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제 도구는 농경 마을이라는 정주생활 방식과도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우선 금속은 공동체의 생활을 더 편리하게 만들어주지만 찾아야 하는 자원과 익혀야 하는 기술이 더 많았다. 돌은 어디에서나 쉽게 주울 수 있지만, 금속 가공은 가공 기술자가 있는 큰 공동체와 금속을 얻을 수 있는 무역망이 발달해야만 가능한 특별한 기술이다.

1813년, 프랑스의 선구적인 지질학자 알렉상드르 브롱냐르는 알프스 산맥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암석을 묘사하기 위해서 ‘오피올라이트’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오피올라이트는 뱀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피스ophis’에서 유래했다.

더 놀라운 건 각각의 블랙스모커가 저마다 온전히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는 점이었다. 이는 과학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실이었다. 블랙스모커 주위에는 길이 1미터가 넘는 거대한 조개, 기다란 관벌레tubeworm, 특이한 형태의 흰색 게를 포함하여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러 생명체가 살고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 주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금속이었다. 주석을 구리에 섞으면(주석 5~20퍼센트, 나머지는 구리) 당시 알려진 다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하면서 구리나 주석에 비해 모양을 만들기가 훨씬 더 쉬운, 청동이라는 합금이 되기 때문이었다.

주석이 가장 많이 쓰인 부분은 통조림 용기로 사용하는 ‘주석 깡통’이나 ‘주석 포일’의 제조였다. 사실 주석으로 인해 현대전의 양상이 바뀌고 1700년대와 1800년대에 대제국의 형성이 가능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청동기시대로 안내하고,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고, 대규모 군대에 통조림을 식량으로 보급하게 해주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자제품에서 중요한 금속 중 하나로 오랜 역사를 이어온 한 금속이 최후의 단계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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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 혁명, 프랑스에 공교육의 기초를 묻다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번역 총서 7
니콜라 드 콩도르세 지음, 이주환 옮김, 김세희.조나영 감수 / 살림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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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계몽될수록 권력자들이 권력을 남용할 여지는 줄어들고, 사회적 권력에 규모와 힘을 부여할 필요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권력과 그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적이다. 진리가 확산될수록 권력자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희망을 점점 잃어버린다. 진리가 힘을 얻을수록 사회가 누군가에게 지배될 필요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_ 니콜라 드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233

니콜라 드 콩도르세 (Nicolas de Condorcet, 1743~1794)는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공화국의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말한다. 혁명 이후 신분제 사회라는 구체제로의 회귀를 콩도르세는 두려워하며 이를 막기 위해 공교육(公敎育)을 강조한다.

공교육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다. 만약 정신적 능력의 불균등이 원인이 되어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충분하게 활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영원한 정의의 제1원칙인 ‘인간은 모두 같은 권리를 지닌다‘는 선언은 공허해지고, 그러한 원칙에 따라 제정된 법률도 공허해질 것이다. _ 니콜라 드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13

콩도르세는 무엇보다도 소수에 의한 지식의 독점을 경계한다. 특정 계층에 의한 지식의 독점화는 이들에게 특권을 보장하며, 특권은 상대적 우위를, 상대적 우위가 쌓이면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결과적으로 신분제는 고착화될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콩도르세는 공교육을 통해 최소한 모든 시민이 공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을 갖출 것을 주장한다.

무지의 시대에는 강압적 전제정치가 불완전하고 모호한 지식의 전제정치와 결탁했다. 그러한 지식은 극소수 계급에 독점되어 있었다. 사제와 법률가들, 상거래의 비밀을 틀어쥔 자들, 그리고 몇 개 안 되는 학교를 통해 배출된 의사들은 완전 무장한 전사들에 못지않은 세계의 지배자였다. 또한 화약 병기가 개발되기 이전, 전사 戰士 계급의 세습 독재도 냉병기 冷兵器를 다루는 기술의 배타적 전승을 통해 생긴 상대적 우월함에 기초해 있었다. _ 니콜라 드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15

