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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ㅣ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프리드리히가 이 도시의 통치와 방어를 정비한 성과는, 이 시기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한 그리스도교도 상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중근동과 오랫동안 교역해온 이 베네치아 상인은 프리드리히가 통치하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부분의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변한 것을 찾는다면, 첫째로 거리에 보이는 수비대 병사가 이슬람교도에서 그리스도교도로 바뀌었다는 것, 둘째로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이전보다 큰 소리로 종이 울려퍼지게 된 것이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405
<십자군 이야기 3 The story of the Crusades 3>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지막 권이며, 제3차 십자군(1188 ~ 1192)으로부터 제8차 십자군(1248 ~ 1254)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책이다. 시기적으로는 전체 200여년에 해당하는 십자군 역사에서 후반부 70년에 해당하기에 200년을 3분하여 분량을 할당한 작가의 구성은 큰 무리없어 보이지만, 성지 예루살렘을 잃어버린 후 이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집중되기에 기계적 중립에 가까운 분량 배분이 이루어졌다.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 1157 ~ 1199)와 살라딘(Saladin, 1138 ~ 1193)의 대결로 압축되는 제3차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에게 농락당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함락시킨 제4차 십자군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작가도 여기에 집중한다. 때문에 4차 이후 십자군 전쟁은 무게감이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시선이 가는 곳은 오히려 제6차 십자군전쟁이다.
제6차 십자군은 처음부터 외교협상이 이루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다른 전쟁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194 ~ 1250)와 알카밀(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1180 ~ 1238) 사이에 이루어진 협상은 평화롭게 끝났고 이를 통해 성도(聖都)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 유대교도가 공유하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아코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알 카밀에게 교섭 재개를 요청하는 밀사를 보냈다. 중근동에서 오래 살아온 봉건제후 출신으로 아랍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두 밀사는 당시 알 카밀이 머무르고 있던 나블루스로 향했다. 프리드리히는 대환영을 받으며 아코에 도착하자마자 일찌감치 외교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p377)... 이집트에 세력 기반을 둔 알 카밀로서는 프리드리히가 이끌고 온 군사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p379)... 알 카밀이 시간 벌기로 시작한 교섭은 이렇게 조금씩 진지하게 이교도간의 공생관계 수립을 지향하는 교섭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프리드리히는 중근동 그리스도교 세력의 안전을 보장할 수단을 강화해가고 있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385
물론, 이러한 결과는 이들이 평화를 사랑했다라고 보기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더 크게 자리했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황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밀린 프리드리히 2세와 다마스쿠스에서 반기를 든 동생과의 갈등 관계에 있던 알 카밀. 이들은 모두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협상에 임했고, 결과적으로 평화협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이러한 결과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모두의 반발을 가져왔다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이같은 상황에서 협상의 결과에 반대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이 아니었을까. 평화로 인해 손해보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테니.
프리드리히와 호노리우스의 서신 교환은 그후 한동안 두절된다. 그리고 1218년 말 둘의 교류가 다시 시작된다. 이번에는 교황이 먼저 프리드리히에게 서신을 보낸다. 제5차 십자군이 이집트 다미에타에서 고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번에는 넌지시 비추는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용건을 밝혔다. 요컨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으면 원정을 가라는 것이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345
1192년 봄, 재상 윌리엄 롱샹은 리처드에게 하루빨리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서신에는 리처드의 막내동생 존을 전면에 내세운 프랑스 왕의 군대가 노르망디 지방을 넘어 영국까지 침공하고 있으며, 유럽에 남아 있는 리처드파의 군대는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리처드의 귀국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고 씌여 있었다. 제1차 십자군 당초부터 유럽의 모든 황제와 왕, 제후들은 로마 교황이 제창한 ‘신 앞에서의 평화‘를 지키는 데 동의했다. 십자군 원정중에는 누구든 원정에 나선 이의 영토를 결코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그것을 처음으로 깨버렸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177
구체적으로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교황, 제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던 유럽의 여러 왕들. 이들이 종교(宗敎)를 앞세우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평화의 길을 반대하고 여론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앞으로 종교를 앞세우고 뒤로는실속을 채우려믄 이들은 평화협상을 실패라고 비난했고, 프리드리히를 파문에 처하기까지 한다. 역사는 이러한 기록을 남기지만, 실제로도 그랬을까.
