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들었을 때, 하느님, 롤랑은 얼마나 괴로웠던가!
롤랑은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돌진해서는 온 힘을 다해 상대에게 창을 꽂는다.
방패를 부수고, 갑옷을 찢고,
가슴에 창날을 박아 뼈를 부수고
등뼈를 통째로 몸통에서 분리해버리니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다.
창날을 박아 넣으며 몸을 뒤흔들어놓고

"프랑스 기사들이여! 나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되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도망하지 마시오.
누구도 그대들을 조롱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해서는 아니 되오!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이 훨씬 나은 일이오.
우리는 곧 최후를 맞게 될 것이오.
오늘 이후 우리는 살아 있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에게 한 가지만은 보장할 수 있소.
거룩한 천국의 문이 그대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점이오.
그대들은 죄 없는 아기들과 함께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오."

왜냐하면 분별력을 갖춘 용맹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기 때문일세.
무모함보다는 신중함이 나은 법이네.
프랑스인들은 자네의 경솔함 때문에 죽었네.
우리는 이제 샤를 황제를 섬길 수 없을 걸세.
내 말을 믿었더라면 폐하께서 돌아오셨을 테고,
우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했을 걸세.
마르실 왕도 사로잡혔거나 죽임을 당했겠지.
롤랑, 자네의 용맹이 우리에겐 불행이었네!!

롤랑 경은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력을 다해 상아 나팔을 분다.
입에서는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머리의 관자놀이가 터진다.
상아 나팔 소리는 멀리까지 퍼져
고갯길을 지나는 샤를 왕의 귀에 들린다.
넴 공도 그 소리를 듣고, 프랑스 기사들도 귀 기울인다.
왕이 말한다. "롤랑의 상아 나팔 소리가 들리노라!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면 롤랑은 절대로 상아 나팔을 불지 않을 것이니라."

올리비에가 말한다.
"이제 자네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네.
나는 자네를 보지 못하네. 주님께서는 자네를 보시기를!
내가 자네를 치다니! 용서해주게!"
롤랑이 대답한다.
"아닐세, 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네.
여기 하느님 앞에서 자네를 용서하네."
이 말을 하고는 서로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롤랑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방식대로 그를 애도한다.
"아, 고귀한 대주교님, 훌륭한 집안의 기사시여,
오늘 저는 당신을 위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보살핌을 구합니다!
결코 누구도 대주교님처럼 기꺼이 하느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에 있어
사도들 이래로 대주교님과 같은 성직자는 없었습니다.
대주교님의 영혼에 부족한 것이 없기를!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려 대주교님의 영혼을 맞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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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15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마 그 롤랑의 노래인가 하고 들어왔는데 정말 그 롤랑의 노래네요ㅋㅋ
진짜 분야 다양하게 읽으셔서 존경스럽습니다 ^_^ b

겨울호랑이 2022-07-15 23:30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한 분야만 진득하게 파질 못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얇게 넓게 깔아놓고 독서를 하는 것이 제게 맞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롤랑의 노래>는 이전에 궁리 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을 읽었었는데, 이번 번역본은 더 현장감이 넘치는 것 같아요. 영화 <라스트 듀얼>을 떠올리게 하는 현장감과 종교전쟁의 한 면을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등대지기님 감사합니다. ^^:)
 

그리고 《차이퉁》의 그렇고 그런 쓰레기 기사는 늘 있었고, 몇몇 몹쓸 놈들이 익명으로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지 않는가?

여기서 이따금 언급된 뤼딩이라는 자가 《차이퉁》의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S.를 모조리 삭제하고, 전부 B.로 쓰시오."라고 말하면, 그저 애써 고생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악의 없는 도청자는 그 소리를 엿듣고 무슨 생각을 할까?

여기에서는 절대적인 정의가 지배해야 한다. 카타리나가 바로 그 술집, 그러니까 불운했던 쇠너가 "앵앵거리는 여자와 함께 밖으로 사라져 버린" 그 술집을 탐색하러 가기 위해 카니발 옷을 재단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퇴트게스와 인터뷰를 약속한 뒤, 그리고 《존탁스차이퉁》이 퇴트게스의 기사를 계속 실은 뒤였다. 그러니까 기다려야 한다. 확실히 입증되고 증거가 제시된 것은, 바로 하이넨 박사가 그의 환자 마리아 블룸이 급작스럽게 죽은 것에 대해 너무나 놀랐고, 그가 "예상치 못한 외부 영향들을 입증하지는 못하겠지만 배제할 수도 없다."라고 말한 사실이다. 무고한 페인트공들이 여기서 책임을 떠맡게 되어서는 안 된다. 독일 수공업의 명예를 더럽혀서도 안 된다.

