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인 니르바나님(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인 얼나(法我)를 참나로 깨달아 참나의 권능으로 제나(自我)의 수성(獸性)을 다스려 제나의 수성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이른 사람을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얻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얼인 참나를 깨달아 붓다(부처님)가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금강경을 포함한 모든 불경은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이루는 길을 밝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한 생명(Dharma)을 얻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사람들로 하여금 멸망의 생명(自我)에서 영원한 생명(靈我)으로 솟나게 하고자 한 것과 일치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금강경>, p63


 박영호의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는 <금강경 金剛經>과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다석 류영모(柳永模 1890 ~ 1981)의 관점에서 풀이한 책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나(自我)와 얼나(法我)가 있다. 저자는 짐승의 본성인 수성(獸性)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나를 벗어나 자신의 다르마(Dhrama)를 깨닫고 얼나(法我)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일관된 주제로 <금강경>과 <반야심경> 전체를 설명한다.


 석가는 우리를 위하여 니르바나님께로 건너갈 떼배를 만들었다고 하고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나라에 있을 곳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무임승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모습을 본받아 내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너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고 한 석가요 내가 떠나가는 것이 좋다고 한 예수가 아닌가. 그들처럼 우리도 니르바나님(하느님)을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금강경>, p99


 저자는 <금강경>에서 벼락같은 깨달음으로 제나가 죽고 얼나가 태어나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도 연결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는 본문의 여러 곳에서 불교사상을 설명하는데, 기독교, 유교, 도교의 사상을 가져오면서 보편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자는 자칫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이러한 해석에 앞서 언어(言語)에 매이지 않고 언어에 담긴 뜻을 볼 것을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석가붓다는 법(法)에 의하라는 것이다. 법이라면 먼저 의언진여(依言眞如)의 법(法)이 있고 이언진여(離言眞如)의 법이 있다. 의언진여는 사람의 말씀으로 바뀐 진리의 말씀이고 이언진여는 사람의 말씀 이전의 얼나이다. 석가붓다의 유언은 거짓이 생기므로 의언진여의 법(말씀)을 다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엔 이언진여의 법(얼나)에 의지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얼나(Dharma)로 모든 경전을 검토하고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반야심경>, p34


 기독교 사상가이자 이를 바탕으로 유불선(儒佛仙)을 바라보려 했던 다석 사상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상의 연결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이 불자 입장에서는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는 불교 안의 진리를 타 종교 신자들도 자신들의 배경 아래에서 쉽게 이해시켜 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영원절대인 하나(一)가 하느님인 니르바나님이다. 니르바나님은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 다만 내 마음속에 온 니르바나님을 다르마(Dhrama)라고 한다. 다르마(얼나)를 의식화(意識化)하면 반야바라밀다(Prajna paramita)로 도피안(度彼岸)의 지혜이다. 니르바나님으로부터 온 얼나만이 니르바나님에게 이른 얼나이다. 반야바라밀다가 제나(自我)의 수성(獸性)을 온전히 다스리면 붓다(Buddha)가 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반야심경>, p326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의 제나(自我)를 버리지 않으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제나(自我)에서 얼나(法我)로 솟나면 거짓나인 제나(自我)의 생노병사의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나(自我)가 생노병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지 않으면 석가붓다의 말씀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_ 박영호,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 반야심경>,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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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12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10-12 07: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yamoo 2023-10-12 09: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석 유영모는 많이 안알려진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사상가이죠. 함석헌은 알아도 다석 모르는 사람들 많습니다. 기독교도 중에서도 아주 많아요. 책이 출간됐음에도 읽는 개신교도는 별로 없죠. 내가 아는 기독교도 중 10년 이상을 교회에 다녔음에도 다석을 모르는 사람들 부지기수에요. 참 거시기 합니다. 저는 다석 유영모를 소개한 책을 본 후 다석에 관계된 출판물은 구할 수 있으면 거의 구했는데, 위 두 책만 구하지 못한 듯합니다. 다석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일종의 종교철학자인 듯해요. 불교 도교 기독교 등 종교의 핵심 경전들을 연구한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석의 저작들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렇지 않은 거 같아 아쉬운 감이 들었는데, 호랑이 님 서재에서 다석의 책도 보게 되네요!!^^