공교육의 첫 단계에서의 목표는 한 국가의 모든 거주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깨치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다른 이의 이성에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자신의 권리와 의무들을 행사하고,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 첫 번째 단계의 교육만으로도 모든 시민이 공무를 임하는 데에 지장이 없을 능력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_ 니콜라 드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67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에서 콩도르세는 여러 형태의 공교육에 대해 제시한다. 공공(公共)을 위한 교육이니만큼 콩도르세는 공교육에서 최대한 자의성을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없는 판단과 신념 등은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커리큘럼으로 구성하되, 교육 대상에 따라 다양한 내용 구성을 통해 공교육의 내실을 기할 것을 주장한다. 본문에 소개된 세부 내용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공교육에 대한 콩도르세의 주장은 어려운 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여러 울림을 준다.

글의 마지막은 교권(敎權)과 관련한 본문 내용을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콩도르세는 공교육이라는 공적 서비스를 강조하지만, 결코 교사들에게 무한한 희생과 책임을 강요하지 않는다. 적절한 의무와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책임을 부여하고,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무한 책임을 강조하는 시스템에 대해 분명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교사에게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의무를 지워서는 안 된다. 교사들은 그들에게 제기된 어려운 질문들에 대하여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제기된 난제에 대하여 기꺼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교사는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의무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는 어느 정도까지 그러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가? 교사는 구두 질문과 마찬가지로 글로 적힌 질문들에도 대답해야 하는가? 교사가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가? 모든 이들이 동일하게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 나라라면, 법으로 규정될 수 없는 의무를 다른 이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여할 수도 없는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시민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 명성을 높이고 학생들의 신망과 존경을 얻고자 하는 교사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욕망에 맡겨두면 어떨까? _ 니콜라 드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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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는 행위자의 의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완결된 행위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던 고전적 정의正義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사람들이 최선으로 간주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결핍 상태,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뒤이어 아크라시아akrasia라고 부른 ‘자기 제어 능력의 결핍 상태’라는 개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했다.

아크라시아는 이성에 대한 정념의 승리를 뜻하지 않으며 의지의 박약함에서 비롯되는 결과로서의 악행에 그대로 반영되는 개념이다. 성서의 원죄 개념은 의지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신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 도덕적인 악은 선에 대한 의도적인 위반으로 드러난다.

정확히 말해 죄란 무언가를 무엇 대신에 원하거나 사랑하는 데 있다. 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신에게, 혹은 자연적 질서에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죄는 스스로에게 피해를 입히고 스스로의 본성을 손상시키는 행위다.

헬레니즘 시대의 천문학자들이 제시했던 다양한 이론들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한편에는 우주의 지구중심설을 승리로 이끈 주전원 이론의 모형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16세기에 들어와서야 명예를 회복하게 되는 태양중심설 모형이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그의 ‘방법’을 역학에서 차용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방법론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은 연구 결과를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탐색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방법론은 실제로 새로운 공리의 탐색과 실진법을 통한 증명을 용이하게 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세계와 세계 안에 거하는 인간의 자리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통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의 영위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노력에 길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기본적으로 경험주의적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감각이 현실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회의주의자들의 의혹을 부인하고 감각이야말로 세상이 사실상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정확한 표상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주의자는 신을 그가 갈망하는 삶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었고, 모든 걱정, 근심을 떨쳐 버리는 단계 ‘아타락시아’* 에 도달하면서 자기 자신을 얼마든지 신성한 존재로 추앙할 수 있었다. 이 신성한 삶이라는 에피쿠로스주의적인 이상은 인간이 원자로 이루어진 다른 모든 존재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언젠가는 존재하기를 그만두게 되리라는 또렷한 인식을 바탕으로 구축된다.