리뷰의 서두에 언급된 베네치아 상인의 증언은 평화협상의 결과로 세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상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평화가 자신에게 유리했음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고, 이는 예루살렘과 일대에 거주하는 이들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그들이 결코 원치 않았던 전쟁을 피한 제6차 십자군을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십자군 전쟁의 목적이 성지 회복이라면, 피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소유(所有)하지는 못했지만 공유(共有)할 수 있었던 이 전쟁을 실패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제6차 십자군이 실패라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지 못한 이들의 관점에서 실패가 아니었을까. 세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살피고, 평화의 길을 세워 오늘날 중동평화를 가져울 수도 있었던 협상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가장 역사적 의미를 갖는 십자군 전쟁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특히,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시대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 소설인 <십자군 이야기 3>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앞서 말했듯 <십자군 이야기 3>에서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가장 공들이고 쓴 부분은 제3차 십자군과 제4차 십자군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과 긴장감을 고조하는 특유의 서술을 좋아하는 이들을 충분히 만족시키도록 ‘맛있게‘ 씌여졌다. 다만, 흥미진진한 다른 십자군 원정과는 달리, 별다른 화제거리가 없는 제6차 십자군에 대해서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예를 들어,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던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122 ~ 1190)가 수영하던 중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을 보자. 이에 대해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서술한다. 정확한 사인(死因)을 알 수 없다는 것이 공식기록이지만, <십자군 이야기 3>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프리드리히 1세가 ‘철없는 늙은이‘ 라는 부정적 인식을 가질 뿐이다. 그렇지만, ‘붉은 수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중세 유럽에서 10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할 능력있는 자를 평면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머리에는 ‘늙은이의 냉수(노인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위험한 짓이나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을 일컫는 일본어 관용구)‘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 ‘붉은 수염‘은 자기도 질 수 없다 생각하고 뛰어든 게 아닐까.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예순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가 병상에 드러누웠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런 만큼 체력에 자신이 있었을 테고, 그 탓에 나이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부하들과 함께 반나체로 뛰어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대로 가라앉아버렸고, 끌어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연구자들도 대부분 심장마비로 인한 익사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는 듯하다. 익사한 날은 1190년 6월 10일, 독일을 떠나온 지 1년 1개월이 지나 있었다. 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3>, p68
실제로, 공식 기록에 남겨진 황제에 대한 기록은 이와 다르다. <프리드리히 황제의 업적 Gesta Friderici I imperatoris>에는 당당하면서도 인격자인 황제의 모습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지만, 작가의 상상력 앞에 진실은 구석으로 치워진다. 이런 편향된 기술이 과연 한 인물에 한정되었을까.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역사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십자군 이야기> 이야기는 야사를 접했다는 정도로 읽길 권한다.
그의 인격은 그의 힘을 시기하는 자조차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균형잡힌 사람이다. 그는 매우 큰 사람보다는 작으나 보통 신장의 사람보다는 더 크고 고귀하다. 그는 금발이고 이마에서 웨이브가 있다. 그의 눈은 날카롭고, 그의 수염은 붉고, 그의 입술은 곱다... 그의 모습은 밝고 기운차다. 그의 이빨은 눈같이 희다... 분노대신 겸손으로 그는 얼굴을 붉힌다. 그의 어깨는 넓은편이고, 강한 체격이다.(출처 : 위키백과)
<십자군 이야기 3>를 읽으면서 느꼈던 두 가지 생각. 역사에 대한 재해석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며,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사실에 기반한 소설이 아닌 정식 기록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