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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1760-1830
T. S. 애슈턴 지음, 김택현 옮김 / 삼천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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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경제학자인 T.S.애슈턴(1889 ~ 1986)의 입장은 다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비교적 부피가 얇은 이 책에서 1차 산업혁명 시기에 이루어진 기술혁신과 경제적 변화들을 실증적으로 검토한 애슈턴은, 1차 산업혁명은 비관론자들의 주장처럼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고 가는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영국 사회와 영국인을 기아와 질병의 공포에서 구해내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산업혁명이 '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지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애슈턴이 1차 산업혁명 연구에 공헌한 바는, 이전의 연구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않았던 영국의 비국교도 집단과 스코틀랜드인들의 역할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적극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이다._T. S. 애슈턴, <산업혁명>, p7, 옮긴이 서문 中

역사에서 '산업혁명기'이라 부르는 시기에 대해 T.S 애슈턴은 <산업혁명 1760 ~ 1830>에서 산업혁명이 가져온 긍정적 효과(경제성장 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낙관론의 입장을, 그 발전의 단속적인 측면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는 비관론을 취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 같은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그는 중도적 입장에 선 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책 안 곳곳에 자리잡은 동양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실증에 기초한 분석은 취하되, 동양을 주변부로 인식하는 저자의 관점은 분명 감안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도와 중국의 평원에는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남녀들이 낮에는 함께 일하고 밤에는 따로 잠자는 가축들보다 외견상 거의 나을 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같은 아시아의 생활수준과 기계화되지 않은 그런 공포는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고 인구수만 늘리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인 것이다.._T. S. 애슈턴, <산업혁명>, p214

애슈턴은 중국인과 인도인들에 대해 나태하다고 독설을 퍼붓지만,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된 면화의 소비자,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자로 역할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산업혁명이라 부를 사건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드러나기나 했을런지... 경제사 고전인 <산업혁명 1760 ~ 1830>은 우리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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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7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1-01-07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제 읽은 강준만 선생의 책에 나오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주장이 아닐까 싶습
니다.

산업혁명의 후과로 혜택을 본 사람들도
있지만, 진짜 산업혁명의 역군이었던 노동자
들이 역설적으로 노동에서 소외되고, 산업
혁명의 과실을 자본가들이 독식해 버린
상황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년 말에 잠깐 맛을 본 에릭 홉스봄의 혁명
의 시대에서 느꼈던 것처럼, 저자의 관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역사에 대한 해석도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1-07 14:42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산업혁명‘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긍정적 영향을 강조하기에 사회에 가져온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 정도로 인식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 하는 이론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겠지요... 생각해보면, 다윈의 진화론이 가지는 의의는 생물학에서보다 사회학에서 더 크게 느껴집니다. 다윈 자신이 이를 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제 생각에 애슈턴은 산업혁명을 기술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인식하는 편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에 자세히 소개되었는데, 기회가 되면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방가르드의 의도적인 전통 도덕 무시나 새로운 산업자본가들의 부의 과시뿐 아니라 인상주의나 상징주의 같은 모든 새로운 것이 문제였으니, 자신들의 오래된 세계와 가치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불안한 영혼들은 그 모든 것에 대해 퇴폐적이라고 아우성쳤다. 급속히  사라져가는 세계, 향수 어린 회고 속에서 안전했다고 기억되는 세계 대신,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빈곤의 늑대가 문 앞에서 울부짖는 세계가도래한 것이었다. 이처럼 불안한 시대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으니, 세기말 프랑스에서는 급증하는 유대인 인구가 필요한 표적을 제공했다.  - P409

프랑스대혁명을 경축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달가운일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 계획의 초점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가능한 한 호소력 있는 박람회가 되게 하자는 데 모아졌다. 거기에 뭔가 진짜 볼만한 것을 내놓자는 자연스러운 바람이 더해져, 일찍이 지어진 어떤 것보다도 높은 (300미터짜리) 거대한 탑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었다. - P243