스토아학파의 소크라테스주의가 보여 주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에 하나는 이른바 ‘윤리적 지성주의’의 정립이다. 이는 선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필연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동반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 속에 함축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스토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량arete과 앎episteme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뛰어난 정신적 기량의 옷을 입고 있어서 평범한phaulos 인간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현자sophos만이 기량과 앎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감성을 기본적으로 네 종류로 구분한다. 고통은 현재의 실질적인 고통에 대한 견해이며 두려움은 미래에 다가올 고통에 대한 견해다. 쾌락은 현재의 실질적인 즐거움에 대한 견해이며 욕망은 미래에 다가올 즐거움에 대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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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철학 케니의 서양철학사 3
앤서니 케니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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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철학 전반에서 인간 정신에 관한 철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 칸트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7, 18세기를 거치면서 심리철학은 인식론 아래 놓인 부속물이 되었는데 이는 데카르트적인 확실성의 추구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추구 과정에서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론자들은 감각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반면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지성의 역할을 배제했다. 이렇게 흩어진 이전 철학자들의 정열을 다시 한데 모아 인간 정신의 다양한 능력들을 공평하게 다룬 설명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칸트라는 탁월한 천재였다. _ 앤서니 케니, <근대철학>, p370


  앤서니 케니(Anthony Kenny, 1931 ~ )는 <근대철학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ume 3: The Rise Of Modern Philosophy>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서 시작되어 헤겔(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 의해 종합되는 근대 시기 철학을 다룬다.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의 영향력은 여러 분야에서 소멸되어 갔다. 대신 데카르트가 던진 이원론(dualism)의 문제는 중세철학에서 제1과제였던 '신의 존재 증명'을 대신한 주된 논점이 되었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 지성과 감각이 이성의 이름 아래 종합되면서 새로운 계몽시대의 이념을 제시하게 된다.


 근대를 거치면서 인식론은 가장 주목받는, 철학의 핵심 분과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 되었다. 사실 근대의 대표적인 철학 학파에 붙은 명칭 -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 은 바로 인식론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근대철학과 고대 및 중세철학뿐만 아니라 근대철학과 헤겔 이후의 철학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헤겔주의 전통에서는 인식론이 형이상학과 통합되었다.  _ 앤서니 케니, <근대철학>, p254


 다른 면에서 근대철학은 분화(分化)의 시대이기도 하다. 근대 초기에는 신학(神學)과 철학의 결별이 있었다면, 이후 철학은 자연과학(自然科學)과도 나뉘게 된다. 독자들은 근대시기의 철학을 통해 신-인간-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각가의 학문이 분화되었고, 실체(substance)의 개별성-보편성의 특성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감성(感性)과 지성(知性) 그리고 이성(理性)에 대한 칸트의 종합이 이루어지며, 헤겔에 의해 이성이 고양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라는 시기 동안 물질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두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단계에 해당하는 17세기에는 이전의 자연철학과 물리학이 점차 분리되었는데 물리학의 역할은 실제 자연법칙을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었으며, 물리철학의 임무는 모든 물리학적 탐구가 전제하는 개념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_ 앤서니 케니, <근대철학>, p276


 근대 초기는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검토한 시기였다. 자연신학은 전통 종교의 여러 요소에 대하여 점점 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자연종교를 통하여 신앙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을 과소평가하려는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비판받았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신학적 교리들이 인식론, 심리학, 생물학, 윤리학, 정치학 등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과소평가하려고, 어쩌면 완전히 배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를 거치면서 유럽의 사상가들은 전통 종교와 계몽주의의 기획 모두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_ 앤서니 케니, <근대철학>, p493



로크는 지성이라는 일반적 능력보다는 어떤 특정 명제에 동의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이런 진리에 동의하는 일은 경험에 의존하는가? 데카르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이런 진리는 우리가 본유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 로크 또한 이들이 경험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단 형성된 우리의 동의를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을 구성하는 개념을 얻기 위해서 경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P209

