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위해 괴로워하거나 기뻐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마치 다른 우주에 속한다는 듯 시(詩)로 둘러싸이고 우리 삶은 감동적인 영역으로 변해, 우리는 그 영역에서 조금쯤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

음악이 그에게 준 기쁨,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욕구를 만들어 낼 기쁨은, 사실 그 순간에는 여러 향수를 실험할 때 느끼는 기쁨이거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떤 세계,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형태가 없으며 우리 지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로지 우리 감각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와 접촉할 때 얻는 기쁨과도 흡사했다. 미술 애호가의 섬세한 눈으로도, 또 풍속 관찰자의 예리한 정신으로도 메마른 삶의 지울 수 없을 흔적을 영원히 간직한 스완으로서는, 인류에게 낯선 피조물, 논리적인 사고력을 빼앗긴 눈먼 거의 환상적인 유니콘처럼 오로지 청각으로만 세상을 지각하는 전설 속 피조물로 변신했다고 느끼는 것은, 일종의 ‘커다란’ 휴식이자 신비로운 쇄신이었다.

그는 밤에만 오데트의 집에 갔으므로, 그녀의 과거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낮에 어떻게 보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상상하게 해 주고, 알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초 지식마저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녀의 과거 생활이 어떠했는지도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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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사람은 다른 지적인 사람에게 바보로 보이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멋쟁이가 자신의 우아함이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대귀족이 아닌 시골뜨기 앞에서다. 세상이 존재한 이래 사람들이 낭비해 온 재치의 비용과 허영심에 의한 거짓말의 사분의 삼은 - 이런 것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트렸을 뿐이지만 - 항상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새로운 사랑이 합쳐진 후부터는 사랑을 암시하는 불꽃이 스며들어 사교 생활을 따뜻하게 채색하며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삶의 이런 시기에 이른 사람은 이미 사랑을 여러 번 경험했으며, 따라서 사랑은 더 이상 그 고유의, 미지의 숙명적인 법칙에 따라, 우리의 수동적인 놀란 마음 앞에서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도움을 주며, 기억이나 암시로 사랑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랑은 더 이상 그 고유의, 미지의 숙명적인 법칙에 따라, 우리의 수동적인 놀란 마음 앞에서 저절로 발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도움을 주며, 기억이나 암시로 사랑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의 정신이 더 이상 고귀한 관념을 품지 않게 된 후부터는, 그런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믿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으로 도피하는 습관을 얻었다.

대중이란 서서히 동화된 진부한 예술 작품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만이 매력과 우아함과 자연의 형태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예술가란 바로 이런 진부함을 벗어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겐 대가들의 그림에서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보편적인 특징뿐 아니라, 반대로 보편적인 것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 즉 우리가 아는 얼굴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거장들의 그림 속에서 찾아내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특이한 취향이 있었다.

사랑이 생겨나는 온갖 방식들이나 성스러운 병을 퍼뜨리는 온갖 요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이따금 우리를 스쳐가는 저 커다란 동요의 숨결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존재야말로 바로 우리가 사랑하게 될 사람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그 존재가 그때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같은 정도로 우리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우리 취향이 배타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곁에 없을 때, 그 사람의 동의로 우리가 즐기던 쾌락이 갑자기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불안한 욕구로, 이 세계의 법칙으로는 결코 충족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저 부조리한 욕구로, 즉 그 사람을 소유하겠다는 미친 듯한 고통스러운 욕구로 대치될 때, 이런 조건은 실현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이성이 그날 밤에는 도저히 실현될 수 없으리라고 말해 주던 기쁨이 이제는 오히려 그런 사실 덕분에 더욱 현실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기쁨에 협력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기쁨은 그의 밖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기쁨을 자신에게 부여하기 위해 정신에서 끌어낼 필요도 없었다. 기쁨은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었고, 기쁨 자체가 그가 두려워하던 고립을 꿈처럼 사라지게 하는, 눈부시게 빛나는 진실을 투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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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나는 게르망트 쪽에서 어느 일정 시기 동안 내 마음속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구별하는 것을 배웠고, 그 마음 상태들은 우리 몸에서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열처럼, 한쪽이 나타나면 다른 쪽을 쫓아 버리면서 각각의 나날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 상태들은 가까우면서도 서로의 밖에 있어 소통할 방법이 없으므로, 나는 더 이상 한쪽의 상태에서 내가 욕망하고 두려워하고 성취한 것을, 다른 한쪽에서 이해하기는커녕 그려 볼 수도 없다.