겨울호랑이 2023-10-12 16:32   좋아요 1 | URL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의 이름이 낯설지만, 기독교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종교의 틀을 제시하고 이를 삶으로 옮긴 실천적 철학자라는 점에서 yamoo님 말씀처럼 다석 사상이 보다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함석헌의 사상이 공동체의 윤리를 강조한다면, 다석 사상은 공동체 이전의 개인의 깨달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더불어 읽을 사상가들의 책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
 

무엇보다도 한국과 일본은 냉전 시기는 물론이고 그 이후도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공유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한일관계의 상당 부분은 한미일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대미동맹의 공유가 한일관계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가, 또한 그것이 시기적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왔는가에 중점을 두는 것은 한일관계의 분석에 있어 필수 사항이다.

한일을 사정거리에 두는 북한 핵미사일 개발, 일본인 납북 문제, 한일 국교 정상화 등 남북관계나 한일관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는 한일관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후 중국의 대국화, 그리고 미국과 중국 관계가 대립으로 변화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이에 따라 미중관계 변화가 한일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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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녀 마음속에 끼어들 기회만을 노렸는데, 그것도 그녀 마음에 드는 방법을 통하려고 애썼다. 가령 꽃집이나 보석상 진열장에서 마음에 드는 작은 관목이나 보석을 보면, 그는 곧바로 그것을 오데트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느끼는 기쁨을 그녀도 느낄 것이고, 그러면 그에 대한 그녀의 애정도 더 커질 것이라고 상상하며 그녀가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으므로 자기가 그녀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순간을 더 이상 늦추지 않으려고, 즉시 그 선물을 라페루즈 거리로 보냈다.

자주 돈에 쪼들리는 그녀는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으면 스완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그는 그것이 기뻤다. 오데트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가 그녀에 대해 품고 있는 커다란 사랑이나 단지 커다란 영향력에 대한 생각,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기뻤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녀에게 선물 세례를 하고 필요한 것을 도와줌으로써, 그녀 마음에 들기 위해 기진맥진 노력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인격이나 지성과는 무관한 이점에 기댈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랑에 빠져 사랑으로만 산다는 이 쾌락이, 때로는 이 쾌락의 현실성이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비물질적 감각을 즐기는 스완이 지불하는 대가가 그 쾌락의 가치를 더해 주었다.

그의 생각은 잠시 어둠 속을 더듬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알을 닦고 손으로 눈을 비비며 전혀 다른 생각 앞에서 빛을 되찾았다. 즉 다음 달에는 5000프랑 대신 6000프랑이나 7000프랑을 보내 오데트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안겨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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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은 원자력 연구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잠재적 이용가치가 높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산을 편성하고 연구를 적극 장려했죠. 그런 점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원전과 핵무기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1980, 90년대 들어 원전이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저렴한 에너지라는 이유로 점점 원전과 핵무기가 서로 다른 체제라고 여기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분리가 일어난 것 같아요.

제가 주목했던 것은 그 당시가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 이후 민주당이 집권한 시기라는 점입니다. 사고 이후 토오꾜오전력이 사실을 은폐하고 또 그것을 일본 민주당정권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일본이 민주화되었다고 여겨지던 그 시점에, 민주주의가 국민의 안전과 보호에 실패했지요.

차이는 핵산업·핵무기를 대하는 정치경제적인 맥락에서 온다고 봅니다. 단순히 환경문제로 접근하거나 시민들의 요구 또는 사고로 인한 피해만으로 산업이 없어질 만큼 핵산업은 취약하지 않습니다. 이 강고한 카르텔을 무너뜨리려면 정치의 영역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일본의 정재계가 핵융합 등과 같이 선진국에서 이미 폐기한 핵개발 시설에 반세기 넘게 집착해오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상황이 현재의 문제와 모두 연결되어 있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떤가요? 불확실성과 위험성에 대한 인식 자체를 부인하고 ‘괴담’이라고 억압합니다. 지난 7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시찰단이 일본을 다녀와 보고서를 냈는데요(「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계획에 대한 검토보고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2023.7.7), 그런데 한국 스스로 실시한 위험평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토오꾜오전력 보고서가 잘되었다는 내용뿐이에요.