국채의 대대적인 성공 덕분에 일종의 황홀경이 프랑스를 휩쓸었다. 애국주의와 상당한 수익률이 합쳐져 독일로서는 거의 예상치 못했던 전국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국가 재건이 국고를 말려버리고 군사력을 한층 더 약화시켜 독일군이 몇 년 더 프랑스 땅에 주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이 첫 번째 장애물을 깃발 날리며 뛰어넘었다. 물론 프랑스가 그 독일군 정복자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려면 아직도 30억 프랑을 더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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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그리고 스페인 본토에서는 18일에 스페인 군대의 주요 병력이 공화정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3년간의 내전으로 발전될 전형적인 군사 쿠데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반란군 주위에 전통적인 스페인을 수호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카를리스트, 군주제 지지자, 대농장 소유주, 대 자본가, 다양한 부류의 가톨릭 신도들, 팔랑헤 당원 그리고 파시스트들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형국이었다.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농민들과 급진적이고 리버럴한 부르주아, 소지주, 카탈루냐와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두 파벌의 어느 하나도, 진정으로 동질적이지는 않은 집단이었다. _ 카를로스 블랑코 아기나가 외 2인, <스페인 문학의 사회사 4>, p169


 제1차 세계대전(1914 ~ 1918)과 경제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 ~ 1939) 이후 일어난 스페인 내전(The Spanish Civil War, 1936 ~ 1939)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었다. 스페인 내부의 종교와 경제문제, 여기에 국제 세력의 개입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이후 일어날 제2차 세계대전(1939 ~ 1945)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을 전쟁을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 1946 ~ )는 <스페인 내전 The Battle for Spain>를 통해 상세하게 전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드리드의 지배라는 엄격한 전통이 있었던 스페인에서는 농촌과 대도시 모두에서 갈수록 혼란이 심해지고 있었다... 내전은 그때까지 스페인 역사를 지배해 온 여러 세력 사이에 일어난 갈등 가운데 가장 큰 충돌이었다. 전쟁 때문에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른 적대감이 분출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 갈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하나는 권위주의적 지배와 자유주의적 본능 간의 갈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앙집권적 정부와 지역주의적 열망 간의 갈등이었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26


 16세기 대항해 시대 직후 거대한 제국(帝國)을 형성하며 대제국을 만들었지만, 사실 1492년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기 전까지 국토의 많은 지역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었기에 스페인은 피레네 산맥 이북의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상업제국으로 번영했지만 국내 산업 기반은 약했고, 가톨릭 세력이 강한 종교국가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의 이러한 특징은 스페인을 오랜 기간 중세 속에 묶어놓았고, 스페인은 오랜 침체 끝에 20세기 초 겨우 재도약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스페인에 닥친 큰 타격은 1918년 유행한 스페인 독감(Spanish flu)과 뒤이은 경제대공황이었다. 


 스페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지켰다. 이 기간 동안에 농산물과 원료 수출, 산업 생산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고 경제 기적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번영과 더불어 출생율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그 효과는 20년 후인 1930년대 중반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경제 기적은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당시 정부는 보호주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기대치는 높아졌고, 이어진 실업의 증가는 실망과 분노를 촉발했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39


 경제대공황과 이 시기 집권한 공화정부의 적절한 대안 제시 실패는 1936년 국민 진영의 쿠데타를 불러왔다. 스페인 경제 문제와 공화 정부의 개혁 정책 실패가 보수 세력들의 반발을 오면서 내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지만, 국제 상황은 이를 스페인 국내 문제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계 경제 공황으로 각국의 유효수요가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은 다른 나라들에게는 경제 회생의 좋은 기회가 되면서 전쟁의 양상은 서서히 바뀌었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불간섭 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공화 정부와 국민 진영 모두에게 무기를 판매하면서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직접/간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전쟁은 이제 단순한 내전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전략적 중요성과, 내전이 일어난 시점과 추축국들이 은밀하게 개발해 온 무기를 유럽에서 시험해보려고 한 시기가 맞아떨어지면서 내전에서 아마추어적 성격을 탈색시켰다. 국민 진영에는 외국인 고문, 참관인, 기술 전문가, 전투요원이 넘쳐났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259


 세계는 진보와 반동 간의, 혹은 문명과 붉은 야만 간의 '결정적인 한판 대결'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예의주시했다. 모든 지역의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세력은 유럽이 전체주의 빙하 시대로 전락하기 전에 국제 파시즘을 마드리드에서 격퇴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마드리드에서 벌이는 일전을 공산주의의 거센 파도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322


