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 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차이퉁》 지는 자사 기자들에게 일어난 두 건의 살인 사건이 알려지자 상당히 유별난 태도를 취했다. 광적인 흥분! 대서 특필. 1면 기사. 호외 발행. 통례를 벗어난 크기의 부고. 어차피 피살 사건이란 늘상 일어나는 것인데도, 마치 저널리스트 살인 사건은 뭔가 특별한 것인 양, 은행장이나 은행원 혹은 은행 강도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언론의 과잉 반응에 대하여 언급해야겠다. 《차이퉁》 지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들까지도 실제로 한 저널리스트의 피살 사건을 특별히 더 나쁜, 특히 경악스럽고, 거의 장엄하기까지 한, 그러니까 종교 의식적인 살해와 같은 수준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자 《차이퉁》만은 카타리나가 보지 못하게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엘제 볼터스하임은 잠들고 콘라트 바이터스는 욕실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잠깐 동안에 카타리나가 살짝 밖으로 빠져나가 어스름 새벽녘에 처음 눈에 띈 가장 좋은 《차이퉁》 무인 판매함을 부수고 열었다. 일종의 성물 절도 같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돈을 내지 않고 《차이퉁》을 빼냄으로써, 《차이퉁》의 신뢰를 악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류 정체 현상은 일단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 바로 블로르나 부부가 의기소침하고 신경이 곤두선 채 우울한 기분으로 야간 열차에서 내린 후 나중에 집에서 보려고 같은 판 《차이퉁》을 손에 넣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략 마흔 살쯤 돼 보이는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몹시 비탄에 젖은 듯, 거의 쇠락한 모습으로 그들이 살았던 게멜스브로이히의 남루한 오두막 앞에 서 있는 사진, 마지막으로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사망한 병원 사진도 실렸다. 기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여전히 자유의 몸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카타리나 블룸의 입증 가능한 첫 번째 희생자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행실에 대한 충격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어머니는 죽어 가고 있는데 그 딸은 강도이자 살인자인 한 남자와 다정하게 춤추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기이한 일이고,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극도의 변태에 가깝다. 이 여자는 정말 ‘얼음처럼 차갑고 타산적’일까?
얼마 전에 어느 유명한 정보학 교수가 이 소문을 계속 퍼뜨렸는데 그도 직접 정보를 구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정보학자는 어떻게 정보를 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풍문’으로, 즉 제2, 제3의 입을 거쳐, 아니, 심지어 여섯 사람의 입을 거쳐 전해진 소문으로 정보를 구하는가?
10년만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차이퉁》이 숱한 비방과 혐의를 퍼뜨리던 그 시절을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차이퉁》은 아직 살인자로 입증되지도 않은 많은 사람들을 살인자라고 명명했다.
주위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놓여 있고, 《차이퉁》은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로 경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거나 경찰에서 정보를 입수하면서, (그런 정보 교환 시, 우스울 정도로 사소한 것이 혐의점이 되곤 한다.) 헤드라인, 혐의, 비방, 비열함을 마구 내휘두른다. 거기서는 어떠한 장미도 꽃을 피우지 못하며, 그사이 이 ‘소박한 소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가도록 도와줌으로써 정말로 벌 받을 만한 행동을 했고, 명예와 품위를 잃는다.
이것은 범죄 소설의 아주 낡은 모티프 중 하나이다. 이제 《차이퉁》은 무엇 앞에서도 두려워 물러나지 않고,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을 이 《차이퉁》의 탓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기자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뿐만 아니라,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도 있다는 것이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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