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게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의무를 지워서는 안 된다교사들은 그들에게 제기된 어려운 질문들에 대하여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제기된 난제에 대하여 기꺼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교사는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의무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는 어느 정도까지 그러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가? 교사는 구두 질문과 마찬가지로 글로 적힌 질문들에도 대답해야하는가? 교사가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가? 모든 이들이 동일하게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 나라라면, 법으로 규정될 수 없는 의무를 다른 이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여할 수도 없는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시민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 명성을 높이고 학생들의 신망과 존경을 얻고자 하는 교사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욕망에 맡겨두면 어떨까? - P233

제멋대로인 정권의 사람들은 기성 권력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낳는 방향으로 교육을 이끌고자 하며, 더 나아가 출판을 감시하고, 심지어는 담론들 자체를 감시하고자 하는데, 이는 주인들이 시민에게 심어주고자 하는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시민들이 배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 P51

그러므로 어떤 학생의 재능이라도 놓치지 않으며, 지금까지는 부유층의 아이들에게만 허락되었던 갖가지 지원을 제공해줄 수 있는 그런 형태의 공교육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심지어 무지의 시대에도그러한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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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세계와 세계 안에 거하는 인간의 자리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통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의 영위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노력에 길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경험주의적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감각이 현실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회의주의자들의 의혹을 부인하고 감각이야말로 세상이 사실상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정확한 표상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에피쿠로스주의자는 신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신에 대한 그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신이 인간사에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전략은 위험을 거부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고통의 제거가 쾌락 추구와 일치하는 만큼, 고통의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소크라테스주의가 보여 주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에 하나는 이른바 ‘윤리적 지성주의’의 정립이다. 이는 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필연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동반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 속에 함축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스토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량arete과 앎episteme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뛰어난 정신적 기량의 옷을 입고 있어서 평범한phaulos 인간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현자sophos만이 기량과 앎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자는 자신의 기량을 의무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개별적인 운명의 완성이, 따라서 그의 운명 역시, 필연적으로 선을 추구하며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어떤 계획의 실현에 기여한다는 것을 이해할 뿐이다. 여기서 현자의 자유란 신의 섭리에 의해 마련된 계획에 의식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를 통해 신의 섭리가 실현되도록 자신이 적극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우주의 종말을 결정짓는 것은 파멸과 동시에 또 다른 우주의 생성을 가져오는 분열이다. 우주의 만물은 주기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불에서 탄생하고 불 속에서 분해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가 유한한 동시에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런 차원에서 스토아 현자의 영혼은 신들의 영혼과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성한 영혼은 인간의 영혼처럼 이성적일 뿐 인간의 그것과는 달리 부패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신들은 종말의 분열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인간에게 미래를 보여 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감성을 기본적으로 네 종류로 구분한다. 고통은 현재의 실질적인 고통에 대한 견해이며 두려움은 미래에 다가올 고통에 대한 견해다. 쾌락은 현재의 실질적인 즐거움에 대한 견해이며 욕망은 미래에 다가올 즐거움에 대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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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9-30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비싸서 살만한 가치가 있나 고민했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01 08:29   좋아요 1 | URL
서양철학과 관련한 여러 안내서가 이미 시중에 충분히 나와있어 그레이스님의 말씀에 공감됩니다. 개인적으로 책의 장점은 철학자의 사상을 알기 쉽게 입문자 수준에서 잘 요약해서 설명해 준다는 점과 함께 현대철학까지 폭넓게 소개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책가격은 구입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이영훈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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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동일한 기술 사료를 두고서 역사가의 해석은 다양하게 갈리기 마련이다.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고 때로는 비생산적이게도 소양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숫자로 표시된 단면이나 시계열은 그러한 차이를 허용하지 않거나 최소화한다. 여기서도 해석이 갈라질 수는 있으나 실제의 사실과 동떨어지거나 심지어 거꾸로이기도 한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7


