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옴팜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삼십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_ 현기영, <순이 삼촌> <순이 삼촌>, p69/270


 현기영(玄基榮, 1941~ )의 단편소설집 <순이 삼촌>에는 10여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는데 이들은 모두 제주 4.3사건과 연결고리가 있으며, 이 사건이 모두에게 감히 언급되어서는 안 될 '금기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작품 속 화자들은 대체로 4.3사건을 전해 들은 간접경험자이거나 어린 시절 경험한 이들이다. 그렇지만, 직접 증언보다 흐릿한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4.3사건이 생존자에게 남긴 상처를 독자들은 더 실감하게 된다.


 당신이 그전서부터 파출소를 피해 다니는 이상한 기피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일단 씌어진 누명을 벗기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신은 1949년에 있었던 마을 소각 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어, 불에 놀란 사람 부지깽이만 봐도 놀란다는 격으로 군인이나 순경을 먼빛으로만 봐도 질겁하고 지레 피하던 신경 증세가 진작부터 있어온 터였다. 하여간 당신은 그 콩두말 사건으로 심한 정신적 충격을 입었던 모양으로 절간에서 두어달 정양까지 해야 했다. 그때부터 당신은 심한 결벽증에 사로잡혀 혹시 누가 뒤에서 흉보지 않나 하는 생각에 붙잡혀 늘 전전긍긍하게 되고, 나중엔 환청 증세까지 겹쳐 하지 않은 말을 들었노라고 따지고 들곤 했다. 그리고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올 무렵에는 상군해녀이던 당신이 갑자기 물이 무서워서 물질마저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_ 현기영, <순이 삼촌> <순이 삼촌>, p43/270


 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 대한 이 가당찮은 반감은, 실은 마땅히 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 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응당 가해자의 멱살을 붙잡고 떳떳이 분노를 터뜨려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빨갱이로 몰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피해자인 섬사람들은 삼만이 죽은 그 엄청난 비극을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치부해 버린다.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 자신이 박복해서,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당했거니 하고 체념해버린다... 어머니의 자격지심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_ 현기영, <순이 삼촌> <해룡 이야기>, p119/270


 그 악몽의 현장, 그 가위눌림의 세월, 그게 그의 고향이었다. 그러니 고향은 한마디로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의 전부였고, 행복이나 출세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중호는 고향의 모든 것을 미워했다. _ 현기영, <순이 삼촌> <해룡 이야기>, p116/270


 제주 4.3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으로 '빨갱이'가 된다는 사실은 겨우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이들에게 또다른 죽음의 공포였을 것이다. 이념과 사상을 채 알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초토화 작전과 무장대에 의해 학살을 당한 사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은 결국 '이데올로기'에 연유한다. <아내와 개오동>에서 묘사된 '개오동 나무'는 이데올로기의 은유로 표현된다. 온 집안을 가득 메운 오동나무와 이에 빌붙어 기생하는 벌레들. 온 나라를 이데올로기의 대립상황으로 밀어넣고 단물을 빨어먹는 집단의 은유 속에서 이를 쳐내버리고 싶어하는 화자의 마음은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들의 공통된 억눌린 마음이 아닐까.


 이념과 명분은 오직 그들만의 독점물이었다. _ 현기영,  <순이 삼촌> <아내와 개오동>, p139/270


 하여튼 나무는 집의 모든 것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거의 온 마당이 이 나무 그늘 밑에 들어갔다. 장독대를 뒤덮고 추녀 끝을 찌르고 역한 냄새 나는 가지 끝을 석규 방으로 빼짓이 들이밀기도 했다. 화단에도 그늘이 들어 분꽃도 백일홍도 맨드라미도 미처 끛을 피우지 못한 채 노랗게 이울어졌다 게다가 개털까지 날아들어 곰팡이처럼 화단을 허옇게 덮었다. 아내는 죽은 화단을 모조리 파헤쳐, 따낸 벌레 붙은 오동잎을 파묻었다.... 이제 와서 벌레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나무를 밑동에서 싺둑 베어 내버리는 것뿐이었다. _ 현기영, <순이 삼촌> <아내와 개오동>, p125/270


 2022년 제주 4.3 사건 74주년을 맞아 <순이 삼촌>을 다시 꺼내 읽었다. '삼촌' 이라는 어감에 '순이 삼촌'을 언뜻 남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순이 삼촌은 여자다. 제주지역에서는 삼촌을 성별과 관계없이 사용하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순이 삼촌'이라는 단어. 그리고, 작은 단어 하나에서 느껴지는 제주도민과 외지인 사이의 거리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선 이데올로기와 1948년 5.10 총선거를 전후한 분단 체제가 가져온 제주의 비극. 


