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이영훈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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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동일한 기술 사료를 두고서 역사가의 해석은 다양하게 갈리기 마련이다.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고 때로는 비생산적이게도 소양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숫자로 표시된 단면이나 시계열은 그러한 차이를 허용하지 않거나 최소화한다. 여기서도 해석이 갈라질 수는 있으나 실제의 사실과 동떨어지거나 심지어 거꾸로이기도 한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7


 이영훈(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목 그대로 계량경제방법론을 사용해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일부의 시기를 조망하는 책이다. 공동연구자들의 대표인 저자의 말처럼 정량적 데이터라는 객관적 자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최대한 해석을 자제하고자 했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갑작스런 주장의 비약이 일어나는 책이기도 하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요약이다.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한국에 있어서 근대적 경제성장은 20세기의 식민시기부터이다. 근대적 소유제도가 정비되고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발달에 의해 전국적으로 잘 통합된 상품시장이 성립하고, 나아가 노동시장 및 금융시장이 20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성숙하였다. 그러한 새로운 토대 위에서 한국의 시장경제와 산업사회가 발달해 왔지만, 그 발달의 구체적 양상, 그 한국적 유형의 특질과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19세기 말까지의 전통 경제체제가 전제로 또는 제약으로 작용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89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한국 경제사학적으로는 분명 의미가 있는 책이다. 정량적 데이터를 통해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론이 거의 없었던 당시 실증적인 접근법은 분명 학계에 충격이었고, 방법론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저작이다. 일례로 막연하게 조선의 삼림황폐화가 일제의 무단벌채에 의한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이미 19세기에 절정에 달하였음을 토지생산성의 계량적 분석을 통해 입증한 연구는 정량분석의 장점을 잘 활용한 분석이라 생각된다.


 19세기 농업생산성 하락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산림의 황폐화였다. 오늘날 식량위기하의 북한이나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생태학적 기아현상을 볼 때, 산림황폐화가 어떻게 농업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 관계가 선명하다. 북한과 달리 조선에서 산림의 약탈을 초래한 것은 17, 18세기에 걸쳐 증가한 인구압력이었다. 조선의 18세기는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는 조선 후기 최성기(最盛期)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번영의 다른 한편에서는 이후 대가를 치러야 할 산림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60


 이처럼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의 장점은 시계열 분석과 변수 간 상관관계분석에 있다. 그렇지만, 토지생산성과 산림황폐화와 같이 비교적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도 이러한 분석방법이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 스스로도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한계를 머리말에서 밝힌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여러 논문이 모두 수량경제사의 취지와 방법론에 적합한 것들은 아니다. 시계열 자료를 제시했다거나 두 수량변수 간의 상관계수를 따져 보았다는 정도로는 수량경제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량경제사의 방법론에 꼭 들어맞는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두 편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럼에도 마치 수량경제사에 충실한 듯이 이 책의 제목을 단 것은 원자료로부터 시계열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비교 분석함에 있어서 통계학과 경제학 이론에 우리 모두가 엄격하고자 했음이 조선후기에 관한 지난 40년 간의 경제사 연구에서 전례가 드물어서 나름으로는 커다른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6 


 저자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통해 18세기, 19세기를 통해 조성경제사를 생산 측면에서 정체하거나 퇴보했다는 점을 들어 조선이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전반적으로 주장한다. 그렇지만, 생산요인으로서 조선경제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산, 분배, 소비의 측면에서 보다 종합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림자 경제(shadow Economy) 영역은 더 크게 누락되어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조선의 19세기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면 당연하게도 이 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미가변동을 생산충격에 대해서만 회귀분석하는 모형은 1744~1881년 동안에는 높은 설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식민지기에 들어서는 설명력이 사라졌다. 식민지기에는 조선의 미곡시장이 일본의 미곡시장에 통합되어 있어 이출량이 주요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어서 국내의 수요충격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25


 또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자본주의 금융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에 대해 대부자금시장 균형이자율의 방법론을 통해 의미를 해석한다. 현대 중앙은행의 이자율 결정이 즉각적으로 투자와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의 연계가 느슨한 조선 후기를 분석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방식일까. 이러한 해석이 무리하다는 것은 저자 스스로 뒷부분에서 밝히지만, 이러한 무리한 해석은 최종목적지 식민지 근대화론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과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이 그래프상으로는 동일한 하락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은,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이 성립한다면(이러한 것을 가정할 수 있다면) 공급은 감소하고 수요는 증가하여 이자율이 상승할 시점에서 계원들의 악화된 경제 사정을 반영하여 이자율을 하향조정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은 농촌의 미가의 계절적 변동이 감소하고 대부시장에서의 공급이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1