저는 결국 지금 진행되는 오염수 방류는 앞으로 있을 여러 절차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지금보다 농도가 더 높은 고준위 폐기물을 끄집어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액체·기체 핵폐기물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정치적인 타협이나 제도적인 체계가 아닌 과학으로 주장을 하면 다른 모든 의견을 무시할 수 있다는 듯 무기로서 과학을 가져온 거거든요. 하지만 과학은 그 자체로 반박과 반증에 열려 있는 민주주의적인 지식 생산과 소통의 체계입니다. 문제가 너무 정치적일 때 오히려 논쟁에 과학을 끌고 오는데, 저는 이 사태가 그걸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재난에 더욱 큰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취약성 때문인데, 정부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재난이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따라서 재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이어지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중시하는데, 이것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끊겨버리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됩니다.

오염수 사건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연대를 통해 우리가 같이 풀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설령 오염수 방류국가가 일본이 아니라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여도 같은 식으로 반대해야 된다는 거죠. 본질은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에너지, 특히 전력 문제는 기본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입니다. 심지어 재생에너지조차도 일정 규모가 되어야 효율이 높아지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자본이 투입될 수밖에 없어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에 제한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기후정치나 녹색정치의 영역이 중요한 겁니다.

후꾸시마 원전사고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된 이야기 하나는 결국 토오꾜오의 전력을 위해 지방이 희생된 것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수도권의 공장들을 돌리기 위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지역공동체가 희생된 것이죠.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는 단순히 수산물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민주주의의 문제, 에너지 전환의 문제, 그리고 거기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까지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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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의 전제는 다신주의 종교(예를 들어 헤르메스주의 문학이나 『칼데아의 신탁』에서 나타나는 종교들)와 철학(특히 플라톤주의)의 공통된 과제들, 즉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보장하고 이어서 신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과제였다.

이 세계에는 신성한 영적 실재의 파편들, 즉 지혜가 스스로의 열정으로 인해 신성한 세계에서 잠시 벗어났을 때 ‘밖으로 흘러나온’ 파편들이 감금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파편들은 이어서 하류의 신과 그의 시종들이 창조한 인간의 일부 안에 침적된다. 이들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다. 구원 과정은 이들이 자신 안에 내재하는 신성함에 대한 앎을 깨어나게 하고 이를 통해 신의 지체로 복원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레네오에게 물질세계란 신이 원했고 그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힘으로 함께 실현하게 될 선한 창조의 일부를 의미했다. 그런 식으로 이레네오는 구약을 통한 계시와 예수를 통한 계시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를 구약을 통해 예수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역사 및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된 운명의 영광스러운 완성과 일치시켰다.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급격한 성장은 사실상 세속 문화와 철학의 주요 기관들에 대한 탄압 정치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리스 전통 철학에서 그노시스는, 단순한 지각aisthesis이나 견해doxa와는 다르다는 차원에서, ‘존재에 대한 진정한 앎’을 의미했다. 하지만 2세기에 들어와서 그노시스는 점차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지능력으로는 취득하기 힘든 초월적인 차원의 지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지주의 문헌들은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성격이 아닌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이들의 이론에서 하나의 체계적인 신학을 발견하기 힘들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는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를 선과 악이라는 자율적이고 강렬하며 서로 상반되는 원리들이 전투를 벌이는 일종의 무대로 간주한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악과 어두움은 신성한 힘이 발산되는 곳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했고 신성한 힘의 기원은 하나, 즉 그 자체로 충만한 빛이자 선이었다. 세상이 악한 것은 오로지 신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에게 근원악은 사고에 의해 발생한 것도, 신의 적도 아니었다. 악은 오히려 신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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