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이기는 요체는 장수로 그에 알맞은 사람을 얻는데 있으며, 장수를 부리는 방법은 칼자루를 잘 부리는데 있습니다. 장수가 그에 알 맞는 사람이 아니면 군사가 비록 많아도 충분히 믿을 만하지 못하며 조종하면서 그 칼자루를 잃으면 장수가 비록 재목이라 하여도 쓰지 못합니다."

"장수가 군사를 부리지 못하고, 나라가 장수를 부리지 못하면 재물을 소비하고 탐내고 노략질하는 폐해가 있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역시 스스로 불사르는 재앙이 그치지 않게 됩니다."

"눈앞의 근심을 풀지 못하면 혹 뜻밖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람이란 나라의 근본입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다치면 근본이 다치며 그 근본이 다치면 가지와 줄기가 넘어지고 시듭니다."

"제왕이란 위엄을 쌓아서 덕을 밝히며 편벽하게 없애버리면 위태로우며 무거운 자리에 머물면서 가벼운 것을 지휘하지만 거꾸로 잡게 되면 어그러집니다. 왕기(王畿)라는 것은 사방의 근본입니다.."

《주역》에 말하기를 ‘디딘 곳을 보고 복(福)을 살핀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길흉(吉凶)이란 득실(得失)의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마침내 천명이란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인데, 그 뜻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즉 성철(聖哲)의 뜻과 《육경(六經)》은 서로 통하는데 모두 재앙과 복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지 번성과 쇠퇴가 천명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사람이 한 일이 잘 다스려지는데 하늘이 명령하여 혼란을 내리도록 하는 일은 아직 없었으며, 사람이 한 일이 어지러운데 하늘이 평안을 내리도록 하는 일 역시 아직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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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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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이 강력하게 추구했던 교역 중심의 국가 체제는 자신들이 직접 물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얻어낸 물자를 확보한 교통로를 통해 유통시킴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정주 농경 사회처럼 단순히 1, 2차 산업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통에 초점을 맞춘 3차 산업에 기반을 둔 것으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방식이었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582

투르크 계 유목제국인 돌궐(突厥)은 고구려(高句麗)와의 관계 등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의 구체적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자치통감 資治通鑑> 등 주로 중국측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무래도 중국 측의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다보니 역사의 실체를 인식하기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정재훈의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는 중앙유라시아 제국 돌궐(괵튀르크)의 역사를 투르크인의 관점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돌궐제국의 의의를 이전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초원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서로는 비잔틴,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동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는 실크로드(silk road) 중 '초원길'을 활성화시켰다는 점과 유목민족 최초의 문자 사용에서 찾는다. 유목민족의 문자 사용으로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통합된 힘을 바탕으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동서양 농업/공업의 산지를 연결시키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업 제국. 이것이 중앙아시아 유목제국들의 진정한 모습이고, 그 토대를 만든 것이 돌궐제국이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돌궐이 중국에서 비잔티움을 바로 연결하는 동서 교류의 매개로서 그 사이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자 이제까지 한 번도 통합된 적 없이 개별 세력들이 분절되어 갈등을 벌이던 유라시아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에는 일시적으로 '투르크가 만들어낸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것은 비록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의 길을 걷지만,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킨 결과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초원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자유무역지대(FTA)'였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22

돌궐이 자신들이 만든 문자를 사용해 세 면에 걸쳐 자세하게 역사를 기록한 점은 시사를 하는 바가 컸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문자가 없어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유목민들이 문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위구르, 키르기스 등을 거치면서 유목민들의 문자가 몇 세기 동안 더 사용되었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즉 돌궐은 자신의 문자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냄으로써 문자 자료가 부족한 북아시아 유목사에서 신기원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529

돌궐제국의 세계사적인 의의가 위와 같다면, 고구려와 연결하여 국사적인 의의도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수나라 이전 분열시대를 겪던 중국은 북방제국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열세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역학관계는 분열하던 중국이 수(隨, 581~619)가 등장하면서 급변하게 된다. 돌궐에 보내던 조공을 거부하고 이를 축적한 재화를 바탕으로 통일왕조를 만든 수나라. 그리고, 수를 대신하여 등장한 당(唐)나라는 때마침 동돌궐의 멸망으로 북서쪽 지역에서 안정을 찾게 되는데,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의 명운과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양견이 돌궐에 보내던 세공을 거부함으로써 그동안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은 단순히 돌궐을 견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향후 통일에 필요한 자원을 축적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북중국 정권과 돌궐과의 관계는 그만큼 엄청난 부담이었고, 이것은 모두 돌궐이 운영하는 제국 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37