 이처럼 스페인 내전은 국내적으로 또는 국제적으로 서로 다른 이해당사자가 각자의 이익을 위해 대립한 또다른 의미에서의 30년 전쟁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신/구교의 갈등인 종교 전쟁이었지만, 이면에는 국가와 용병대의 이해관계가 얽힌 30년 전쟁처럼 스페인 내전 또한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치뤄진 국제전이었음을 우리는 <스페인 내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전쟁은 국제적인 여론 조성이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친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화 정부가 국제 사회의 여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을지 몰라도, 국민 진영은 영국과 미국의 소수 유력 인사들에게 힘을 집중함으로써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 진영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정서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최대한 이용했다. 영국과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공화 정부에 품은 의심은 소련이 공화 정부에 군사 지원을 함으로써 사실로 확인되곤 했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426


 공화 정부가 맞닥뜨린 어려운 문제는 사건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버전을 동시에 제공해야 했다는 것이다. 대외용 보고서는 프랑스, 영국, 미국 정부에게 공화 정부가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라는 점을 납득시키려고 한 반면에, 국내에서 발표하는 성명서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여전히 사회 혁명을 수호하고 있음을 설득하려고 했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437


 3년간의 내전 결과, 승리는 결국 세계 여론을 자신들에게 우호적으로 돌리는데 성공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사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은 국민 진영에게 주어지면서 스페인 내전은 막을 내린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된 스페인 내전. 이 전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페인 내전>은 이 전쟁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바아몬데(Francisco Franco Bahamonde, 1892 ~ 1975)라는 극우주의자에 저항한 공화주의자들의 전쟁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반(反) 파시즘(fascism)이라는 명분 아래 공산주의자 뿐 아니라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공화정부 밑에 집결했다는 사실과 파시즘 세력에 기득권 세력이 결탁했다는 사실은 전쟁을 바라보는 기준이 선악(善惡), 좌우(左右)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에서뿐만 아니라, 직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여태까지의 기준은 '공산주의 vs 민주주의'라는 단일한 기준이지만, 우리는 이 전쟁을 좌우 이념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끝나지 않은 파시즘(또는 일본제국주의)과의 전쟁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겠지만, 일반 대중들 또한 기존의 편견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관점에서 한국 전쟁을 내려다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스페인 내전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격변기를 살아간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8 ~ 1392)를 떠올리게 한다. 고려말 기득권이었던 불교기반의 권문세족에 반대하는 신진사대부였던 포은은 조선의 개국에는 반대하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포은의 삶 또한 다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포은의 삶을 단순히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고 규정짓기보다 여기에 더해 '성리학'을 받아들인 혁명가로서의 모습을 더했을 때 그에 대한 평가가 보다 입체적이고 정확해지지 않을까. 스페인 내전 당시 이질적인 세력의 규합을 통해 우리는 입체적인 평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머나먼 이국의 스페인. 그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통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역사의 매력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3월 31일 프랑코 군대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프랑코에게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우리의 온 마음을 하느님께 올리면서, 가톨릭 스페인의 승리를 위해 애쓰신 각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치아노는 일기에서 "마드리드는 함락되었고, 수도와 함께 적색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도 모두 함락되었다. 이는 파시즘의 새롭고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껏 거둔 가장 큰 승리일 것이다."라고 썼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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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25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은 오래
전에 사두고 읽지 못하고 있었는데...

겨울호랑이님의 포스팅을 읽고 나니
우선 스페인 내전부터 읽어야 하나 싶
어집니다.

포스팅은 정말 끝장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분단의 기원도
스페인 내전에까지 가닿을 수도 있겠
구나 싶어졌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10-25 09:31   좋아요 0 | URL
아마도 레삭매냐님께서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가지시면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등이 줄줄이 이어져 나올 듯 합니다.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은근히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정복왕 윌리엄 - 노르망디 공작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폴 쥠토르 지음, 김동섭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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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들에게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1028 ~ 1087)은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를 통해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 공작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정복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책도 이를 찾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지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왕조의 변동이 갖는 의미까지 관심을 갖기에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 중세 유럽은 너무도 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폴 쥠토르의 「정복왕 윌리엄」은 11세기 프랑스에 의한 잉글랜드 정복이 갖는 의미를 사회전반에 걸쳐 조망한 책으로 당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저자는 윌리엄 1세라는 인물에 집중하면서도 책은 중세 유럽의 문화, 사회, 자연 환경 등 전반을 설명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당한다. 그리고, 윌리엄 1세의 치세가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양을 서술하면서 평전의 한계를 넘어 독자들에게 시대를 이해시켜 준다. 무엇보다도 11세기 유럽의 많은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일반독자들에게 설명한 부분은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된다. 


