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지고 이루도록 일을 내려주며 맡기면 누가 감히 힘써 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이 하면 어진 사람은 권하지 않아도 자연히 벼슬이 올라가고 불초한 사람은 억누르지 않아도 스스로 물러가게 되어 많은 인재들을 모두 자리를 얻게 되어 관에서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양염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상 앞에서 말하였다. "재화와 부세라고 하는 것은 나라의 큰 근본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며,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것과 편안해지는 것과 위태로워지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리하여 예전의 시대에는 모두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도, 오히려 혹 소모하는 것이 어지러워서 모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당 초기에 부세를 거두는 법은 조(租)·용(庸)·조(調)로써, 전(田)이 있으면 곧 조(租)가 있었고, 몸이 있으면 곧 용(庸)이 있었으며, 가호(家戶)가 있으면 곧 조(調)가 있었다. 현종 말기에 호적(戶籍)이 점차 무너져서 대부분이 그 실제대로 되어있지 아니하였다. 지덕(至德, 肅宗의 연호) 연간에 병사들이 일어나게 되자 있는 곳에서 부세(賦稅)를 거두어들이면서, 압박하고 재촉하며 처리하니, 다시는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백성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은 정남(丁男)이 많으면, 대개 관리가 되었거나 승려가 되어서 세금과 노역을 면하였는데, 가난한 사람은 정남이 많으면 엎드려 숨을 곳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상등(上等)의 호구는 넉넉하였고, 하등(下等)의 호구는 힘이 들었다.

애초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몇 해 동안 천하의 호구(戶口)는 열에 여덟아홉이 없어졌고, 주현은 대부분 번진(藩鎭)에게 점거되어 공물(貢物)과 부세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부고(府庫)는 다 써서 고갈되었고, 중국에 변고가 많아지자 융적(戎狄)이 매년 변경을 침범하니 있는 곳에는 많은 병사를 묵혀 놓고 현관(縣官, 조정)을 향하여 지급해 주기를 바랐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모두 유안(劉晏)에게 기대어 처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드는 비용이 실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오니, 헛되이 쓰는 비용이 너무 많습니다."
유안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큰일을 꾀하는 사람은 적은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무릇 일이란 반드시 멀리 생각해야 한다. 지금 처음으로 선박을 만드는 장소를 설치하였는데,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 마땅히 먼저 그들로 하여금 사사롭게 쓰는 것을 궁색함이 없도록 해야 관(官)에서 쓰는 물건이 굳고 튼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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