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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동아시아 냉전과 식민지·전쟁범죄의 청산
김영호 외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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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 있어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냉전체제와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자체가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성립되었으며, 이후 냉전 대립에 의해 분열된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구조화시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 및 식민지 지배의 책임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실종되어 지금까지 많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과거의 전쟁과 대립을 해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냉전'이라는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이 밀려오면서, 동아시아의 탈식민화 과정이 새로운 전쟁과 분쟁으로 격화되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288/459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안에는 체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한 주제가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폭넓게 다루어진다. 고대 신라 시대로부터 현대의 한반도정책프로세스를, 유럽으로부터 동아시아 이르는 지역을 다루기에 다소 산만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은 '샌프란시스코 체제 = 냉전체제'다. 결국, 본문에서 언급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극복은 냉전 체제의 극복을 말하며, 한반도 평화정착으로부터 시작되어 아시아 공동체로 안착하기 위한 여러 문제 인식과 방안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남긴 문제는 무엇인가?

미국의 동아시아 근대사 연구의 권위자 존 다우어 John W. Dower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유산을 다음 8가지로 요약하였다. 오키나와와 두 개의 일본, 한/중/러와의 영토 분쟁, 일본 내의 미군기지, 일본 재무장과 미국의 핵우산, 역사문제들,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일본의 예속적 독립이다. 이들 8가지 모두가 한국과 관계가 깊지만, 특히 독도 영토문제와 역사문제 등이 중요하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14/459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국 본토 점령과 1950년의 한국전쟁은 샌프란시스코 회담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다. 전후 빠른 속도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일본을 최후의 보루로 지키고자 했던 미국의 의중이 강화조약에 반영되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세계대전의 종결이 아닌 새로운 전쟁을 위한 체제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영토문제와 역사문제가 부정적인 유산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계속하게 만든 국제적인 국가체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적군 진영은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뒤에 숨은 소련으로 구성됐다... 일본 자위대는 명목상으로는 그 전쟁의 미군 진영 잠재전력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고, 그 통합성과 안전을 보장했다. 이 체제 내에서 일본은 미군의 주요 후방 지원자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57/459

결과적으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전챙책임자가 아니라 전후 미국의 가장 강력한 파트너로서 공인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이 해외 식민지를 모두 상실한 것에 반해, 일본은 자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보존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배후기지로서 비공식적인 마셜플랜(Marshall Plan)의 수혜국이 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가장 부정적인 유산은 전쟁책임에 관한 문제다. 조약문에는 왜 '평화'를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부재했다. 1947년 이탈리아 강화조약에서 연합국은 '3국 동맹'으로 구성된 '추축국'의 일원인 파시스트 정권하의 이탈리아가 침약전쟁을 개시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했다. 이 조약에서는 추축국에서 탈퇴한 이탈리아에 대해 분명한 전쟁책임이 조약문에 명시된 반면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는 전쟁 책임이 물어지지 않았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93/459

일본에 대한 미국의 우호적인 태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모호한 조문(條文)으로 현실화되었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케 되면서 수많은 분쟁지역이 생겨났다. 서로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정치상황에 따라 긴장이 고조되지만 결코, 지역적인 충돌을 넘어서지 않는 분단선. 이러한 분단선은 아시아 전체를 항상 긴장과 분열상태로 남겨놓는 역할을 하면서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그리고 미국)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평화조약의 모호한 자구들은 부주의 탓도 실수탓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은 의도적으로 미해결인 채로 남겨진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파생된 영토분쟁들 - 북방영토/남쿠릴열도, 독도/다케시마, 센카쿠/댜오위(오키나와), 스프래틀리/난샤 그리고 파라셀/시샤 문제들 - 모두 "애치슨 라인 Acheson Line" 곧 1950년 1월에 발표된, 서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냉전 방위선 주변에 나란히 포진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48/459

이와 함께, 일본에 대한 관대한 조치는 일본인들에게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기회 또한 빼앗아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의 2차례 이루어진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에게 전범이라는 죄의식보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이라는 피해의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관대한 처분으로 그 근거를 확보하면서 일본은 동일한 피해국으로서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변국과의 갈등을 키워왔다. 미국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의 연구자들도 거듭 얘기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거의 모든 단체들이 공유하고 있는 피해의식이다. 전쟁책임 문제를 반성적으로 바라보는 진보주의자들도차도 이런 피해의식의 징후를 보였다. 예컨대 이에나가 사부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제국 일본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손상시키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일본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데 대한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연합국 쪽, 특히 미국과 소련도 일본에 고통을 안겨주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83/459

