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선사 예술 이야기
장 클로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열화당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암면미술(岩面美術, art rupestre)의 주요한 세 가지 주제(기하하적 부호, 인간, 동물)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은 것은 기하학적 부호이고, 시야를 사로잡는 것은 몸집 큰 동물들이다. 작은 크기의 종들(새, 토기/산토끼, 물고기)은 좀 덜 그려졌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은 말, 들소, 오로크스, 매머드, 순록, 사슴, 야생 염소 등이다. 털코뿔소나 곰, 동굴 사자들은 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들은 사냥꾼의 주제로, 그들이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냥감, 포식동물, 여타의 큰 짐승 등을 그렸을 것이다. 반대로 식물이나 채소 그림은 부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린이, 아기, 출산이나 가사장면, 그리고 우선적으로 여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주제도 없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66/243


 프랑스 고고학자 장 클로트(Jean Clottes, 1933 ~ )는 <선사 예술 이야기 Pourquoi l'art prehistorique?>에서 선사 시대 미술 작품 안에서 신화(神話)를, 신화 아래에서 자연(自然)과 인간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이들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샤먼(Shaman)에 대해 말한다. 언어가 없었던 시대의 미술 작품은 공동체의 의사전달 수단으로 기능했다.


 신화에는 다양한 역할이 있다. 그 다양성과 복잡성 중에서 우리는 주요한 세 가지 특징을 구분해 볼 것이다. 물론 다 연결되어 있지만, 설명의 용이성을 위해 분리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역할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주요한 역할은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자연 현상에 직면하면 인간은 늘 그것을 해석해 보려는 경향이 있다(p150)... 신화의 두 번째 주요한 요소는 집단 내부의 사회적 역할이다. 신화는 한 집단이 겪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그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구전 문화를 통해 전승함으로써 집단적 정체성을 만든다(p151)...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요 역할은, 신화와 그 신화를 구체화하는 그림이 그 자체로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라는 재현물은, 또 그에 걸맞은 의식은 어떤 세계나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한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52/243


 선사 시대의 예술 작품 중 남아있는 것은 미술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어두운 깊은 곳에 의미를 가진 부호들이 바위에 새겨질 때, 시각적인 의미만 주어졌을까? 후각을 통해 동굴 안의 위험을 파악하는 것도, 작업 도중에 일종의 주문(呪文)처럼 청각 역시 예술의 일부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선사 시대 당시에는 미술의 일부였던 어느 부분처럼 암면에 새겨진 동물들의 의미 역시 단순히 사냥감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안내원들이 퓨마가 있는지 없는지 흔적이라도 살펴봐 주길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안내원은 이쪽저쪽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히 퓨마는 지금 거기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고 한번 가 보자고 했다. 우리 문명권에서는 후각을 지식과 방어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의 잊어버렸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59/243


 <선사 예술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신(神)' 이전에 '자연의 중심으로서 동물'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때 샤먼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조물주에게 많은 사냥감을 달라고 기원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조화를 기원했음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석기 시대의 수많은 신화들은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으로 소멸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어떤 신앙, 특히 샤머니즘의 근본에는 인간종과 동물종을 포함한 여러 종들 간의 깊은 상호 연대에 대한 믿음이 자리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른바 의인화된 신은 논리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구석기 예술에서 동물들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나타나는 것이 비로소 이해된다. 우주의 힘을 지배하는 정령을 구현한 것은 동물들이었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48/243


 땅과 물, 바람과 불의 신은 넷째 층에 산다. 사람마다 자기 안에 이 네 개의 신을 균형적으로 가지고 있다. 샤먼의 역할은 이 네 가지 요소의 균형이 깨졌을 때 다시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다섯째 층에는 사방위 신들이 산다. 이건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신들이다. 샤먼들이 사방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새삼 다시 알게 되는 대목이다. 우주의 기본 원칙은 조화와 균형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높은 것과 낮은 것 간의 균형이 있다. 그것이 깨지면 반향을 일으키는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샤먼이 개입해야 한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44/243


 샤머니즘은 인간이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라는 개념을 갖는다. 샤머니즘에서 정령은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모든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다 관련되어 있고 상호연결되어 있다. 샤먼 의식은 인간 집단과 돌, 동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과 우주와 정령들이 하나되도록 하는 것이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44/243


