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은 원자력 연구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잠재적 이용가치가 높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산을 편성하고 연구를 적극 장려했죠. 그런 점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원전과 핵무기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1980, 90년대 들어 원전이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저렴한 에너지라는 이유로 점점 원전과 핵무기가 서로 다른 체제라고 여기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분리가 일어난 것 같아요.

제가 주목했던 것은 그 당시가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 이후 민주당이 집권한 시기라는 점입니다. 사고 이후 토오꾜오전력이 사실을 은폐하고 또 그것을 일본 민주당정권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일본이 민주화되었다고 여겨지던 그 시점에, 민주주의가 국민의 안전과 보호에 실패했지요.

차이는 핵산업·핵무기를 대하는 정치경제적인 맥락에서 온다고 봅니다. 단순히 환경문제로 접근하거나 시민들의 요구 또는 사고로 인한 피해만으로 산업이 없어질 만큼 핵산업은 취약하지 않습니다. 이 강고한 카르텔을 무너뜨리려면 정치의 영역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일본의 정재계가 핵융합 등과 같이 선진국에서 이미 폐기한 핵개발 시설에 반세기 넘게 집착해오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상황이 현재의 문제와 모두 연결되어 있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떤가요? 불확실성과 위험성에 대한 인식 자체를 부인하고 ‘괴담’이라고 억압합니다. 지난 7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시찰단이 일본을 다녀와 보고서를 냈는데요(「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계획에 대한 검토보고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2023.7.7), 그런데 한국 스스로 실시한 위험평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토오꾜오전력 보고서가 잘되었다는 내용뿐이에요.

저는 결국 지금 진행되는 오염수 방류는 앞으로 있을 여러 절차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지금보다 농도가 더 높은 고준위 폐기물을 끄집어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액체·기체 핵폐기물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정치적인 타협이나 제도적인 체계가 아닌 과학으로 주장을 하면 다른 모든 의견을 무시할 수 있다는 듯 무기로서 과학을 가져온 거거든요. 하지만 과학은 그 자체로 반박과 반증에 열려 있는 민주주의적인 지식 생산과 소통의 체계입니다. 문제가 너무 정치적일 때 오히려 논쟁에 과학을 끌고 오는데, 저는 이 사태가 그걸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재난에 더욱 큰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취약성 때문인데, 정부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재난이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따라서 재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이어지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중시하는데, 이것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끊겨버리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됩니다.

오염수 사건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연대를 통해 우리가 같이 풀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설령 오염수 방류국가가 일본이 아니라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여도 같은 식으로 반대해야 된다는 거죠. 본질은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에너지, 특히 전력 문제는 기본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입니다. 심지어 재생에너지조차도 일정 규모가 되어야 효율이 높아지고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자본이 투입될 수밖에 없어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에 제한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기후정치나 녹색정치의 영역이 중요한 겁니다.

후꾸시마 원전사고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된 이야기 하나는 결국 토오꾜오의 전력을 위해 지방이 희생된 것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수도권의 공장들을 돌리기 위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지역공동체가 희생된 것이죠.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는 단순히 수산물이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민주주의의 문제, 에너지 전환의 문제, 그리고 거기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까지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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