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법칙 - 새로운 윤리학 원리를 찾아서 게오르그 짐멜 선집 4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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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입증하려고 노력한 것은 당위적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진행되는 삶이야말로 현실적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진행되는 바로 이 삶을 위한 법칙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원론을 삶의 총체성 그 자체 안으로 이전한다. 그는 삶의 총체성을 본래적 또는 이성적 자아와 이러한 자아에 비해 단지 주변적인 또는 자아에 대치되는 감성으로 분열시킨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29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은 <개인법칙>을 통해 윤리적 측면에서  보편법칙으로부터 개인법칙을 구해낸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으로 대표되는 사회법칙을 비판하는데 이는 보편법칙이 가진 한계성을 비판한다.


 보편적인 법칙은 생생한 내용을 그것이 체험되는 형식에서가 아니라 개념화된 내용성의 형식에서 파악하는데, 이 형식은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모든 삶의 과정에서 반복될 수 있으며 모든 삶의 과정에서 도덕법칙으로부터 추론된 동일한 판단을 얻는다. 이렇게 보면 모든 윤리적 성찰에서 기계론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음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60


 보편법칙이 보편적이기 위해서는 삶의 형식들간의 무수한 투쟁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개인들의 주관적인 경험은 무수한 대립 속에서 불연속적으로 단절되고 고립된다. 결과적으로 부분의 합과 전체는 달라지게 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보편적인 정언명령이 개인들의 삶의 원칙이 되지 못한다. 


 보편적인 법칙은 오직 개인적인 삶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개별적인 그리고 개별적인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행위들에만 지향된다. 어느 한 개념에 예속됨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의 개인화는, 행위하는 주체의 전체적인 삶의 무대 또는 맥박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도덕적 의미가 확증되는 행위의 개인화와 모순된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79


  짐멜은 여기에 더해 정언명령은 인간의 감성이 배제된 이성이 이끄는 삶을 강요할 뿐이라고 본다. '~ 해야 한다'는 당위의 가치판단 명제는 18세기 계몽시대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일깨웠지만, 개인의 감성을 인정하지 못한 한계를 갖는다. 19세기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개인 감성에 대한 인정, 미(美)적 판단기준과 철학적 판단기준이 만나는 지점에서 짐멜은 사회법칙과 분화된 개인법칙을 발견한다.

 

 인간은 통일적인 연속성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전체적인 삶의 안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며, 이러한 삶과 더불어 주어진 자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의 본질은 삶 일반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종종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행위들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본질은 삶 일반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종종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행위들로서 전개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행위는 총체적 인간에 의해 창출된다는 바로 그 원리로부터 개별적인 행위가 총체적 인간에 의해 도덕적으로 결정된다. 행위는 삶을 초월해 보편적인 것으로 되도록 하는 개념화가 아니라 총체적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당위성을 창조해야 한다. 이상적인 삶의 연속성은 그 전체가 각각 명명할 수 있는 행위의 내용들로 발전되어야만 비로소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115


 개인적으로 짐멜의 <개인법칙>에서 근대 이후 불연속적인 보편 기준 대신 개인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논지 안에서 아우라(Aura)의 회복을 열망하는 반(反)근대화의 흐름을 발견한다. 오늘날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강요된 보편가치 대신 소외된 소수의 목소리에 우리가 귀기울여야 한다면, <개인법칙>은 이에 대한 좋은 논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것은 주관적일 필요가 없고 객관적인 것은 초개인적일 필요가 없다. 결정적인 개념은 오히려 개인적인 것의 객관성이다. 일단 특별히 개인화된 삶이 존재하면, 이 삶의 이상적 당위도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이상적 당위에 대한 올바른 표상과 잘못된 표상은 그것의 주체와 더불어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개인법칙>, p125