국제무대에서 발설한 아베의 메세지는 보편적 가치, 민주주의, 기본 인권과 법치였으나 2019년 그의 각료들 19명 가운데 15명 그리고 거의 모든 자민당 당료들은 일본회의라는 조직의 수중에 있던 자들이었다. 신보수주의, 신국가/민족주의 그리고 역사 수정주의의 우익적이고 반동적인 혼합체인 일본회의는 그 극단주의 또는 극우 국가/민족주의 때문에 지금의 다른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용인될 수 없을 것이다.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32/459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를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위한 강화조약이, 오히려 냉전(冷戰)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의 분단문제가 갖는 세계사적인 의미와 함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결코 단순방정식이 아님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중국의 대만 문제, 일본의 오키나와 문제, 러시아 북방 영토 문제와도 맞닿아 있는 고차방정식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분단에서 평화 정착 나아가 통일까지 나아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자연히 깨닫게 된다. 예상보다 깊은 분단 체제의 의미를 샌프란시스코 체제 안에서 확인하면서, 이제는 분단문제를 단순히 친일세력 극복이라는 관점보다 한 단계 높은 세계사적 수준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식민지 침략범죄 및 아시아/태평양 전쟁범죄를 징치하기 위하여 시작되었으나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의 발발을 맞아 냉전전략의 일환으로 변질되었고,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전선의 지역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조약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변질 과정에서 식민지범죄, 전쟁범죄의 청산은 물 건너갔고, 과거 청산없는 동아시아, 과거청산 없는 한일 관계의 전후사가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대한 과도한 징벌로 오히려 히틀러 등장의 온상이 된 것과는 반대로, 전범국가 일본에 대한 너무나 관대한 처분은 일본을 전쟁 피해자로 착각하게 만들고 파시즘을 부활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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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동아시아 냉전과 식민지·전쟁범죄의 청산
김영호 외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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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기 초안에는 명백히 패전국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 할 영토 목록에 들어 있었으나, 소련의 원자탄 개발과 중국 공산화, 한국전쟁 등을 거쳐 냉전이 본격화한 데에 따른 미국의 전략 수정으로 그 귀속이 모호하게 처리됐다. 남중국해의 스프라틀리(남사)제도와 파라셍(서사)군도 등도 처음엔 중국에 귀속될 영토 목록에 들었다가 나중에 모호하게 처리됐다. 이는 이 섬들이 남북으로 갈린 한국 그리고 공산화한 중국에 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 냉전전략의 일환이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354/459

최근 독도 인근에서 이루어진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은 여러 면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에 대한 가혹한 배상조치가 베르사유 체제의 특징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평양 전쟁 전범국에 대한 배상조치는 이와는 정반대로 관대함 그 자체였다. 전범국은 이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면서 자기 반성의 기회를 상실했고, 전범국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우리나라는 대신 분단이라는 발전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미군정 이후에도 계속된 일왕제를 근간으로 대동아공영권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세력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된 샌프란시스코 체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영토적 모순이 드러난 독도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극적(?) 화해를 이룬 미국-일본의 두 해양 세력 사이에서 자위대를 실질적으로 군대로 인정하고, 전범기를 동맹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은 참 지켜보기 힘들다.

분단 체제의 극복이 결국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극복이라는 연결점을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리뷰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날 일본 우익들이 강제징용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인격살인까지 하며, 오히려 피해자들을 돈만 밝히는 범죄자로 몰면서 한국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파렴치한 적반하장도 그 근거법이라고 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기댄 얘기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35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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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09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흥미롭네요. 이전에 신간 소식에서 본 책이지만 읽어보지 못했는데… 겨울호랑이님 리뷰 기다려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10-09 23:23   좋아요 2 | URL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는 서로 다른 나라의 학자들이 저마다의 관점으로 전후 체제를 분석한 책이라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고 다소 산만하게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나의 실로 전체 주제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체를 담을 수는 없겠지만, 리뷰에서 정리해보겠습니다.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
 
문명의 충돌 - 세계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무엇인가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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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다. 바로 문화다. 민족과 국민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지금까지 그런 질문 앞에서 내놓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 p20/388

새뮤얼 헌팅턴 (Samuel P. Huntington, 1927~2008)은 <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claiming of World Order>에서 탈(脫)냉전 이후 국가 간 갈등의 주제 '문명(civilization)'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왜 '문명'이 새로운 세계의 단절과 대립선이 되는가? 헌팅턴은 이에 대한 해답을 지난 시대 '서구'와 '비서구' 의 대립에서 찾는다.