 이영훈(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목 그대로 계량경제방법론을 사용해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일부의 시기를 조망하는 책이다. 공동연구자들의 대표인 저자의 말처럼 정량적 데이터라는 객관적 자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최대한 해석을 자제하고자 했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갑작스런 주장의 비약이 일어나는 책이기도 하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요약이다.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한국에 있어서 근대적 경제성장은 20세기의 식민시기부터이다. 근대적 소유제도가 정비되고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발달에 의해 전국적으로 잘 통합된 상품시장이 성립하고, 나아가 노동시장 및 금융시장이 20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성숙하였다. 그러한 새로운 토대 위에서 한국의 시장경제와 산업사회가 발달해 왔지만, 그 발달의 구체적 양상, 그 한국적 유형의 특질과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19세기 말까지의 전통 경제체제가 전제로 또는 제약으로 작용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89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한국 경제사학적으로는 분명 의미가 있는 책이다. 정량적 데이터를 통해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론이 거의 없었던 당시 실증적인 접근법은 분명 학계에 충격이었고, 방법론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저작이다. 일례로 막연하게 조선의 삼림황폐화가 일제의 무단벌채에 의한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이미 19세기에 절정에 달하였음을 토지생산성의 계량적 분석을 통해 입증한 연구는 정량분석의 장점을 잘 활용한 분석이라 생각된다.


 19세기 농업생산성 하락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산림의 황폐화였다. 오늘날 식량위기하의 북한이나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생태학적 기아현상을 볼 때, 산림황폐화가 어떻게 농업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 관계가 선명하다. 북한과 달리 조선에서 산림의 약탈을 초래한 것은 17, 18세기에 걸쳐 증가한 인구압력이었다. 조선의 18세기는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는 조선 후기 최성기(最盛期)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번영의 다른 한편에서는 이후 대가를 치러야 할 산림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60


 이처럼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의 장점은 시계열 분석과 변수 간 상관관계분석에 있다. 그렇지만, 토지생산성과 산림황폐화와 같이 비교적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도 이러한 분석방법이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 스스로도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한계를 머리말에서 밝힌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여러 논문이 모두 수량경제사의 취지와 방법론에 적합한 것들은 아니다. 시계열 자료를 제시했다거나 두 수량변수 간의 상관계수를 따져 보았다는 정도로는 수량경제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량경제사의 방법론에 꼭 들어맞는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두 편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럼에도 마치 수량경제사에 충실한 듯이 이 책의 제목을 단 것은 원자료로부터 시계열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비교 분석함에 있어서 통계학과 경제학 이론에 우리 모두가 엄격하고자 했음이 조선후기에 관한 지난 40년 간의 경제사 연구에서 전례가 드물어서 나름으로는 커다른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6 


 저자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통해 18세기, 19세기를 통해 조성경제사를 생산 측면에서 정체하거나 퇴보했다는 점을 들어 조선이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전반적으로 주장한다. 그렇지만, 생산요인으로서 조선경제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산, 분배, 소비의 측면에서 보다 종합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림자 경제(shadow Economy) 영역은 더 크게 누락되어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조선의 19세기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면 당연하게도 이 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미가변동을 생산충격에 대해서만 회귀분석하는 모형은 1744~1881년 동안에는 높은 설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식민지기에 들어서는 설명력이 사라졌다. 식민지기에는 조선의 미곡시장이 일본의 미곡시장에 통합되어 있어 이출량이 주요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어서 국내의 수요충격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25


 또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자본주의 금융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에 대해 대부자금시장 균형이자율의 방법론을 통해 의미를 해석한다. 현대 중앙은행의 이자율 결정이 즉각적으로 투자와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의 연계가 느슨한 조선 후기를 분석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방식일까. 이러한 해석이 무리하다는 것은 저자 스스로 뒷부분에서 밝히지만, 이러한 무리한 해석은 최종목적지 식민지 근대화론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과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이 그래프상으로는 동일한 하락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은,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이 성립한다면(이러한 것을 가정할 수 있다면) 공급은 감소하고 수요는 증가하여 이자율이 상승할 시점에서 계원들의 악화된 경제 사정을 반영하여 이자율을 하향조정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은 농촌의 미가의 계절적 변동이 감소하고 대부시장에서의 공급이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1

 

 그러나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이자율을 단순히 대부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1920년대부터 이자율이 하락하기 이전에 농촌의 계 이자율은 장기간 매우 경직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거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암의 19세기 초 이자율의 하락은 정상적인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6


 

이러한 해석의 한계 이전에 분석의 한계도 존재한다. 인구 추이 변동분석과 관련하여 두 가구(家)의 족보를 분석하여 조선 후기 인구변동을 추정하는데, 질적 연구방법인 정성분석도 아니고, 정량분석에서 지나치게 적은 표본수는 표본의 대표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오히려 데이터를 등에 업고 더 강고해졌다. 