 다음부터는 모일 때마다 각자 사례를 한가지씩 취재해 가지고 나오도록 하면 어떨까? 각자 가슴속에 묵혀둔 피해의식을 떳떳한 증오로 바꾸기 위해서, 그리나 증오가 보복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서.' _ 현기영, <순이 삼촌> <해룡 이야기>, p119/270


 작품들에서는 대체로 희생자와 이들이 겪은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때문에, 사건의 남긴 집단의 기억은 잘 전달되지만, 사건의 의미는 온전히 독자들에게 넘겨진다. <해룡 이야기>에서처럼 4.3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 각자가  끊임없이 사건을 돌아보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보복이 아닌 용서를 위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서청이 와 부모형제들 니북에 놔둔 채 월남해왔가서? 하도 뻘갱이 등쌀에 못 니겨서 삼팔선을 넘은 거이야. 우린 뻘갱이라문 무조건 이를 갈았디. 서청의 존재 이유는 앳세 반공이 아니가서. 우리레 무데기로 엘에스티(LST)타구 입도한 건 남로당 청지인 이 섬에 반공전선을 구축하재는 목적이었는디. _ 현기영, <순이 삼촌> <순이 삼촌>, p59/270

뒤늦게 초토작전을 반성하게 된 전투사령부는 선무공작을 펴서 한라산 밑 동굴에 숨은 도피자들을 상당수 귀순시켰는데 현모 형도 그중에 끼여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6.25가 터져 해병대 모병이 있자 이 귀순자들은 너도나도 입대를 자원했다. 그야말로 빨갱이 누명을 멋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대로 눌러 있다간 언제 개죽음당할지도 모르는 이 지긋지긋한 고향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묭맹을 떨쳤던 초창기 해병대는 이렇게 이 섬 출신 청년 삼만명을 주축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용맹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따지고 보면 결국 반대급부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_ 현기영, <순이 삼촌> <순이 삼촌>, p61/270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지 2022-04-04 1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주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4.3에서 자유롭지 않더래요. 할아버지 아니면, 외할아버지, 아니면 그 형제들. 그리고 연좌제. 90년대말 학번까지 빨갱이 손자로 피해를 봤다면 당사자말고 믿는 사람이 없을 거에요. 이제라도 널리 알려지니 참 기쁘고 다행일 따름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04-04 10:52   좋아요 2 | URL
그렇지요... 섬 전체 인구의 10%가 행방불명되거나 사망한 엄청난 일을 겪은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도 못한 채 침묵을 강요당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저도 대학교 가서야 제주출신 친구에게 4.3사건을 겨우 들었으니까요.... 모든 이들이 마음 깊이 새기고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주 관광 전에 4.3평화공원을 먼저 방문해서 아름다운 자연 뒤에 숨겨진 슬픈 역사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서니데이 2022-05-07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5-07 20:5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좋은 5월 보내세요! ^^:)

러블리땡 2022-05-08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겨울호랑이 2022-05-08 09:46   좋아요 0 | URL
러블리땡님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께서도 행복한 어버이날 가족과 함께 보내시길 바랍니다! ^^:)

얄라알라 2022-05-08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겨울 호랑이님!
5월 가정의 달 첫주 바쁘실 텐데, 축하인사 받으시느라 더욱 바빠지셨죠?
기쁜 일로 바쁘신거니 좋습니다!

항상 치우치지 않은, 차분한 어조로 중대한 사안을 다뤄주시는 그 방식을 몰래 배워가며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8 21:14   좋아요 0 | URL
얄라얄라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웃분님들께서 축하해주시는데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어버이날 잘 보내셨는지요? 활기찬 한 주 여시기 바랍니다! ^^:)

그레이스 2022-05-08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도 당선되셨군요
며칠 바빴던니 놓친게 많네요
축하드려요 ~

겨울호랑이 2022-05-08 21:15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이번 달에는 운이 좋네요. 즐거운 한 주 되세요! ^^:)

강나루 2022-05-08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5-08 21:15   좋아요 2 | URL
강나루님 감사합니다. 모처럼 내린 비로 촉촉해졌습니다. 다음 한 주 상쾌하게 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