문명 중 유일하게 서구는 다른 모든 문명에게 대대적인, 때로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다른 문명들의 상대적 힘이 증가하면서 서구 문화의 매력은 반감되며 비서구인들은 점점 자신들의 고유문화에 애착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서구 문화의 보편성을 관철하려는 서구, 특히 미국의 노력과 서구의 현실적 능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부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p194/329

정치적으로 시민혁명, 경제적으로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서구 열강들에 의해 비서구권 국가들은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되고, 구시대의 제국들은 해체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신생국가들은 서양 세계를 뒤따라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서구 세계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서구에 의존해 근대화가 이룩되었다면, 근대화와 함께 일어난 민족주의 등의 힘은 탈(脫)서구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후 정신적으로는 전통사상으로의 회귀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이 헌팅턴의 설명이다.

결국 근대화는 반드시 서구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비서구 사회는 자기의 고유문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서구의 가치/제도/관습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지 않고도 근대화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발전해왔다. 서구 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구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문화 요소에 비하면, 근대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요소는 극히 작은 양이다(p82)... 서구의 우위가 사라지면 서구의 힘도 아울러 사그러들 수밖에 없으며, 비서구 세계는 주요 거대 문명과 그 핵심국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 단위로 흩어질 것이다. 서구의 세계적 영향력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중국이 부상하면서 아시아 문명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가장 빠른 속도로 힘을 키워 갈 것이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p85/329

힘을 잃어가는 서구와 힘을 키워온 비서구. 여기에 더해 전통가치에 따라 헝팅턴은 세계를 문명권으로 구분하고 이들의 협력과 대립 속에서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중에서도 헌팅턴은 서구와 이슬람, 그리고 이슬람과 유교 문화권의 대립과 협력관계에 주목한다. 이러한 큰 틀에서 <문명의 충돌>은 이하 본문에서 7~8개 문명권의 핵심국 헤게모니와 문명권 간 대립과 협력에 대해 전망한다.

요약하면 탈냉전 세계는 7~8개의 주요 문명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다. 문화적 동질성과 이질성은 국가들의 이익, 대결, 협력 양상을 규정한다.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국가들은 놀라울 만큼 판이한 문명들에서 유래했다.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지적 분쟁은 판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이나 국가 간의 충돌이다. 정치 경제적 발전의 지배적 양상은 문명과 문명마다 다르다. 국제 문제의 중요한 사안에는 문명의 차이도 들어간다. 장기간 주도권을 행사해온 서구 문명으로부터 비서구 문명으로 힘의 무게중심이 옮겨 가고 있다. 세계정치는 다극화, 다문명화되었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p24/388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지배적 대립은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가장 격렬한 대립은 이슬람 사회와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횡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할 것이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p194/329

문명과 그 핵심국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양면적이며 자주 변화한다. 한 문명 안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다른 문명에 속한 나라들과 관계를 정립할 때 대체로 핵심국의 노선을 따른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같은 문명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 나라들이 다른 문명에 속한 모든 나라들과 동일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제3의 문명에 속한 공동의 적을 겨냥하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상이한 문명에 속한 나라들 사이의 협력을 낳을 수 있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 p263/329

1993년 공산권이 붕괴되는 시점에 쓰여진 <문명의 충돌>은 분명 20세기 말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 이후 새로운 흐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먼저, 오늘날 국제 정세를 문명 간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급진적인 이슬람 교도가 하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극우집단의 대두라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리고, 극우세력의 대두가 경제적 불평등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문명 간의 대립보다는 경제적 문제에서 찾는 것이 보다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 모든 전쟁의 원인은 정치가 아닌 경제가 아니었던가. 다만, 노골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탐할 수 없기에 만들어낸 대의명분이 종교, 사상, 민족주의 등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냉전 이후에 '문명'이 이데올로기를 대신할 새로운 대의 명분이될 것이라는 전망이 당시에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문명의 충돌>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서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진보 시대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으며 복수의 다양한 문명들이 교류하고 경쟁하고 공존하고 화해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p100)... 범세계적으로 종교의 부활을 가져온 가장 명백하고 두드러지고 강력한 원인은 종교의 죽음을 야기할 것으로 예측되던 원인이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후반부 세계를 휩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근대화 과정이었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뿌리를 잃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거나 실업자로 전전했다. 그들은 낯선 군중 속에 섞이고 새로운 관계틀에 노출되었다. 그들에게는 정체성의 새로운 뿌리가 필요했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p102/329