 <선사 예술 이야기>는 선사 시대 예술을 현대인의 관점이 아닌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만물이 그를 위해 존재한다는  신석기 시대 이후 세계관에서는 암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이 식량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구석기 시대 인간들에게 이들은 함께 세상을 이루는 또다른 동료였다. 자연을 개발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는 구석기 시대 인간들의 세계관이 표현된 깊은 동굴의 암면화. 선사 시대의 예술을 만든 이의 시각에서 온전하게 받아들였을 때, 오늘날 기후변화와 같은 현대 문명의 과제를 바르게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샤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기본 개념은 세계(또는 세계들)의 투과성과 유동성이다. 샤먼적 요소들(환영이나 환각)이 대부분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할지라도, 이런 개념들이 신앙 및 의례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틀을 가질 정도로 충분히 강한 도구로 사용될 때만 샤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결론은, 이만여 년 동안 충분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본 개념을 갖춘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전역에 이 종교를 토대로 한 동일한 행동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토대를 탐색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 토대를 통해 사고의 틀, 세계에 대한 특정한 개념 등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72/243



우리는 동물들이 놀라운 힘과 특질을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보는데, 동물을 신성하게 간주하는 문화의 이런저런 양태들을 보면 그 문화가 그 동물을 그렇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측면이 있다. _ p96/243

인간 정신성의 위대함이 만일 이 죽은 자들이 가있는 세계를 어떻게든 찾고 그 세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에서 일어났다면, 연속성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그 실현이라는 희열(실제 체험이든 환각이든)만이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는 근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환치 가능한 등가어인 이유는 흔히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선사인과 현대인은 죽음 앞의 이 무력함에서만큼은 진정한 동시대인이다. _ p222/243

선사인들이 동굴 내벽 너머 다른 세계와 닿기 위한 간절함으로 암각화를 새겼듯 현대의 예술가는 선과 색채를 통해, 즉 ‘언어‘를 통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세계와 닿으려고 몸부림친다. 예술이 선과 색채, 언어 자체에 있지만은 않음은 이쯤 되면 명확해진다. 우리는 회화든 문학이든 한 작품에 씌여진 ‘언어‘를 읽으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언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언어 너머로 흘러드는 것이다. 독서의 순간이다. 무아지경의 순간이다. _ p223/24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하라 2022-06-10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이야기가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거였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역사, 종교, 철학까지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예술이었네요.
깊이 있는 분야들을 독서하는 분들의 내면의 깊이를 따라 배우려면 리뷰를 통해 접한 장르들에 조심조심 따라 들어가봐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편안한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2-06-10 22:21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말씀처럼 예술에는 역사, 종교, 철학 등 당대의 사회상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사, 종교 등 다른 분야도 모두 서로의 모습을 담고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요. 어느 한 분야를 제대로 알려면 종합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참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책을 읽을수록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뿐인 듯 합니다. ㅜㅜ 이 점이 안타깝습니다만, 미력하나마 꾸준하게 채워가야겠지요... 이하라님 좋은 금요일 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보살핌(affection)과 물질노동으로 구성되며 종종 임금도 지급되지 않는 이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이 노동 없이는 문화도 경제도 정치구조도 있을 수 없다"
1)고 단언한다

돌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매개로 그동안 간과되어온 ‘사회적인 것’들을 다양하게 재발견하고 합당한 자리로 복원시키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사회적 질서를 상상하고 수행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 하겠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자신의 주변과 관계적 지평을 생성하는 구체적 행위가 돌봄이라면, 돌봄을 정치화하는 저 엄마들의 묵념에는 삶과 죽음의 구분을 무화시킴으로써 ‘살아 있음’의 지평을 한번 더 열어내는 힘, 나아가 ‘진정한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문학이라는 주제에서도 결국 핵심은 무엇보다 각자의 삶이 먼저 달라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말이 담백해지는 일이라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고 설계하지 않는 한 에너지대전환의 시대도 가능할 법하지 않다. 대전환에 도달하기까지의 이행기는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대다수 민중들에게 ‘안빈’이나 ‘청빈’도 사치에 불과한 이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소용돌이’를 초래한 모든 근대주의 관념들에서 탈피하는 작업이야말로 극복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부동산, 설계된 절망 : 국가는 어떻게 승자가 정해진 게임을 만들었는가?
리처드 로스스타인 지음, 김병순 옮김, 조귀동 해제 / 갈라파고스 / 2022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정부가 의도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소득 증가를 억제한 결과로 소득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집값 때문에 흑인들이 주류 주택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이러한 경제 정책들은 법률상의 흑백 주거 구역 분리 체계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노예해방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대다수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자유롭게 노동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고 따라서 저축을 할 정도로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했다... 남북전쟁 이후, 국가 재건의 시대가 끝나고 강화된 계약 노동자 소작제는 과거 노예제의 여러 측면을 영속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_ 리처드 로스스타인, <부동산, 설계된 절망> , p168/375