아프리오리(a priori)한 종합 판단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는 철학의 주요 문제이다. 우리는 감성과 오성의 작용이 결합하여 인간의 지식이 형성하는 방식을 심사숙고함으로써만 이에 대한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대상을 제시하는 것은 감성이다. 대상에 대하여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오성이다. 감성은 경험의 내용을, 오성은 경험의 구조를 결정한다. 내용과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대조하기 위하여 칸트는 ‘질료‘와 ‘형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사용한다. - P245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관통하는 개념은 행복이었으며 이는 충분히 이성적인 모든 인간 행위의 궁극 목표였다. 반면 칸트는 행복을 이런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그 자리에 의무를, 즉 도덕적 가치를 지니기 위하여 모든 행위가 지녀야 하는 필수적 동기인 의무를 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한 사람이 자신의 선한 행위에서 느끼는 기쁨에서 덕이 드러난다고 여겼던 반면 칸트는 덕을 실천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에 따라서 덕을 측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 P403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칸트의 윤리학을 정립과 반정립의 관계로 보고 자신은 이를 종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인간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것을 윤리학의 기초로 보았지만 이 탁월성을 자유로운 자아의 실현, 즉 칸트가 도덕적 삶에서 강조했던 자율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헤겔은 칸트와는 달리 도덕 이론의 영역에서 의무가 아니라 법의 개념에 최고의 위치를 부여한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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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18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 오셨네요...대단하신 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3-09-18 18:57   좋아요 0 | URL
에고 감사합니다. 아직 부족하고 모르는 부분도 많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는다는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yamoo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식민지 건축 - 조선·대만·만주에 세워진 건축이 말해주는 것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최석영 옮김 / 마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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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는 사람의 뜻이 반영된다. 달리 말해, '목적이 없는 건축'은 없다. 건축물 어디인가에는 그 목적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건축에 관여한 사람들, 특히 건축주의 목적이나 설계자의 뜻을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이 지배했던 지역의 건축을 살펴보는 이 책은 건축에서 지배 의도를 읽어냄으로써 지배를 다시 묻고자 한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0/167

식민시대 건축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다시 살펴본다는 니시자와 야스히코 (西澤 泰彦)의 <식민지 건축 : 조선, 대만, 만주에 세워진 건축이 말해주는 것 日本の植民地建築―帝國に築かれたネットワ?ク>. 저자는 일본제국 시기 세워진 건축물들이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건축들과 다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3/167

식민지에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권력 중심 기관의 청사를 건설하는 것은 다른 열강과 같았지만, 제국주의 후발국가로서 일본은 자신의 전통양식을 주변부에 강조할 수 없었다. '검은 머리의 서양인'으로 자신들 역시 세계 무대에서 변방에 있음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제국주의의 현실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서구 열강과 대립하게 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바뀌게 되지만.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류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사회적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조선 각지에서 재료를 조달해서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 재료의 확보는 지배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1/167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 건축물은 현지의 재료들과 제국의 변경의 기술, 정보,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정작 식민지 본국과 일본 전통 문화는 소외된 채 제국의 변경은 직접적으로 세계 또는 변경들과 접촉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 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정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 물건, 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 조선, 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4/167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식민지 건축>에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 건축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특성을 도출한다. 독일과 함께 제국주의 후발주자로서, 불과 얼마 전까지 이웃국가들과 대등하거나 열등한 위치에서 외교관계를 맺었던 일본. 빠른 개항과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해 군사력 등 외적인 면에서는 앞서있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제국의 중심을 자처할 수 없었기에 서양의 문화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 건축은 식민 본국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엇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5/167

주변부 자체 역량과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식민시대 건축에서 본국의 기여는 철도, 항만 등 인프라 건축에 한정된다. 이러한 인프라의 구축이 사실 군사력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부수적 결과임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식민지 건축에서 일본 본국의 기여는 거의 없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건축에 한정된 것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 전반에서 보여지는 부분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식민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일본의 탈을 쓴 식민권력층과 친일세력에 의해 잔혹한 식민역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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