서구는 대량 살상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 국제질서와 안정에 기여하고 모든 국가의 이익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이것을 서구의 헤게모니 고수 전략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대량 살상무기의 확산을 놓고 미국과 지역강국이 보이는 불안의 차이에도 반영된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역이 한반도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p202/329

다른 면 책의 의의를 찾자면, <문명의 충돌>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근대화 이후 급속하게 한국사회에 세력을 확장시킨 기독교,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관계 분석 등에서 우리는 저자의 예리한 통찰력을 느끼게 된다. 다만, 이러한 장점과 함께 기독교의 영향으로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을 중국문화권에 편입시킨 저자의 구분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문명간 충돌의 모습으로 들고 있는 사례가 사실은 지난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은 장점에 뒤이은 비판점이 될 것이다.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는 국가 간 분쟁이 싹틀 소지가 많다. 가장 널리 인정되는 분쟁 위험 지역은 한반도와 중국이다. 그러나 이곳은 냉전의 유산이다. 이념 대립은 뚜렷한 감소 추세에 있다(p235)... 중국은 동아시아의 지배국이 되려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은 점점 중국 의존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급속한 성장에다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경제발전에 화교들이 차지하는 비중도 급격히 늘고 있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점점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_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p246/329

부연하자면, 이슬람 문명 내에서 일어난 혼란과 갈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 베르사유 체제의 산물이며, 남중국해와 한반도 문제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1953년 판문점 체제의 결과라는 점에서 결국 헌팅턴이 제기한 '문명 간 충돌'은 경제적 요인으로 생겨난 대립의 대의 명분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과거 20세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개념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한계점을 인식하고 <문명의 충돌>을 읽는다면, 문명 간의 대립만이 아닌 다른 중요한 갈등요소를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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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보고서 이전에, 국제앰네스티는 러시아 관련 90여 건의 ‘신규‘ 보도자료와 캠페인을 사이트에 게재했다. 2021년 초반 이후 자료만 봐도, 모두 러시아를  비판하고 있다. 러시아의 반체제 인사 구속, 언론 및 시위의 자유 침해, 정적인 알렉산더  나발니(Alexandre Navalny)의 숙명, 페미니즘 운동가 억압, 전쟁 포로 핍박 등을 고발하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 관련 문서는 올해초부터 약 30여 건을 발표했으며 그중 단 1건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에 전쟁포로들의 권리존중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제외하면, 모든 자료가 러시아의 침공, 전쟁범죄, 점령군의 인권침해를 비난하는 것들이다. 결국 국제앰네스티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완전한 중립‘도 지키지 못한 채, ‘과도한 중립‘으로 가해자를 편든 셈이 됐다. - P5

당시 소수였던 칠레 거주 외국인 참관인들은 "부정선거"라고 외쳤다. 약 200개의 수정안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의 헌법은 작성 때부터 신자유주의를 국가 경영방식을 채택했으며, 실상 달라진 게 없었다.
이후 대규모의 개혁 시도가 있었다. 사회민주 진영의 리카르도 라고스 전 대통령은 권좌에 오르자 과거 피노체트도 누린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특권, ‘종신  상원의원직‘을 없애고,국가원수가 군 통수권자의 임명권과  해임권을 갖게 했다.
2020년 10월 개헌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는 결정적이었다. 결과는 찬성이 78%, 특히 의회 개입 없이 선출된 제헌의회 ‘찬성‘은 80%였다. 몇 달 동안 누적된 사회적 긴장상태가완화되면서, 국회와 피녜라 정권의 정통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론조사에서 피녜라의 지지도 역시 곤두박질쳤다.
- P17

국가가 경제를 운영함으로써 생산을 다각화하고 사회통합 부문을 강화한다는 게 이 법안의 골자다. 부정부패를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하나의 죄로 규정하고, 이 죄를 지은사람은 다시는 공무원을 하거나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한다. 인권법 위반, 성범죄 또는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같은규정을 적용한다. 특히, ‘보편성, 연대의식, 자존 및 지지의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보장 시스템 설치도 그 내용으로 한다. 최종적으로, 기후위기 상황을 받아들이고 국가에모든 대비책, 적응대책 등을 마련하라고 지시할 최초의 현법이 탄생할 수 있다. - P19

