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게 아니라, 영광은 자신이 늘 우울해 있었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신의 의식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기분이 어둡든 밝든 세상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담의 말대로 울든 웃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영광은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바다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고 신선한 것을 미처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았다. 조촐하고 청정하고 마치 내 집 안마당같이 아늑해 보이는 바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모두 이 강산에 태어난 사람들의 땅이요, 바다는 내 조국 내 민족의 보금자리며 요람이며 삶의 터전 아닌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민족의 생명이다. 명경 같은 바다 위에 꿈과도 같이 전개되는 섬, 가고 오고 겹쳐서 나타나고 연이어져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섬, 한결같이 섬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처음으로 영광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자기 내부에 진한 소속감이 굽이치고 있는 것을 느낀다. _ 박경리, <토지 17> , p389/572
[토지 독서 챌린지] 34주차. 이제 5부 2권 <토지17>도 이번 주차로 마무리된다.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오가타와 인실이 그들의 아이를 찬하가 길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내용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난 주 독서챌린지에 이미 다뤘기에 넘어가도록 하자. 대신 이번 주에는 영광이 바라본 바닷가의 풍광과 생각을 함께 살펴보려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어수선한 <토지>의 상황만큼이나 어수선한 20대 대선 직후의 어지러운 지금 상황에서 영광의 마음이 더 잘 이해되었기 때문일까. 평소 자신을 짓누르는 우울감 속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본 영광. 시원함과 드넓은 바다와 시원한 파도의 움직임과 소리는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준다. 영광이 바다에서 느낀 생명의 신비와 소속감은 부둣가에서 빨래터라는 그의 공간으로 오면서 구체화된다. 구체화된 이미지들이 영광에서 시(詩)로 변화하여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빠져드는 영광.
빨갯방망이 소리 여자들의 웃음소리 부서지는 햇빛, 영광은 어제 부둣가에서 그 신선한 삶의 활력을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삶의 의미, 가능성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영광은 다음 순간 그것은 남의 인생이라는 강한 부정에 빠지는 것이었다. 남이 바라보는 자신의 있는 모습이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선에서부터 출발하여 영광은 빨래터에 다시 시선을 던진다.
'그렇다, 바로 내 시계에 저들 모습이 들어왔고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시(詩)가 아닌가. 한다면 시는 진실인가!'
'한 위인이 살다 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 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영광은 밑도 끝도 없는,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사념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7> , p448/572
바다와 빨래터라는 외부 공간에서 민족과 생명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영광의 흐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헤겔의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 Mit einer Einfuhrung hrsg>에서 다루어지는 시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시적인 구상에 맞는 내용에 관해 보면, 우리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 자체, 즉 자연 사물들을 배제할 수 있다. 시문학은 태양이나 산, 숲, 풍경, 인간의 외적인 형상, 피, 신경, 근육 따위가 아닌 정신적인 관심사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시문학은 그 안에 아무리 직관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요소를 띠고 있더라도 역시 정신적인 활동으로 머물며, 정신 가까이 있으면서 구체적인 감각성을 띠고 현상하는 외부사물들보다 정신에 더 적합한 내적인 직관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이다.(p589)... 이런 측면에서 시문학의 주요 과제는 정신적인 삶의 위력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의 열정과 감정 속에서 부침하고 물결치거나 고요히 관찰되며 지나가는 것, 인간의 모든 표상, 활동, 행위, 포괄적인 운명의 영역, 이 세상에서 추진되는 일들, 그리고 신이 다스리는 세계를 의식하게 하는 일이다. 시문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폭넓은 가르침을 주는 교사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_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p590
영광이 바다를 통해, 빨래터를 통해 떠올렸던 정신적 관심사. 이를 포괄적으로 '한민족의 민중의식'이라고 거칠게나마 묶을 수 있을까. 민중의식을 만약 시적으로 느꼈다면, 그것은 영광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의 <미슐레의 민중 Le Peuple> 또한 혁명기 프랑스 민중의 고통 속에서 시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힘에게 질식당하는 고통. 그것은 아직 시가 아니다. 미슐레는 민중 자체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투박하고 소박하다. 시원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느끼기는 어렵다. 프랑스 민중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중들의 핍박받는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영광이 발견한 민중 속의 시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모두가 고통을, 진부한 통속성을, 노예제의 추악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예컨대 가장 행복하게 태어나 즐거운 프랑스 남부의 거주자들조차도 슬프리만큼 일로 허리가 휘었다. 오늘날 최악은 허리만큼이나 영혼도 휘었다는 것이다. 고통, 곁핍, 빚쟁이나 세리에 대한 두려움, 이보다 덜 시적인 것이 있을까?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 p114/254
