폴뤼네이케스 :  그래, 날 잡지 마라. 이 길이 내 앞에 놓여 있구나. 아버지와, 아버지가 불러낸 복수의 여신들이 정한, 불행하고 사악한 길을 가야겠구나.  제우스 신께서 너희들에게 행운을 내리시길 빌겠다. 내가 죽어서 요구한 임무를 수행한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장례를 베풀 수 없으니까.〕 자, 이제 날 놓아 다오. 잘 있어라! 너희들이 살아 있는 나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


안티고네  : 아, 불쌍한 내 신세!

폴뤼네이케스 : 울지 마라!


안티고네 : 오빠, 오빠가 예언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한탄하지 않겠어요?


폴뤼네이케스 :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겠지.


안티고네 : 그건 안 돼요. 내 말을 들어요.


폴뤼네이케스  : 설득해도 안 되니까 설득하려 들지 마라.


안티고네 : 나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오빠를 잃게 되면.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 p241/332


 헤겔의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의 안티고네 해석 일부를 옮겨본다. 안티고네가 갖는 이중성에서 근친상간의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이라는 매개로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의 해석과도 결을 달리한 버틀러의 해석도 흥미롭지만,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안티고네는 친족의 경계에 드러난 인식 가능성의 한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순수하지 못한 방식으로, 누구든 낭만화하거나 사실 모범적 사례로 참고하기는 어려운 방식으로 친족의 인식 가능성을 상징한다. 결국 안티고네는 자신이 반대하는 것의 위상이나 언어를 전유해서 크레온의 통치권을 가장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오빠에게 운명지어진 영광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극 전체에서 언제나 이중적이다. 즉 그녀는 살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이들을 낳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죽음은 살지 못했던 삶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크레온이 마련한 삶의 무덤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지금껏 내내 자신의 것이었던 어떤 운명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존속될 수 없는 욕망, 안티고네가 더불어 살아가는, 다름 아닌 근친상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닌가? _ 주디스 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 p50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3-08-27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들 사회책에서는 법단원에서 안티고네를 자연법 예비시아버지(?)를 실정법 이렇게 대립해 놓는 읽을 거리가 있었거든요? 헤겔의 인간적 법칙대 자기 의식을 그렇게 변용한 건지 다른 관점인지 궁금해지네요 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8-27 21:52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요즘 학생들 수준이 매우 높네요...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도는 <정신현상학>에 있는 여러 예시 중 하나로 보다 와닿는 내용을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녔을 적에는 헤겔과 변증법 이름만 들어본 것 같은데, 학생들이 할 일이 참 많을 것 같네요... 일찍 학교가 가서 다행입니다.^^:)

英賢. 2023-08-27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의《안티고네》에서 주인공 안티고네는 이를 두고 신들에 의한, 글로 쓰이지 못한
틀림이 없는 법이며 정의롭다고 부른다.

˝어제, 오늘이 아닌 영원히 산다는 걸 법이라고 부르니,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느니라.˝

- 헤겔, 《정신현상학》, p.447

반유행열반인 2023-08-28 08:0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Andy님. 인용해주신 부분을 보면 자연법이라고 지칭할 만한 정의가 나오는 군요 ㅎㅎㅎ워낙 청소년용으로 풀어둔 토막글만 봐서 출처가 궁금했는데 원전이 헤겔이었다니ㄷㄷ

겨울호랑이 2023-08-28 12:19   좋아요 2 | URL
Andy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