끊임없는 삶에 대한 지식은 그 어떤 내용들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바, 이 둘은 온전히 진술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부단히 무엇인가를 알고, 희망하고, 믿고, 느끼며, 모든 관찰과 성찰은 내용들로 가득 채워진다. 그러나 우리가 내용들을 표상하고 바로 이 내용들로 삶을 구성하게 되면 삶의 연속성은 파괴된다... 우리가 표상된 내용들을 내용들로서 의식하게 되면, 다시 말해 그것들을 심리학적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이 소유와 더불어 무엇인가를 의미하게 되면 이 의미한 것은 즉시 불연속적이고 그 자신의 고유한 타당성을 지니는 구성물이 된다. - P63

단어들은 고립되면 판단구조 속에서 실종되며, 그 결과 판단구조는 단어들을 외적으로 상호결합하지도 못하고 이전에 뿌리가 뽑힌 채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단어들을 공통적인 그물망 안으로 끌어들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판단의 사유된 의미는 내적으로 완전히 통일적인 그 무엇이다. - P74

정언명령이 실천적인 것이 되고자 한다면 상대적인 보편성들의 가능한 합으로 분해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삶 전체와 간단없이 섞여 짜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바로 지금 관찰된 물결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런 식으로 파악된 행위는 결코 보편화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행위하는 개인의 전체적인 삶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생각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 P90

정언명령이 개별적인 행위의 준칙을 위해 요구하는 보편타당성은, 행위가 그 내용이 순수하게 객관적인 의미를 지녀야 비로소 ‘올바른‘ 것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징후 또는 인식 표징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명령은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절대성에 따라서 보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미만을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개인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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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전을 폐지하여 모두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어 강북에 있는 유민들 가운데 귀부한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또 동전은 강(江)을 건너는 것을 금지하라는 금령을 철폐하자고 하여, 조서를 내려서 그 요청을 좇으라 하니 백성들은 이를 아주 편하게 생각하였다.

요주가 그를 머물러 있게 하고자 하니 신중보가 말하였다."믿음이란 명령을 이루는 것이고, 명령은 머물러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애초에 태조는 별도로 봉장고를 두고 일찍이 비밀리에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석씨의 후진(後晉)은 유·계(幽薊)를 잘라내어 거란(契丹, 遼)에 뇌물로 주고 한 지방의 사람들은 홀로 경계 밖으로 제한시켰으니, 짐은 아주 이를 근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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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군주가 된 사람 가운데 허물이 없는 사람이 아주 적었으니 짐은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는데 잘못을 방지하고 욕망을 막아버리려 하는 것은 거의 덕으로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의로움일 것이다. 예컨대 당 태종은 다른 사람이 간(諫)하고 상소(上疏)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실수한 것을 직접 꾸짖는다하여도 일찍이 부끄러워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만약에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간언(言)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신하된 사람이 끝내 명성과 절개로 끝맺음을 하지 않는다면 불의에 빠질 것이니, 대개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것이 얇다면 얻는 복록 역시 적을 것이니 이는 경계할 만하다." - P35

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하게 간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장차 서쪽으로 옮기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산과 강의 험준함에 근거하여 용병(兵, 쓸데없는군사)을 제거하고자 함이니 주·한(漢)의 옛 일을 좋아서 천하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왕이 또 말하였다. "덕을 쌓는데 있는 것이지 험한 것에 있지 아니합니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이 나가자 황제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진왕의 말은 진실로 훌륭하지만 그러나 백년이 넘지 않아서 천하 백성들의 힘은 다할 것이다."

