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동아시아 냉전과 식민지·전쟁범죄의 청산
김영호 외 엮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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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 있어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냉전체제와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자체가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성립되었으며, 이후 냉전 대립에 의해 분열된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구조화시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 및 식민지 지배의 책임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실종되어 지금까지 많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과거의 전쟁과 대립을 해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냉전'이라는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이 밀려오면서, 동아시아의 탈식민화 과정이 새로운 전쟁과 분쟁으로 격화되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288/459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안에는 체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한 주제가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폭넓게 다루어진다. 고대 신라 시대로부터 현대의 한반도정책프로세스를, 유럽으로부터 동아시아 이르는 지역을 다루기에 다소 산만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은 '샌프란시스코 체제 = 냉전체제'다. 결국, 본문에서 언급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극복은 냉전 체제의 극복을 말하며, 한반도 평화정착으로부터 시작되어 아시아 공동체로 안착하기 위한 여러 문제 인식과 방안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남긴 문제는 무엇인가?

미국의 동아시아 근대사 연구의 권위자 존 다우어 John W. Dower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유산을 다음 8가지로 요약하였다. 오키나와와 두 개의 일본, 한/중/러와의 영토 분쟁, 일본 내의 미군기지, 일본 재무장과 미국의 핵우산, 역사문제들,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일본의 예속적 독립이다. 이들 8가지 모두가 한국과 관계가 깊지만, 특히 독도 영토문제와 역사문제 등이 중요하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14/459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국 본토 점령과 1950년의 한국전쟁은 샌프란시스코 회담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다. 전후 빠른 속도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일본을 최후의 보루로 지키고자 했던 미국의 의중이 강화조약에 반영되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세계대전의 종결이 아닌 새로운 전쟁을 위한 체제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영토문제와 역사문제가 부정적인 유산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계속하게 만든 국제적인 국가체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적군 진영은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뒤에 숨은 소련으로 구성됐다... 일본 자위대는 명목상으로는 그 전쟁의 미군 진영 잠재전력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고, 그 통합성과 안전을 보장했다. 이 체제 내에서 일본은 미군의 주요 후방 지원자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57/459

결과적으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전챙책임자가 아니라 전후 미국의 가장 강력한 파트너로서 공인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이 해외 식민지를 모두 상실한 것에 반해, 일본은 자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보존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배후기지로서 비공식적인 마셜플랜(Marshall Plan)의 수혜국이 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가장 부정적인 유산은 전쟁책임에 관한 문제다. 조약문에는 왜 '평화'를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부재했다. 1947년 이탈리아 강화조약에서 연합국은 '3국 동맹'으로 구성된 '추축국'의 일원인 파시스트 정권하의 이탈리아가 침약전쟁을 개시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했다. 이 조약에서는 추축국에서 탈퇴한 이탈리아에 대해 분명한 전쟁책임이 조약문에 명시된 반면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는 전쟁 책임이 물어지지 않았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93/459

일본에 대한 미국의 우호적인 태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모호한 조문(條文)으로 현실화되었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케 되면서 수많은 분쟁지역이 생겨났다. 서로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정치상황에 따라 긴장이 고조되지만 결코, 지역적인 충돌을 넘어서지 않는 분단선. 이러한 분단선은 아시아 전체를 항상 긴장과 분열상태로 남겨놓는 역할을 하면서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그리고 미국)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평화조약의 모호한 자구들은 부주의 탓도 실수탓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은 의도적으로 미해결인 채로 남겨진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파생된 영토분쟁들 - 북방영토/남쿠릴열도, 독도/다케시마, 센카쿠/댜오위(오키나와), 스프래틀리/난샤 그리고 파라셀/시샤 문제들 - 모두 "애치슨 라인 Acheson Line" 곧 1950년 1월에 발표된, 서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냉전 방위선 주변에 나란히 포진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48/459

이와 함께, 일본에 대한 관대한 조치는 일본인들에게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기회 또한 빼앗아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의 2차례 이루어진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에게 전범이라는 죄의식보다 세계 유일의 원폭 피해국이라는 피해의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관대한 처분으로 그 근거를 확보하면서 일본은 동일한 피해국으로서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변국과의 갈등을 키워왔다. 미국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의 연구자들도 거듭 얘기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거의 모든 단체들이 공유하고 있는 피해의식이다. 전쟁책임 문제를 반성적으로 바라보는 진보주의자들도차도 이런 피해의식의 징후를 보였다. 예컨대 이에나가 사부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제국 일본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손상시키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일본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데 대한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연합국 쪽, 특히 미국과 소련도 일본에 고통을 안겨주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83/459

국제무대에서 발설한 아베의 메세지는 보편적 가치, 민주주의, 기본 인권과 법치였으나 2019년 그의 각료들 19명 가운데 15명 그리고 거의 모든 자민당 당료들은 일본회의라는 조직의 수중에 있던 자들이었다. 신보수주의, 신국가/민족주의 그리고 역사 수정주의의 우익적이고 반동적인 혼합체인 일본회의는 그 극단주의 또는 극우 국가/민족주의 때문에 지금의 다른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용인될 수 없을 것이다.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32/459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를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위한 강화조약이, 오히려 냉전(冷戰)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의 분단문제가 갖는 세계사적인 의미와 함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결코 단순방정식이 아님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중국의 대만 문제, 일본의 오키나와 문제, 러시아 북방 영토 문제와도 맞닿아 있는 고차방정식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분단에서 평화 정착 나아가 통일까지 나아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자연히 깨닫게 된다. 예상보다 깊은 분단 체제의 의미를 샌프란시스코 체제 안에서 확인하면서, 이제는 분단문제를 단순히 친일세력 극복이라는 관점보다 한 단계 높은 세계사적 수준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식민지 침략범죄 및 아시아/태평양 전쟁범죄를 징치하기 위하여 시작되었으나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의 발발을 맞아 냉전전략의 일환으로 변질되었고,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전선의 지역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조약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변질 과정에서 식민지범죄, 전쟁범죄의 청산은 물 건너갔고, 과거 청산없는 동아시아, 과거청산 없는 한일 관계의 전후사가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대한 과도한 징벌로 오히려 히틀러 등장의 온상이 된 것과는 반대로, 전범국가 일본에 대한 너무나 관대한 처분은 일본을 전쟁 피해자로 착각하게 만들고 파시즘을 부활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_ 김영호 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 p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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