여기서는 보고하기보다는 거의 인용만 하도록 하겠다. 인정해야 할 것은, 카타리나의 "스토리"와 사진이 더는 1면을 장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루트비히 괴텐이 "사업가의 별장에 숨었던 카타리나 블룸의 다정한 연인"이라는 표제와 더불어 1면에 실렸다. 7 내지 9쪽에 걸쳐 많은 사진과 함께 실린 스토리 자체는 지금까지의 기사들보다 훨씬 더 풍부해졌다.

카타리나의 아버지가 위장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게멜스브로이히의 한 신부가 제공한 놀랄 만한 ? 관계자 모두를 놀라게 한 ? 정보가 사실인지를 조사하기 위해 블로르나는 하루 날을 잡아 그 마을로 갔다. 우선, 이 신부는 자신의 진술을 거듭 확인해 주었고, 《차이퉁》이 그의 말을 그대로 올바르게 인용했다고 인정했으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심지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자신의 후각이 항상 믿을 만하다며, 블룸이 공산주의자라는 냄새를 그냥 맡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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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 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차이퉁》 지는 자사 기자들에게 일어난 두 건의 살인 사건이 알려지자 상당히 유별난 태도를 취했다. 광적인 흥분! 대서 특필. 1면 기사. 호외 발행. 통례를 벗어난 크기의 부고. 어차피 피살 사건이란 늘상 일어나는 것인데도, 마치 저널리스트 살인 사건은 뭔가 특별한 것인 양, 은행장이나 은행원 혹은 은행 강도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언론의 과잉 반응에 대하여 언급해야겠다. 《차이퉁》 지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들까지도 실제로 한 저널리스트의 피살 사건을 특별히 더 나쁜, 특히 경악스럽고, 거의 장엄하기까지 한, 그러니까 종교 의식적인 살해와 같은 수준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자 《차이퉁》만은 카타리나가 보지 못하게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엘제 볼터스하임은 잠들고 콘라트 바이터스는 욕실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잠깐 동안에 카타리나가 살짝 밖으로 빠져나가 어스름 새벽녘에 처음 눈에 띈 가장 좋은 《차이퉁》 무인 판매함을 부수고 열었다. 일종의 성물 절도 같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돈을 내지 않고 《차이퉁》을 빼냄으로써, 《차이퉁》의 신뢰를 악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류 정체 현상은 일단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 바로 블로르나 부부가 의기소침하고 신경이 곤두선 채 우울한 기분으로 야간 열차에서 내린 후 나중에 집에서 보려고 같은 판 《차이퉁》을 손에 넣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략 마흔 살쯤 돼 보이는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몹시 비탄에 젖은 듯, 거의 쇠락한 모습으로 그들이 살았던 게멜스브로이히의 남루한 오두막 앞에 서 있는 사진, 마지막으로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사망한 병원 사진도 실렸다. 기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여전히 자유의 몸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카타리나 블룸의 입증 가능한 첫 번째 희생자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행실에 대한 충격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어머니는 죽어 가고 있는데 그 딸은 강도이자 살인자인 한 남자와 다정하게 춤추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기이한 일이고,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극도의 변태에 가깝다. 이 여자는 정말 ‘얼음처럼 차갑고 타산적’일까?

얼마 전에 어느 유명한 정보학 교수가 이 소문을 계속 퍼뜨렸는데 그도 직접 정보를 구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정보학자는 어떻게 정보를 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풍문’으로, 즉 제2, 제3의 입을 거쳐, 아니, 심지어 여섯 사람의 입을 거쳐 전해진 소문으로 정보를 구하는가?

10년만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차이퉁》이 숱한 비방과 혐의를 퍼뜨리던 그 시절을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차이퉁》은 아직 살인자로 입증되지도 않은 많은 사람들을 살인자라고 명명했다.