바라건대 지금부터 무릇 결재하고 제정하였던 일, 우대(優待)하고휼(恤)하였던 은혜 가운데 신충(宸, 천자의 마음)에서 들어난 것으로 간책簡策)에 쓸 만한 것과 아울러 재신(宰臣)과 참지정사에게 위임하여 매월 돌아가면서 초록)을 관장하게 한 것을 사관(史官)이 찬집하는데 대비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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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트만이 말한 대로 개인법칙ㅡ곧 상론하게 되는 바와 같이 이는 논의의 문맥에 따라 개체법칙으로 읽어야 할 때도 있다―은 짐멜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개인법칙이 짐멜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는 정언명령이 칸트철학에서, 그리고 힘에의 의지와 초인이 니체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 및 의미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짐멜이 보기에 개인법칙은 근대 이후 인간 정신과 개인적 삶과 행위를 규정짓는 원리이자 법칙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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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발터 벤야민 선집 3
발터 벤야민 지음, 윤미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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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함으로써 감정을 다스리려 애쎴다. 이러한 통찰의 결과로 이 책의 회상 작업에서는 경험의 깊이가 아니라 연속적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개인사적 면모들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만약 시골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자연감정에 따르는 어떤 형식에 담아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대도시 유년시절의 이미지들은 아마 미래의 역사적 경험을 미리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서문 中, p35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유년시절 회상기.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독일어 번역을 했던 저자였기에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안에서 프루스트의 시간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유년기에 대한 회상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는 기억 주체의 의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벤야민은 회상에서 주체의 의식적 노력을 배제함으로써 의식과 회상을 분리시킨다. 즉 자아는 더 이상 회상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마치 카메라 렌즈에 의해 촬영되는 이미지 전부가 의식적 지각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해제 中, p12


 그렇지만 동시에 프루스트의 시간과 벤야민의 시간은 같지 않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화자라는 개인의 경험이라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의 화자는 집단적, 역사적 화자다. 프루스트의 화자는 예술가다. 아우라(Aura)를 지닌 자신만이 갖는 독특한 정형성을 갖는 경험이 마들렌의 과자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눈 앞에 의식적으로 드러난다. 


 벤야민에 의한 기억의 감광판에 어떤 이미지가 찍히는가의 여부는 거기에 필요한 '조명'에 달려 있다. 순간적으로 조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관습의 지배를 받는 일상적 자아를 벗어나는 순간이자 보다 깊은 곳에 위치한 심층적 자아가 충격을 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 체험 내용을 시간 속에서 배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해제 中, p13


 반면, 벤야민의 유년시절은 기술복제 시대에 해석된 시간이다. 일회적이고 지속적인 개인의 경험 대신 일시적이고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된 시간.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의 서로 다른 기억과 중첩된 기억의 사실성은 이미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의 전통적 권위가 흔들리는 대신 그 안에서 발견하는 역사성이 발견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유리 창문에서 발견한 유물론적인 문구의 의미는 과거의 벤야민이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어린 시절의 작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 현재의 벤야민이 발견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의미가 앞으로의 그의 미학(美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고전시기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예술작품이라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는 기술복제 시대 시대정신이 표현된 정치물이라고 해석해야 할까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중에 나는 티어가르텐의 새로운 구석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 다른 곳들도 계속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 이처럼 새로운 장소들을 알려준 것은 어느 소녀도, 어떤 다른 체험도, 어떤 책도 아니다. 30년 뒤 지리에 밝은 한 베를린의 농부가 오랫동안 함께 베를린을 떠났다 돌아온 나를 데리고 나섰다(p38)... 나는 유리창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알아챘다. "노동은 시민의 명예이고, 축복은 수고의 대가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p39


 유년시절 회상에서 "은폐가 필연적"이라고 한 벤야민 자신의 말처럼, 일견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회상 뒤에 집단적 역사에 대한 성찰이 은폐되어 있다. 비록 베를린 유년시절에 대한 벤야민의 글에는 집단적 삶에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 사건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벤야민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이 마주치는 차원이다.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해제 中, p23



벤야민의 회상에서 순간들은 하나의 이미지 혹은 소리의 형태로 떠오른다. 이미지로 떠오르는 회상의 메커니즘은 종종 사진의 비유로 설명된다. 사진의 비유에서 보듯이 유년기 회상은 서사적 연속성을 구성하지 않는 불연속적 순간들의 단편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다. - P11

유년에 대한 추억은 단지 잠자고 있을 뿐 아니라 자라는 아이처럼 성장한다. 망각된 유년시절은 그 유년의 체험과 연관성을 지닌 삶의 순간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망각된 것은 지난 모든 삶의 무게로 무거워진다. 이처럼 벤야민의 기억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 망각이 기억과 대립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기억이라는 점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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