수 문제는 전국을 통일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돌궐이 비록 오랑캐지만 이들을 포섭해 장성 내에 머물게 하면서 외부 세력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양제는 이미 통일 체제가 안정된 상태에서 오랑캐인 돌궐은 외연으로 포괄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고 장성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70

수 양제가 돌궐에 배타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반면, 당 태종 이후 군주들은 동돌궐 잔여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대(對)고구려 원정에 적극 활용한다.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 시대 사이에 일어난 630년 동돌궐의 멸망 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이 668년 고구려 멸망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 부분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수나라가 황하와 양자강의 이른바 중원(中原)이라 불리는 지역의 역량으로 고구려를 침입했다 실패했다면, 당나라는 여기에 초원 유목제국의 힘까지 더했기에, 고구려로서는 다소 힘든 싸움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돌궐의 역사를 통해 짐작해 본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세계제국 당. 그렇지만, 현종 이후 당 말기에는 절도사들의 세력들이 커지면서 당이 쇠락의 길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안록산(安祿山, 703~757)과 사사명(史思明, ? ~ 761) 그리고 고구려 유민 출신의 이정기(李正己, 732? ~ 781?) 등이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로 당을 위협한 이들임을 생각해본다면, 이민족 포섭 정책이 반드시 당에게 유익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630년 고비 남부에 웅거하던 동돌궐의 몰락은 결국 수말 당초에 수조에 대항한 다양한 할거 세력들을 통제하고 다시 패권을 장악한 당조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구축하게 해 주었다.(p325)... 동돌궐의 붕괴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 상황은 태종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기존의 중원 왕조들처럼 장성 이내의 내지를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이를 기반으로 유목 세력들을 통제해 대외적으로도 안정적 질서를 확보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았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330

추장들은 당조의 관직을 제수 받고 이를 세습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인 위상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더욱 중요한 것은 기미부주에 편제된 추장이 이 무렵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조의 대외 확장에 중요한 행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점이다.(p392)... 번장은 태종이 처음에 투항한 이민족 추장들을 모두 숙위의 장군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을 지방 군사령관인 도독으로 임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이 무렵 당조의 대외 확장은 상당 부분이 번장이 이끄는 번부락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393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초원 유목제국 돌궐의 역사와 그 의의를 알려주고, 이를 통해 '유목민족=야만인=약탈자' 로 인식하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는데, 이 책과 함께 저자의 또다른 저작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을 읽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되리라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고 글을 마무리한다...

PS. 개인적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전쟁이 통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패권을 둘러싼 세계전쟁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관련 리뷰와 페이퍼를 통해 하나하나 정리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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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1-25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기억창고에서 잘 꺼내지도 않았던 돌궐,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재밌게 읽고 갑니다. ˝돌궐(괵튀르크)의 역사를 투르크인의 관점에서 보여˝주었다고 하셨는데, 그럼 투르크인들의 기록을 주로 살펴 쓰신 역사책인가요?^^ 제가 이해를 못하고 여쭈어봤다면 죄송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1-25 13:18   좋아요 2 | URL
네 ^^:) 본문에는 현재 남아있는 투르크 비문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외 돌궐 유적 등에 대한 설명도 함께 있는데, 리뷰에서는 이 내용을 말하지 못했네요. 그 외에도 기본적인 중국사서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어, 여러 관점에서 바라본 중앙아시아 역사라 생각됩니다. 제가 답글을 아래에 잘 못 달아서 다시 작성했습니다.ㅋ

거리의화가 2022-01-25 13: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돌궐의 역사를 정주의 관점이 아닌 초원과 유목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궐이 중국 뿐 아니라 당시 고구려와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만큼 더 넓게 확장시켜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위구르 유목제국사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읽어봐야겠네요.ㅎㅎ 삼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기대해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작년에 삼국전쟁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실크로드 패권을 둘러싼 세계전쟁이라니 거시적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1-25 13:23   좋아요 3 | URL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일방의 시선이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대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반드시 역사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닌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삼국전쟁이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의 접점에서 벌어진 경제전쟁이라 생각합니다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겨울호랑이 2022-01-25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 현재 남아있는 투르크 비문 등 여러 문서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2022-01-25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5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파엘 2022-01-25 16: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PS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대가 됩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2-01-26 08:13   좋아요 3 | URL
라파엘님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1-26 21:23   좋아요 2 | URL
저도 많이 기대됩니다.
넘 궁금합니다. ^^
 

이정기(李正己, 본명은 李懷玉, 平盧절도사)가 군사를 파견하여 서주(徐州, 강소성 서주시)의 용교(甬橋, 안휘성 숙주시)·와구(渦口, 안휘성 회원현)를 막았고,
양숭의는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막으니 운송로는 다 끊어졌고 인심은 떨고 두려워하였다. 강·회(江·淮)의 진봉선(進奉船) 천여 척이 와구(渦口)에 정박하였으나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근래에는 큰 것에 힘을 쓰고 싸움을 즐기면서 성공과 실패를 돌아보지 않아서 집안이 멸망하고 몸이 도륙된 사람은 안록산과 사사명, 이들입니다.