 다만, 저자의 사관(史觀)에 대해서는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교수를 지낸 저자의 이력을 고려한다면, 책의 내용이 친(親)노르만, 친 프랑스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책은 전체적으로  노르만족의 정복이 현대 영국의 융성을 이끈 토대가 되었다는 결론으로 나가는데, 이러한 저자의 주장 안에서 파괴된 앵글로색슨 문화에 대한 배려를 찾기 어렵다. 노르만 왕조 이후 잉글랜드 - 후에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포함한 영국 - 이 로마 제국 이후 라틴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한 편으로 섬나라 영국의 독자성의 소멸을 의미한다. 고유 문명의 손실이 대륙 문화 편입으로 인한 긍정적 영향을 상쇄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본문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많이 다루어지지 않아 아쉽게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저자의 관점 속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떠올리게 된다. 과거 일제 식민을 경험한 우리의 입장에서 일본제국의 식민 경험이 21세기 한국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불편하듯, 노르만 정복 이전의 켈트족, 앵글로 -  색슨족의 입장에서는 저자의 이러한 관점을 선뜻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이들 민족은 대부분 융화되어 구별하기도 어렵겠지만.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고 책을 읽는다면 11세기 중세 유럽의 전반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라 여겨진다...


 정복이 영국에 가져온 변화는 정치 제도보다 사회 구조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노르만인들이 가져온 봉신제도와 봉건제도는 앵글로색슨 제도보다 더 발전되고 단순한 형태였다. 정복 전 영국에는 많은 자유민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일부 지주들에게만 매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형식적이었다. 그러던 것이1085년경에는 봉신제도와 봉토로 연결된 지주와 농민의 관계가 파기할수 없을 정도로 긴밀해졌다. 그 결과 대륙에서 여전히 남아 있던 자유지는 영국에서는 모두 사라졌다.(p524)


 기마 전투 전술의 발달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촉진시켰다. 기사들이 편리하게 사용하는 화살 모양의 창은 점차 주무기인 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칼은 살상력이 약했고, 다루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얇은 금속판을 이어 만든 갑옷은 금속 고리를 연결하여 짠 쇠사슬 고리 갑옷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갑옷은 공격 방법을 바꾸어놓았다. 실제로 이 갑옷을 입은사람 앞에선 대부분의 방사물(돌, 화살)이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므로 전투는 마주보고 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사전에 두 당사자가 장소를 합의해서 결정하는 것도 중요해졌다.(P552)


 대부분의 앵글로색슨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았다. 노르만인이 주재하는 재판은 통역사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재판 중에 얼마나 많은 오역이 있었을지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을 것이다. 즉 2개 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두 언어가 공존하는 상황이 보다 더 현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자들은 소수였지만 지배층이었고, 다수의 앵글로색슨인들은 비천한 계층이었다. 공식 문서에 사용되는 라틴어는 두 언어의 갈등을 봉합해 주었다. (P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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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20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해 하던 책이었는데 리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작가의 관점이 친프랑스
적이라는 점에 눈길이 가네요.

노르만 족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수구적인 중세 봉건제가 가속화
되고, 영어와 프랑스어의 혼용
이 문제가 되었다는 지적도 인
상적이네요.

기회가 된다면 읽어 보고 싶네요.