 

 물가변동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 화폐량, 생산성과 물가변동간의 정합성을 각각 검토한 결과 어떤 요인도 18, 19세기를 관통하여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 글에서는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을 통해 중장기 물가변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물가의 추이를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만으로 다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가변동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규정되어 있어 어느 한 요인만으로 성명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16


 예를 들어 보자.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린다. 상관분석 수행 시 '1년 중 아이스크림 판매량'과 '계절'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게 나타날 것이다. 즉,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로부터 '아이스트림 판매가 많아지면 기온이 올라간다'와 결론을 내린다면 올바른 분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한된 데이터, 분석방법의 한계가 보이는 계량경제사학의 시험적인 연구결과를 넘어서지 않는다. 아직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가 결여된 데이터 분석이 내린 식민지근대화론의 결론은 자체 내에 존재하는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18세기부터 사회적으로 실세로 등장한 경화사족과 시폐(時弊)와 공폐(貢弊)의 기록들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도시를 중심으로 독점화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 초기 모습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한양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bourgeois)계층과 신분제 사회의 붕괴, 후대의 동학농민혁명 등에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가능성도 함께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로부터의 데이터는 그에 대한 통계적 분석에 앞서 연구자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한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 통계적 분석이 요구하는 데이터의 조정은 자칫 허구의 역사상을 연구자에게 안길 위험성이 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우리가 확인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19세기 중반 이후 모든 지방에 걸쳐 시장이 분열하였다는 사실이다. 분열은 내륙부보다 해강부(海江部)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경상도보다 전라도에서 심각하였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경제가 정체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적신호는 켜져 있었다. 국제무역이 축소되고 있었으며, 서울 상인의 특권이 강화되면서 유통경로가 점차 독점적으로 경직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미가 자료들이 동시에 전하는 장기에 걸친 생산성의 악화가 근본적 요인이었다. 그로 인해 조선사회의 경제적통합을 지지한 미곡의 국가적 재분배체제가 1840년대부터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그렇다면 이 두 족보 분석을 바탕으로 인구 전체의 변동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추론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인구 전체의 규모는 추정할 수 없으나 18세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19세기에는 인구가 감소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이었던 예천 맛질의 함양박씨들조차 1830~90년간 인구감소를 경험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반 농민들의 인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더 오랜기간에 걸쳐 감소했을 가능성이 놓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P27

품목별 구성비는 당시의 시가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시가에 따라 화폐로 환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시가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8~19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대전가나 가격비를 이용하여 환산하였다. 쌀과 전미 1석은 동전 4냥, 콩 1석은 동전 2냥, 마포와 면포 1필은 동전 2냥, 은자 1냥은 동전 3냥으로 환산하였다. 이 중 전미와 콩과 마포는 그 비중이 매우 작기 때문에, 전미와 콩은 쌀에 포함시켰고, 마포는 면포에 포함시켰다. - P54

우리나라의 토지수익률은 19세기에 대략 20% 정도였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리스크의 크기도 고려해야겠지만, 농촌지역에서 관행되는 높은 지대율과 함께 그에 비해서 저평가된 토지가격에 의해서 높아진 토지수익률이 이자율의 수준을 높이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자율은 대부자금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는 아주 원론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인구변동, 토지생산성 등 기본적인 요인과 함께 대차계약에 수반되는 위험과 이자의 실질가치를 변화시키는 물가가 주요한 경정요인이 될 것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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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이념은자유민주주의다. 틈날 때마다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내뱉었다. 윤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는 4·19 혁명 정신이었고 5·18 민주화운동 정신이었다. 광복절에도 언급하는 독립운동 정신이었다.  - P10

진보 성향에 속하는 몇몇 정치학자들은 대통령이 표출하는 보수적 이념 자체보다 그 활용 방식을 더욱 경계한다. 진보와 보수, 성향이나 역사관과 무관한 ‘정치의 기본 원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세우는 이념은 자유로운 시장원리나 강한 안보와 같은, 보수의 전통적 가치를 역설하는 데에만 쓰이지 않는다. ‘적‘을 지목하고 그들의 책동을 경계하라는 수사에, 필요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동원된다.  - P12

당내 반발과 여론의 외면 속에 치르는 대통령의 성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2021년 11월5일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선출된 윤석열 후보의 수락사는 음미할 만하다. "문재인) 정권은 이 나라를 이념으로, 국민 편가르기로 분열시켰습니다. 진보의 대한민국, 보수의 대한민국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낡은 이념의 옷을 벗어 던지고 자유민주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국민과 함께하겠습니다." 당선 뒤 윤석열 대통령의언행을 돌아보면 후보 시절 그가 어떤 뜻으로 ‘낡은 이념‘과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P13