이처럼 러시아에 열광하는 모습이 뚜렷하지만, 전쟁에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도 있다고 몇 사람이 우리에게 귀띔했다. 익명을 원한 대학 직원 나탈리아 M. 은 "숨어있는 남학생들이 많다"라고 털어놓았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이 병력을 얼마나 잃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2022년 전투 초기 이후 2,650 명의 군인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전쟁 전) 약 220만 명의 인구에 비하면 상당히 큰손실이다. 도네츠크 도심의 마트에서 일하는 한 여성이 계산대 뒤에서 "우리는 전쟁이 지겨워요"라고 넌더리를 쳤다.
"우리는 8년이나 전쟁을 겪었고, 나도 우크라이나인이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 P25

우크라이나가 이 요구를 수용할 경우, 나토 가입 추진을 명시한 자국 헌법을 수정해야 한다. 러시아는 또한 극우민족주의 및 ‘신나치주의‘ 정당, 조직, 기업을 금지하고 러시아 입장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인물을 추앙하는법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어를 제2국어로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요컨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요구한 셈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요구 사항은 러시아군이 전투를 즉각 중단하고 크름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 국토에서 철수하는 것이었다. - P27

결국 푸틴은 유럽에서 발을 빼려던 미국을 다시 유럽으로 끌어들였다. 나토의 축소를 원하던 푸틴의 바람과는 반대로, 더욱 확대됐다. 지난 7월 1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정상회의는 "나토는 여전히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동맹"임을재확인하는 최종 선언문을 채택하고 동맹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심지어 러시아의 ‘특수작전‘은 동서로 분열됐던 나토를 재결합시켰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충격에 빠진 30여 개회원국은 ‘대부‘ 미국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됐다.  - P31

우크라이나 전쟁은 시작부터 두 개의 전쟁이었다. 하나가 미국 유럽 등 서방의 대대적 무기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라면, 다른 하나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유례없는 대대적인 제재로 촉발된 ‘경제전쟁‘이다. 이제 6개월을 넘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전이 된 상황에서 전쟁의 향방, 즉 힘의 균형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이 경제전쟁에 달려있다. 워싱턴과 브뤼셀은 러시아 탱크가국경을 넘은 지 불과 며칠 만에 대규모 제재로 러시아를 겨냥한 경제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과소평가했듯, 서방은 러시아를 과소평가했다. - P38

세계 가스시장의 긴장 고조와 말람파야(팔라완섬 부근) 가스전의 고갈 문제로 리드뱅크 가스 매장지 (스플래틀리 군도)가 필리핀-중국 관계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다. 현재 말람파야 가스전은 루손섬 전력수요의 40%를 공급하고 있다.
스티븐 제임스 로빈슨 필리핀 주재 호주 대사에 따르면, 마르코스 주니어 신임 대통령은 중국과의 분쟁문제에
‘매우 신중하고 균형 있게 접근할 것이다.  아버지가 고이 물려준 스프래틀리 군도를 1인치라도 뺏기는 건 용납할수 없을 테니 말이다. - P50

국가와 자본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두 개념이 서로의 경계를 심각하게 침범해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면? 은행가가 대통령이 되고, 같은 인물들이 정·재계 요직을 구분 없이 자유롭게 오간다. 그 결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컨설팅 회사가 공공정책에 손을 뻗칠 때, 이는 자본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국가자본? 극신자유주의?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렵다. - P58

한편, 극단적인 기업주의와 극단적인 파시즘, 두 부류의 돼지들은 상호보완을 위해 맞닿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파시즘은 기업화된 사회의 부수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원자화하고 완전히 고독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로써 정체성주의가 만들어낸 가공의 생존방법을 확산시킬 이상적인 환경이 구축된다. 인종차별에 집착하고 이슬람을 혐오한다. ‘기업‘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고 공개 토론에서 강한 발언으로 토론을 극단으로 몰고 간 정부 인사만 몇 명인가? 대선의 삼각구도는 가속화됐다. - P62

미국 지질연구원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세르비아의 리튬보유량은 전 지구의 1.3%로, 볼리비아의 23.5%, 아르헨티나의 21%, 독일의 3%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스위스바젤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이의 라인 지구 광맥의 온천에서 광물을 추출해도 세르비아에서 리튬을 채굴해 처리하는것보다 이산화탄소가 훨씬 적게 배출된다.
그러나 독일 정부에 있는 환경운동가들은 이에 반대한다. 실상 이는 환경오염 피해를 EU 외부로 밀어내는 것이다.
오염의 원인이 되는 생산업을 외주화해,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중앙 정부의 위험 요인을 축소하는 것이다. - P69