12월 정축일(29일)에 이희열은 스스로 천하도원수(天下都元帥)·태위·건흥왕(建興王)을 칭하였다. 이때에 주도 등은 관군과 서로 대치하기를 몇 개월을 계속하여 관군은 탁지(度支)가 식량을 제공하고 여러 도(道)가 군사를 늘려주었으나 주도와 왕무준은 고립된 군대로 깊이 들어가 오로지 전열에게 공급해주기를 바라보니 주객(主客)이 날로 더욱 곤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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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돌궐이 중국에서 비잔티움을 바로 연결하는 동서 교류의 매개로서 그 사이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자 이제까지 한 번도 통합된 적 없이 개별 세력들이 분절되어 갈등을 벌이던 유라시아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에는 일시적으로 ‘투르크가 만들어낸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것은 비록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의 길을 걷지만,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킨 결과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초원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자유무역지대(FTA)‘였다.
- P222

630년 동돌궐의 붕괴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 상황은 태종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기존의 중원 왕조들처럼 장성 이내의 내지를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이를 기반으로 유목 세력들을 통제해 대외적으로도 안정적 질서를 확보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았다. - P330

추장들은 당조의 관직을 제수 받고 이를 세습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인 위상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더욱 중요한 것은 기미부주에 편제된 추장이 이 무렵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조의 대외 확장에 중요한 행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점이다.(p392)... 번장은 태종이 처음에 투항한 이민족 추장들을 모두 숙위의 장군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을 지방 군사령관인 도독으로 임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이 무렵 당조의 대외 확장은 상당 부분이 번장이 이끄는 번부락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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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지고 이루도록 일을 내려주며 맡기면 누가 감히 힘써 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이 하면 어진 사람은 권하지 않아도 자연히 벼슬이 올라가고 불초한 사람은 억누르지 않아도 스스로 물러가게 되어 많은 인재들을 모두 자리를 얻게 되어 관에서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양염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상 앞에서 말하였다. "재화와 부세라고 하는 것은 나라의 큰 근본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며,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것과 편안해지는 것과 위태로워지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리하여 예전의 시대에는 모두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도, 오히려 혹 소모하는 것이 어지러워서 모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당 초기에 부세를 거두는 법은 조(租)·용(庸)·조(調)로써, 전(田)이 있으면 곧 조(租)가 있었고, 몸이 있으면 곧 용(庸)이 있었으며, 가호(家戶)가 있으면 곧 조(調)가 있었다. 현종 말기에 호적(戶籍)이 점차 무너져서 대부분이 그 실제대로 되어있지 아니하였다. 지덕(至德, 肅宗의 연호) 연간에 병사들이 일어나게 되자 있는 곳에서 부세(賦稅)를 거두어들이면서, 압박하고 재촉하며 처리하니, 다시는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백성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은 정남(丁男)이 많으면, 대개 관리가 되었거나 승려가 되어서 세금과 노역을 면하였는데, 가난한 사람은 정남이 많으면 엎드려 숨을 곳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상등(上等)의 호구는 넉넉하였고, 하등(下等)의 호구는 힘이 들었다.

애초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몇 해 동안 천하의 호구(戶口)는 열에 여덟아홉이 없어졌고, 주현은 대부분 번진(藩鎭)에게 점거되어 공물(貢物)과 부세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부고(府庫)는 다 써서 고갈되었고, 중국에 변고가 많아지자 융적(戎狄)이 매년 변경을 침범하니 있는 곳에는 많은 병사를 묵혀 놓고 현관(縣官, 조정)을 향하여 지급해 주기를 바랐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모두 유안(劉晏)에게 기대어 처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드는 비용이 실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오니, 헛되이 쓰는 비용이 너무 많습니다."
유안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큰일을 꾀하는 사람은 적은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무릇 일이란 반드시 멀리 생각해야 한다. 지금 처음으로 선박을 만드는 장소를 설치하였는데,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 마땅히 먼저 그들로 하여금 사사롭게 쓰는 것을 궁색함이 없도록 해야 관(官)에서 쓰는 물건이 굳고 튼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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