주위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놓여 있고, 《차이퉁》은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로 경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거나 경찰에서 정보를 입수하면서, (그런 정보 교환 시, 우스울 정도로 사소한 것이 혐의점이 되곤 한다.) 헤드라인, 혐의, 비방, 비열함을 마구 내휘두른다. 거기서는 어떠한 장미도 꽃을 피우지 못하며, 그사이 이 ‘소박한 소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가도록 도와줌으로써 정말로 벌 받을 만한 행동을 했고, 명예와 품위를 잃는다.

이것은 범죄 소설의 아주 낡은 모티프 중 하나이다. 이제 《차이퉁》은 무엇 앞에서도 두려워 물러나지 않고,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을 이 《차이퉁》의 탓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기자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뿐만 아니라,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도 있다는 것이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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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쾌락은 끝이 없는 듯 여겨졌다. 그런데 한두 번은 이러한 밤에 기쁨을 맛보기도 했는데, 고통이 가라앉은 데서 생겨난 기쁨이었으므로, 만일 갑자기 멈춘 불안이 반동 작용으로 다시 격렬하게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평온한 기쁨이라고 부를 만했다.

스완은 이 내적인 삶의 예기치 않은 풍요로움이 정확히 무엇에서 연유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욕구 역시 현실 세계 밖에서 전개되던 것으로, 바로 음악을 듣고 싶고 음악에 정통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는 그녀라는 이 삼인칭 대명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사랑이나 죽음과도 흡사하지만 막연한 닮음이라기보다는, 그 실재가 우리로부터 빠져나갈까 두려워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는,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질문하게 하는 인격의 신비로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스완의 사랑이라는 이 병은 너무도 확산되어 그의 모든 습관이나 모든 행동, 그의 생각이며 건강이며 수면이며 생명이며 심지어는 그의 죽음 뒤에 그가 소망하는 것에까지도 밀접하게 섞여 그와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에, 스완 자신을 거의 전부 파괴하지 않고는 그로부터 제거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만 몸을 떠는 법이다. 우리 행복이 이미 사랑하는 사람 손에 달려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람 곁에서 얼마나 침착하고 편안하며 또 대담하게 행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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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2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제 잃어버린 시간도 읽으시는군요. 겨울호랑이님 독서력에 정말 감탄할 따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2-06-03 06:44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잃어버린 시간 11>이 최근에 나와 읽으려 보니 앞부분이 캄캄하네요 ㅜㅜ 그래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바람돌이님 오늘도 활기찬 하루 되세요! ^^:)
 

오데트의 육체는 별로 좋지 못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살이 쪄 갔다. 그렇게도 풍부한 표현이며 애절한 매력이며 놀란 듯 꿈꾸는 듯하던 시선도 그녀의 첫 번째 젊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녀가 스완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은, 말하자면 이처럼 스완이 오데트를 가장 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는 예전에 느꼈던 매력을 다시 찾아내려고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번데기 아래 살고 있는 것은 여전히 오데트였으며, 여전히 덧없고 포착할 수 없는 앙큼한 의지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스완이 그녀 마음을 붙잡기 위해 예전과 똑같은 열정을 기울이기에 충분했다.

스완은 모든 사람 가운데서도 유독 자기에게만 그날 피에르퐁에 갈 권리가 없는 것은, 바로 자기가 오데트에게 있어 남들과는 다른 어떤 사람, 즉 그녀의 연인이기 때문이며, 이 보편적인 자유 통행 권리를 제한하는 것도 그 노예제도 중 한 형태, 그에게는 그렇게도 소중한 사랑의 형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행복해했다.

오데트가 사는 세계는, 그가 그녀를 그곳에 두느라고 시간을 보내고, 어쩌면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무섭고 초자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슬픔도 발산하지 않는 현실 세계가 아닐까! 그가 지금이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이 테이블이며, 지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이 음료수며, 그가 감사하는 마음만큼이나 호기심을 품고 찬미하며 바라보는 이 모든 물건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 물건들은 그의 몽상을 흡수하면서 그를 몽상으로부터 해방해 주는 동시에, 물건 자체는 반대로 몽상으로 풍요로워져 만질 수 있게 실현해 보여 줌으로써 그를 흥미롭게 하고, 그의 시선 앞에서 입체감을 띠며 동시에 그의 마음을 진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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