겨울호랑이 2020-10-20 15:46   좋아요 0 | URL
유럽의 중세, 그리고 당시에는 변방이었던 영국사의 한 부분을 대중적으로 깊이있게 들어간 책이라 생각됩니다. 북유럽 문명과 라틴 문명의 변방에 있던 잉글랜드를 중세질서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 윌리엄1세의 영국 정복이라는 과거와 오늘날 신자유주의 질서를 세계에 전파하는 영미 문화가 비교되어 나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

sickthing 2022-02-17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수의 지배계층의 관점에 다소 치우쳐 쓰여진 책이라는 말씀을 염두하고 읽는다면, 어느 정도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22-02-17 18:54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잘 요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sickthing님 좋은 독서 되세요! ^^:)
 
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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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가 이 도시의 통치와 방어를 정비한 성과는, 이 시기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한 그리스도교도 상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중근동과 오랫동안 교역해온 이 베네치아 상인은 프리드리히가 통치하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부분의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변한 것을 찾는다면, 첫째로 거리에 보이는 수비대 병사가 이슬람교도에서 그리스도교도로 바뀌었다는 것, 둘째로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이전보다 큰 소리로 종이 울려퍼지게 된 것이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405

<십자군 이야기 3 The story of the Crusades 3>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지막 권이며, 제3차 십자군(1188 ~ 1192)으로부터 제8차 십자군(1248 ~ 1254)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책이다. 시기적으로는 전체 200여년에 해당하는 십자군 역사에서 후반부 70년에 해당하기에 200년을 3분하여 분량을 할당한 작가의 구성은 큰 무리없어 보이지만, 성지 예루살렘을 잃어버린 후 이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집중되기에 기계적 중립에 가까운 분량 배분이 이루어졌다.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 1157 ~ 1199)와 살라딘(Saladin, 1138 ~ 1193)의 대결로 압축되는 제3차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에게 농락당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함락시킨 제4차 십자군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작가도 여기에 집중한다. 때문에 4차 이후 십자군 전쟁은 무게감이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시선이 가는 곳은 오히려 제6차 십자군전쟁이다.

제6차 십자군은 처음부터 외교협상이 이루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다른 전쟁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194 ~ 1250)와 알카밀(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1180 ~ 1238) 사이에 이루어진 협상은 평화롭게 끝났고 이를 통해 성도(聖都)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유대교도가 공유하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아코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알 카밀에게 교섭 재개를 요청하는 밀사를 보냈다. 중근동에서 오래 살아온 봉건제후 출신으로 아랍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두 밀사는 당시 알 카밀이 머무르고 있던 나블루스로 향했다. 프리드리히는 대환영을 받으며 아코에 도착하자마자 일찌감치 외교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p377)... 이집트에 세력 기반을 둔 알 카밀로서는 프리드리히가 이끌고 온 군사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p379)... 알 카밀이 시간 벌기로 시작한 교섭은 이렇게 조금씩 진지하게 이교도간의 공생관계 수립을 지향하는 교섭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프리드리히는 중근동 그리스도교 세력의 안전을 보장할 수단을 강화해가고 있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385

물론, 이러한 결과는 이들이 평화를 사랑했다라고 보기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더 크게 자리했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황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밀린 프리드리히 2세와 다마스쿠스에서 반기를 든 동생과의 갈등 관계에 있던 알 카밀. 이들은 모두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협상에 임했고, 결과적으로 평화협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이러한 결과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모두의 반발을 가져왔다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이같은 상황에서 협상의 결과에 반대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평화로 인해 손해보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테니.

프리드리히와 호노리우스의 서신 교환은 그후 한동안 두절된다. 그리고 1218년 말 둘의 교류가 다시 시작된다. 이번에는 교황이 먼저 프리드리히에게 서신을 보낸다. 제5차 십자군이 이집트 다미에타에서 고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번에는 넌지시 비추는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용건을 밝혔다. 요컨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으면 원정을 가라는 것이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345

1192년 봄, 재상 윌리엄 롱샹은 리처드에게 하루빨리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서신에는 리처드의 막내동생 존을 전면에 내세운 프랑스 왕의 군대가 노르망디 지방을 넘어 영국까지 침공하고 있으며, 유럽에 남아 있는 리처드파의 군대는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리처드의 귀국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고 씌여 있었다. 제1차 십자군 당초부터 유럽의 모든 황제와 왕, 제후들은 로마 교황이 제창한 ‘신 앞에서의 평화‘를 지키는 데 동의했다. 십자군 원정중에는 누구든 원정에 나선 이의 영토를 결코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그것을 처음으로 깨버렸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177

구체적으로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교황, 제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던 유럽의 여러 왕들. 이들이 종교(宗敎)를 앞세우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평화의 길을 반대하고 여론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앞으로 종교를 앞세우고 뒤로는실속을 채우려믄 이들은 평화협상을 실패라고 비난했고, 프리드리히를 파문에 처하기까지 한다. 역사는 이러한 기록을 남기지만, 실제로도 그랬을까.