 

 그러나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이자율을 단순히 대부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1920년대부터 이자율이 하락하기 이전에 농촌의 계 이자율은 장기간 매우 경직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거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암의 19세기 초 이자율의 하락은 정상적인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6


 

이러한 해석의 한계 이전에 분석의 한계도 존재한다. 인구 추이 변동분석과 관련하여 두 가구(家)의 족보를 분석하여 조선 후기 인구변동을 추정하는데, 질적 연구방법인 정성분석도 아니고, 정량분석에서 지나치게 적은 표본수는 표본의 대표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오히려 데이터를 등에 업고 더 강고해졌다. 

 

 물가변동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 화폐량, 생산성과 물가변동간의 정합성을 각각 검토한 결과 어떤 요인도 18, 19세기를 관통하여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 글에서는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을 통해 중장기 물가변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물가의 추이를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만으로 다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가변동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규정되어 있어 어느 한 요인만으로 성명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16


 예를 들어 보자.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린다. 상관분석 수행 시 '1년 중 아이스크림 판매량'과 '계절'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게 나타날 것이다. 즉,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로부터 '아이스트림 판매가 많아지면 기온이 올라간다'와 결론을 내린다면 올바른 분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한된 데이터, 분석방법의 한계가 보이는 계량경제사학의 시험적인 연구결과를 넘어서지 않는다. 아직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가 결여된 데이터 분석이 내린 식민지근대화론의 결론은 자체 내에 존재하는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18세기부터 사회적으로 실세로 등장한 경화사족과 시폐(時弊)와 공폐(貢弊)의 기록들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도시를 중심으로 독점화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 초기 모습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한양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bourgeois)계층과 신분제 사회의 붕괴, 후대의 동학농민혁명 등에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가능성도 함께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로부터의 데이터는 그에 대한 통계적 분석에 앞서 연구자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한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 통계적 분석이 요구하는 데이터의 조정은 자칫 허구의 역사상을 연구자에게 안길 위험성이 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우리가 확인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19세기 중반 이후 모든 지방에 걸쳐 시장이 분열하였다는 사실이다. 분열은 내륙부보다 해강부(海江部)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경상도보다 전라도에서 심각하였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경제가 정체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적신호는 켜져 있었다. 국제무역이 축소되고 있었으며, 서울 상인의 특권이 강화되면서 유통경로가 점차 독점적으로 경직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미가 자료들이 동시에 전하는 장기에 걸친 생산성의 악화가 근본적 요인이었다. 그로 인해 조선사회의 경제적통합을 지지한 미곡의 국가적 재분배체제가 1840년대부터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그렇다면 이 두 족보 분석을 바탕으로 인구 전체의 변동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추론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인구 전체의 규모는 추정할 수 없으나 18세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19세기에는 인구가 감소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이었던 예천 맛질의 함양박씨들조차 1830~90년간 인구감소를 경험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반 농민들의 인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더 오랜기간에 걸쳐 감소했을 가능성이 놓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P27

품목별 구성비는 당시의 시가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시가에 따라 화폐로 환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시가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8~19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대전가나 가격비를 이용하여 환산하였다. 쌀과 전미 1석은 동전 4냥, 콩 1석은 동전 2냥, 마포와 면포 1필은 동전 2냥, 은자 1냥은 동전 3냥으로 환산하였다. 이 중 전미와 콩과 마포는 그 비중이 매우 작기 때문에, 전미와 콩은 쌀에 포함시켰고, 마포는 면포에 포함시켰다. - P54

우리나라의 토지수익률은 19세기에 대략 20% 정도였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리스크의 크기도 고려해야겠지만, 농촌지역에서 관행되는 높은 지대율과 함께 그에 비해서 저평가된 토지가격에 의해서 높아진 토지수익률이 이자율의 수준을 높이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자율은 대부자금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는 아주 원론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인구변동, 토지생산성 등 기본적인 요인과 함께 대차계약에 수반되는 위험과 이자의 실질가치를 변화시키는 물가가 주요한 경정요인이 될 것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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