이렇게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서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 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 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내가 이 두 길을 돌아다니며 알게 된 사물들이나 존재들만이 아직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직도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게 여러 다른 인상들을 동시에 느끼게 했으므로, 아마도 그 인상들은 결코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훗날 내게 많은 환멸을 맛보게 했고, 또 많은 과오를 범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가끔 어떤 사람이 산사나무의 울타리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난 분별없이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싶어 했고, 또는 여행에 대한 단순한 욕망만으로도 사랑이 되돌아온 걸로 믿고, 또 상대방에게도 그렇게 믿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 때문에 오늘날 내가 받는 인상들 가운데에는 이 두 길과 연결되는 인상들이 언제나 존재하며, 그 인상들에 토대와 깊이를 주어 다른 인상들보다 더 높은 차원을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 두 길은 그 인상들에 대해 나만이 아는 어떤 매력이나 의미를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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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란 우리 믿음이 존재하는 세계로는 들어오지 못하며, 사실은 믿음을 낳게 한 적이 없지만 파괴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믿음을 끊임없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믿음을 약화하지는 못한다.

한 여인이 나타났으면 하는 욕망이 자연의 매력에 뭔가 더 열광적인 것을 덧붙여 주었다면, 반대로 자연의 매력은 여인의 매력이라는 지나치게 한정된 매력을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곧 여인의 아름다움이었고, 그녀의 입맞춤이 지평선의 영혼과 루생빌 마을의 영혼, 내가 그해 읽은 책들의 영혼을 내게 넘겨줄 것만 같았다. 내 상상력은 관능적인 것과 접촉하면서 힘을 얻었고, 관능적인 것은 내 상상력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내 욕망은 이제 끝이 없었다

완전한 악인의 악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이어서 그 자신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덕이나 고인에 대한 기억, 자식으로서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찬미하지 않는 이상 그것들을 모독하는 데서 오는 불경한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그들이 잠시 관능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도 사실은 잠시나마 그들의 소심하고도 다정한 영혼으로부터 탈출했다는 환상에 빠지려고, 악인의 껍질을 쓰고 공범자와 함께 쾌락의 비인간적인 세계로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그 정신은 악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악덕이란 것이 그녀가 평소에 지켜야 하는 수많은 의무적인 예의범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정신이었다. 쾌락이라는 관념을 부여하고 쾌락을 매혹적으로 보이게 한 것은 악이 아니었다. 오히려 쾌락은 그녀에게 해로운 듯했다.

마치 어떤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원반처럼, 그 관념과 이미지를 일치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자주 꿈꾸어 왔던 게르망트 부인이 내 외부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가 보고 있는 지금, 내 상상력에는 더 큰 힘이 가해졌고, 이 상상력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과 접촉하는 순간 잠시 마비되었다가 곧 반응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두 종탑은 영원히 나무들이나 지붕, 향기, 소리에 합류해 버렸을 것이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모호한 기쁨 덕분에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왔는데, 나는 그 기쁨 자체에 대해서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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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허구적인 그 고장은 아이들에게 나쁜 독서를 허락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미 상당히 슬픔에 기운 이 어린 친구에게는, 슬픔에 기우는 성향인 이 아이의 마음을 위해서도, 나는 그곳을 선택하거나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의 속내나 헛된 회한의 기후는 나처럼 미망에서 깨어난 늙은이에게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아직 기질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언제나 해롭습니다.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따라서 메제글리즈로 가기 위해 ‘게르망트를 통해서 간다든가’ 그 반대로 하는 것은, 마치 서쪽으로 가기 위해 동쪽을 통한다고 하는 말만큼이나 아무 의미 없이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길 사이에 킬로미터가 나타내는 거리감 이상의 것을 두고 있었는데, 그 거리감은 내가 그 길들을 생각할 때 내 머릿속 두 부분 사이에 놓인 거리감 같은 것으로, 단지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분리하고 각각 다른 차원으로 집어넣는 그런 정신적인 거리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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