원자력산업은 대부분 민영화됐지만, 폐기물관리는 여전히 공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1982년, 미국 의회는 연방정부가 민간 원전 운영사들에 폐기물 매립 해결책을 의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원전에서 멀리 운송된 폐기물은 거의 없다. 연방정부는 일시적으로 네바다 주의 유카 산을 매립지로 선정했으나, 라스베가스에서 북서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서 현재 보류된 상태다.
그 결과, 폐기물은 40년째 60여 개의 원전부지에 그대로 묻혀있다. 연방정부는 계약위반을 이유로 원전 운영사들에 매년 수억 달러를 징수하고 있다. 폐기물 처리는 현실성없는 문제로 여겨지며, 영속적인 해결책도 논의되지 않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더즈 포 뉴클리어는 맹목적일 정도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페기물은 원전부지에 매우 안전하게 보관돼 있다. 폐기물 저장용기는 그 위에 누워서 잠을 자도 될 만큼 안전하게 밀폐돼 있다. 이처럼 폐기물을 외부로부터 완벽히 격리시킬 기업이 또 있는가?" 제니퍼 클레이는 이렇게 반문했다. - P78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결코 혁명적이지 않은 예들이다. 오늘날 가장 명망 있는 교육 이념가들조차도 부인하지않는 사실이 있다. 프랑스의 공교육은 거듭된 개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을 사회의 상승 동력으로 통합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양 진영 정치인들에서부터 학계에 이르기까지 널리 공유돼있다. 그런 만큼, "학교의위기"라는 수십 년간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학교는 항상 노동계급을 강등시키는 과제를 떠맡았고, 학교 시스템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고용주의 요구사항이 이런 과제를 방해한 적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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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특히 미국이 논의 초기에 한국이 반드시 서명 및 비준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에 주목하고, 이것이 영국과 일본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한국 배제로 낙착되는 까닭을 다음 과제로 남겼다.

영국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을 수립하자 이와 유대를 전제로 정책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한국 참가에 대해 미국과 의견이 같지 않았다. 한국은 1945년 이전에 일본 영토의 일부였고, 해방 후에도 주권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51년 1월부터 덜레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한국의 참가를 허용한다는 주장을 거듭 밝혔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함께 항일전선에 참가하였다는 것, 둘째는 현재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한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1951년 4월 23일,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도쿄를 방문한 덜레스에게 제시한 〈한국과의 평화조약
Korea and Peace Treaty
〉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일본정부의 의견으로 제시되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만약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100만 명에 달하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재산권과 배상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덧붙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까지 열강들 사이의 식민지 경쟁에서 조장된 비밀협약의 무법과 불법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모든 조약은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것을 전제로 법전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개인의 학설로 존재하던 국제법을 공법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로티우스 정신’의 표방은 열강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제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을 앞두고 미국정부가 한국을 서명국으로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침략행위를 범한 자를 우대하는 조약이 되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묻는 조약이 아니라 냉전체제에 대한 대응전략 차원에서 ‘일본 구하기’ 조약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냉전체제 논리와 제국주의 의식이 동거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 불합리한 관계는 이후로도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불안정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21세기 그로티우스 법 정신"의 구현 차원에서 새로운 노력이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사태를 끌어가는 것은 경제도 안보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역사다. 특히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및 전시 지배하의 강제ㆍ노예 노동의 역사에 대한 상반된 이해가 오늘날 진행중인 "역사문제"를 반복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한국 간의 "역사문제"의 영토적 요소와 관련해, 미국 관리들이 일본 점령통치 기간(1945~1952)에 내린 결정들이 오늘날까지 문제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알다시피 샌프란시스코 체제
the San Francisco System
는 두 가지 사태 전개를 토대로 구축됐다. ①연합국에 의한 일본제국의 완전 해체, ②미국 점령하의 일본정부가 A급 전범자 25명에 대한 유죄평결을 포함해 극동전범재판의 판결에 승복하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 관리들은 일본이 한국에 건넨 돈은 어떤 형식이건 모두 법적인 보상 또는 배상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분명한 태도를 취했는데?일본 관리들의 우려에 대해서도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협상의 일부로 일본이 제공한 기금 약 8천만 달러를 오직 특정 산업분야에만 쓰고, 강제동원 노동자들과 "위안부"(일본군 성노예)처럼 개인 배상을 요구한 일제 치하의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해 쓰지 않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동시에 일본은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미지급 임금을 전용해 착복하고 그 일부를 일본제국의 희생자들을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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