리뷰의 서두에 언급된 베네치아 상인의 증언은 평화협상의 결과로 세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상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평화가 자신에게 유리했음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고, 이는 예루살렘과 일대에 거주하는 이들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그들이 결코 원치 않았던 전쟁을 피한 제6차 십자군을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십자군 전쟁의 목적이 성지 회복이라면, 피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소유(所有)하지는 못했지만 공유(共有)할 수 있었던 이 전쟁을 실패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제6차 십자군이 실패라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지 못한 이들의 관점에서 실패가 아니었을까. 세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살피고, 평화의 길을 세워 오늘날 중동평화를 가져울 수도 있었던 협상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가장 역사적 의미를 갖는 십자군 전쟁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특히,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시대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 소설인 <십자군 이야기 3>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앞서 말했듯 <십자군 이야기 3>에서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가장 공들이고 쓴 부분은 제3차 십자군과 제4차 십자군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과 긴장감을 고조하는 특유의 서술을 좋아하는 이들을 충분히 만족시키도록 ‘맛있게‘ 씌여졌다. 다만, 흥미진진한 다른 십자군 원정과는 달리, 별다른 화제거리가 없는 제6차 십자군에 대해서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예를 들어,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던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122 ~ 1190)가 수영하던 중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을 보자. 이에 대해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서술한다. 정확한 사인(死因)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공식기록이지만, <십자군 이야기 3>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프리드리히 1세가 ‘철없는 늙은이‘ 라는 부정적 인식을 가질 뿐이다. 그렇지만, ‘붉은 수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중세 유럽에서 10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할 능력있는 자를 평면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머리에는 ‘늙은이의 냉수(노인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위험한 짓이나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을 일컫는 일본어 관용구)‘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 ‘붉은 수염‘은 자기도 질 수 없다 생각하고 뛰어든 게 아닐까.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예순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가 병상에 드러누웠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런 만큼 체력에 자신이 있었을 테고, 그 탓에 나이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부하들과 함께 반나체로 뛰어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대로 가라앉아버렸고, 끌어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연구자들도 대부분 심장마비로 인한 익사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는 듯하다. 익사한 날은 1190년 6월 10일, 독일을 떠나온 지 1년 1개월이 지나 있었다. 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68

실제로, 공식 기록에 남겨진 황제에 대한 기록은 이와 다르다. <프리드리히 황제의 업적 Gesta Friderici I imperatoris>에는 당당하면서도 인격자인 황제의 모습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지만, 작가의 상상력 앞에 진실은 구석으로 치워진다. 이런 편향된 기술이 과연 한 인물에 한정되었을까.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역사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십자군 이야기> 이야기는 야사를 접했다는 정도로 읽길 권한다.

그의 인격은 그의 힘을 시기하는 자조차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균형잡힌 사람이다. 그는 매우 큰 사람보다는 작으나 보통 신장의 사람보다는 더 크고 고귀하다. 그는 금발이고 이마에서 웨이브가 있다. 그의 눈은 날카롭고, 그의 수염은 붉고, 그의 입술은 곱다... 그의 모습은 밝고 기운차다. 그의 이빨은 눈같이 희다... 분노대신 겸손으로 그는 얼굴을 붉힌다. 그의 어깨는 넓은편이고, 강한 체격이다.(출처 : 위키백과)

<십자군 이야기 3>를 읽으면서 느꼈던 두 가지 생각. 역사에 대한 재해석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며,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사실에 기반한 소설이 아닌 정식 기록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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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23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씨의 글들을 한 때는 사랑해서
열심으로 읽었으나, 이모 작가의 경우
처럼 본색이 드러나 손절하게 되었네요.

그렇게 칭송해 마지 않던 평론가들이
지금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네요.
수오지심은 있는지 과연.

겨울호랑이 2020-08-23 23:43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저 또한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좋아했으나, 이제는 더 손이 가질 않네요.. 그렇지 않아도,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과 관련한 이별 페이퍼를 작성 중에 있습니다. 레삭매냐님 눈 높이에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시간되신다면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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