한국은 연합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당당한 서명국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뜻밖에도 은근하고 지속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힘으로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자조 섞인 반성은 요시다 시게루의 논리대로 우리 독립투쟁의 역사조차 성과 없는 것으로 변이되어버렸다. 이것은 일본이 식민지 강점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게 해주었다. - P18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범국 일본에관대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기반해 전후 재건에 성공했다. 그리고 사망한 아베 전 일본 총리는 일본 재무장을위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활을 꿈꾸었고, 그것은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트럼프전 미국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고, 바이든대통령도 바통을 받아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 - P20

교사들은 수업을 방해하거나 폭력적행동을 하는 학생을 교사가 어디까지 저지할 수 있는지, 즉 학생을 가르치기 위한 ‘직무상 권한‘이 명확하지 않다고 호소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사에 대한 일부학생이나 학부모의 인권 침해, 노동권 침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 P24

성범죄 사건을 다뤄본 판사 출신의 한변호사는 이균용 후보자의 판결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극단적인 상황의 강간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렸지만, 피를 흘려야지만 성범죄가 성립하는 건 아니다. ‘아동·청소년을 협박해서 강제로 음란물을촬영하게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를 들며감형을 해주는 등의 판결은 퇴행적이다. 대법원 판례와도 맞지 않는다. 사회 변화와 인권 의식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가 대법원장이 돼 이끌 ‘이균용 코트(법원)‘가 앞으로 더욱 변화할 한국 사회에서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 P30

세수는 부족하고, 국채도 발행하지않는데 올해 정부가 쓰는 돈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런 의구심 끝에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가 찾아낸 것이 ‘한국은행(은) 일시차입금‘이다. 한은 차입은 한도가 50조원이며 10~13일짜리 초단기 대출이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 한은에서 일시차입금을 빌렸다 갚기를 반복하며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처럼 빈번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P40

 비용을 떠나 병원 진료 예약이 민간 기업에의해 좌우되는 이 상황이 옳은지는 사회전체적 측면에서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서비스 초반에 무료로 서비스를 풀어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이후 유료로 전환하는 방식은 플랫폼 기업의 공식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구서를 받는이들은 언제나 플랫폼이 개입한 생태계안에서 가장 절박하고 취약한 사람들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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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건축이 없어져도 식민지 건축이 존재했던 사실은 엄연하게 남아 있고 연구에 끝은 없는 것이다. 야외에 전시된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를 보았을 때 그것을 한층 강하게 느꼈고 끝나지 않은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실감했다.

당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서구 여러 국가의 협조와 인정으로 이루어진바, 일본의 지배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홍콩, 상하이, 톈진 등 서구 국가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지역에 건립된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로 지배에 필요한 시설을 정비하는 것이 유효했다.

이 같은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물이 출현했다는 것은 대만총독부 청사나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에 유럽과 일본 사이에 생긴 동아시아 지배 구조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만주사변 이전에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유럽과의 협조와 인정을 통한 것이었고, 유럽의 지배틀에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지배 능력이 문제시되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서양 건축 규범의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동아시아 지배틀에서 벗어난 일본은 타국에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건축과 비견될 건축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

재료 면에서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 벽돌이 주재료가 되어 벽돌 구조 건축이 널리 사용된 상황은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조적 구조가 드물었지만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벽돌의 내화 성능, 저렴한 가격, 재래의 벽돌 제조 기술 등의 요인 덕분에 보편적인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다롄의원이나 창춘 야마토 호텔을 비롯한 만철이 지은 일련의 건물이 그 전형이고, 종주국 일본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건물을 보거나 정보를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건축에 관한 당시의 최첨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적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물건·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조선·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포틀랜드 시멘트처럼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 밖으로 수출되거나 세계의 건축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 배경에 일본에 의한 정치적·군사적 지배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으나, 이동을 가능하게 한 방법과 공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식민지 건축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적 건축의 하나로서 식민지 건축의 문화적 가치 또는 사회적·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특히 재개발에 돌입한 도시의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움직임이었다.

식민지 건축을 둘러싼 어제와 오늘의 움직임을 보면 지배의 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민지 건축을 말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식민지 건축이 지배를 상징하는 이상 그것의 말살은 일제의 지배 사실을 역사상에서 없애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 일부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에서 야외 설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이는 일제 지배의 사실을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식민지 건축을 마주하는 것은 지배국과 그 국민에게, 즉 일본과 일본인에게 지배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식민지 건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과거 피지배 국가와 국민에게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씨앗이다. 식민지 건축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 교육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역사 인식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의 다툼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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