민중 자체는 덜 시적이며, 그를 둘러싼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사회에는 그들이 음미할 만한, 생생하고 감동적인 세부에 대한 신랄한 묘사를 포함하는 시가 거의 없다. 이 사회에 있는 시라고는 때로는 아주 복합적인 조화를 말하는 고상한 시로서, 숙련되지 않은 눈으로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렇듯 방대한 대상과 거대한 집단적 힘에 둘러싸여서 스스로가 나약해지고 모독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에게는 이전에 개인의 창의성을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줬던 자존심이 조금도 없다. 만일 그에게 해석을 할 창의력이 없다면 그는 이 강력하고 현명하며 학식 높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사회 앞에서 용기를 잃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빛의 중심이라는 곳에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생각보다는 그 빛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선택할 것이다. 그 지혜 앞에서 민중의 작은 뮤즈는 물러서서 숨조차 쉬지 못할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 p114/254
<토지>에서 영광이 의식한 민중의 아름다움은 '차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상황에 따라 독립투사와 친일파를 오가는 지식인들과는 달리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 내부에서 울려올라오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친일파나 지식인 등 다른 계급들과는 구분된 민중들만의 본연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러한 순결함이 '질박(質朴, 質樸)'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외부 이미지로부터 이러한 질박함을 아름다움으로, 문학적 형태로 표현한 것인 시적으로 표현된 민중의식이 아닐런지. 어쩌면 영광은 이를 시적 감정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민중'이란 개념이 자신도 모르게 계급적 함의를 띠게 될 경우 그것은 필연코 관계적인 것이 되며, 그 재현의 장 속으로 다른 계급들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반드시 다른 계급들과의 대비에 의해 정의되며,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그 계급들과의 투쟁 관계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 현상 또는 서사의 이음새를 파열시킬 뿐만 아니라, 원래의 구도를 초월하는 단계, 즉 '민중'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자아비판과도 같은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 특히 그러한 전개 과정은 '민중'이라는 개념의 '타자성'을 피할 수 없게 만들며, 그 개념이 특권적이지만 제자리는 갖지 못한 관찰자, 이 서사의 원재료를 편안하게 그러나 열정은 없이 수집하고 있는 관찰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강조하게 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 p247
누가 압니까? 순수한 친일파들이 독립군의 뒷돈을 대주고 있는지, 형세 보아가며 대한독립만세! 하고 외치며 나왔다가 몇 달 구류 살고 그런 뒤 조선이 독립될 그날 길이 좁아라며 활보할 궁리를 하고 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가장 지혜롭고 영악하게 사는 사람들, 어디든 적응하는 식물같이 끈질기게, 본시 생물은 다 그렇게 하게 돼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다! 해봤자 별무소득이지요. _ 박경리, <토지 17> , p300/572
진보적 식자라는 그들도 믿지 않았다. 형평사운동으로 알게 된 그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론의 수식가(修飾家)가 태반이었으며 학식은 처세요 의복 같은 것, 일본서 한창 유행인 풍조를 옮겨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온 지식의 정체는 내 것을 부수고 흔적을 없게 하려는 것, 소위 개조론이며 조선의 계몽주의였다. 부지불식(不知不識)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동경유학생과 기독교와 일본의 계몽주의 삼박자는 잘 맞은 셈이었다. 일본은 숨어서 어떤 미소를 머금었을까? 주권과 강토는 이미 그들 수중에 있는 것, 내용이 문제 아니었을까. _ 박경리, <토지 17> , p427/572
이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부심과 피해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大地)이며 생명이다. _ 박경리, <토지 17> , p469/572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에서는 영광의 생각과 <토지> 안의 대화 안에서 시적인 아름다움과 시에 담긴 시대정신을 생각하게 된다.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 때문에 영광의 혼란과 생각에 함께 몰입하게 된다. 영광의 마음으로 읽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시 중 한 편을 옮기는 것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문학적인 감성으로 사회문제를 바라본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의 <시적 정의 Poetic Justice: The Literary Imagination And Public Life>는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영롱한 목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나는 오늘부터 지리교사모양으로 벽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고
노쇠한 선교사모양으로 낮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 만한 강인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표는 극장 의회 기계의 치차(齒車)
선박의 삭구(索具) 등을 주저(呪詛)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간 자국 위에 서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도희의 사기사(詐祈師)뿐이 아니겠느냐
모든 관념의 말단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이기는 법이다
새로운 목표는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역을 떠난 기차 속에서
능금을 먹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희열 위에서
40년간의 조판 경험이 있는 근시안의 노직공의 가슴속에서
가장 심각한 나의 우둔 속에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더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_ 김수영, <김수영 전집, 시>,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