리처드 로스스타인 (Richard Rothstein, 1939~ )의 <부동산, 설계된 절망 The Color of Law: A Forgotten History of How Our Government Segregated America>은 소득불평등이 자산불평등으로 나아가고, 이러한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사회구조를 분석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이 제도적/비제도적 장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에서 '국가'는 영구히 흑백분리를 결정짓는다.

법률상 흑인 분리를 만들어 낸 것은 연방정부의 대규모 공영주택 계획과 주택담보대출 금융 제도만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정부의 자잘한 조치와 행태들이 그러한 인종차별에 기여했다. 그것들 가운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전기나 수도 같은 공공시설 이용을 거부하는 것 같은 사소한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_ 리처드 로스스타인, <부동산, 설계된 절망> , p136/375

국가의 최고 이념인 헌법(憲法)은 이러한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지만, 하위법인 법률(法律)에 의해 불평등은 은밀하게 인정되고 그 간극은 점차 커지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세대를 거치면서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게 된다는 것이 <부동산, 설계된 절망>의 큰 줄기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대개 자식 세대에게로 이어지기 때문에, 20세기 중반에 정부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온전한 자유 노동시장 참여를 막으면서 하락한 소득은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특성이 되었다(p194)... 노동시장에서의 인종차별이 크게 약화되어 상당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중산층이 되었을 때는, 이미 시내의 흑인 동네 밖에 있는 주택들의 가격이 노동계급과 하위 중산층 가정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흑백 주거 구역 분리가 일단 확립되자, 마치 인종 문제와 관련해서 중립적 입장인 체하는 정부 정책들은 그런 흑백 차별을 더욱 강화하며 문제 해결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연방세법의 주택담보대출 이자 공제 정책은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외 지역에 있는 백인 노동계급과 중산층 가정의 주택 가치는 수년에 걸쳐 매우 높아졌고, 그 결과 백인과 흑인 사이의 막대한 부의 차이는 두 인종 간 생활 방식을 영구적으로 결정짓는 데 크게 기여했다. _ 리처드 로스스타인, <부동산, 설계된 절망> , p195/375

<부동산, 설계된 절망>은 게토(ghetto)에서 헤어날 수 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거주 문제를 다루지만, 안에 담긴 문제들과 시사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토지 개발 방식과 사업 추진을 위한 혜택, 주택 구입 자금 금융 제도 등 제도적인 부분과 거주지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등은 아파트 단지 내 임대 주택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도 남의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른 자산들은 구입 후 일정시간이 지나면 감가상각(減價償却, depreciation)을 통해 비용화되어 소멸되어가지만, 대체가 거의 불가능한 부동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자가 붙는 투자자산(投資資産)의 성격을 갖는다. 대량으로 공급되는 아파트는 이런 상품성을 잘 드러내는 건물로, 소유여부에 따라 정치성향이 크게 갈리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아파트 소유자와 비소유자 그리고 같은 지역 내에서도 국민임대아파트 거주자를 향한 차별적 시선이 존재하며,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현 상황에서 <부동산, 설계된 절망>의 흑백문제와 저자의 통찰은 우리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흑백 주거 구역 분리가 백인들에 주입하는 그릇된 우월감은 결국 미국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정책들에 대한 백인들의 거부로 나타난다. 흑인만 사는 동네 생활이 초래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이들의 낮은 성취도는 나중에 그들이 중산층 직장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드는 또 다른 장애 요소로 작용한다. 이런 방식으로 흑백 주거 구역 분리는 그 자체를 영속화하며,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그것을 뒤집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_ 리처드 로스스타인, <부동산, 설계된 절망> , p212/37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6-09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시사점이 분명 있습니다!
공정하다는 착각도 생각나고!

겨울호랑이 2022-06-10 07:40   좋아요 1 | URL
세계화가 이루어지면서 각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각 공동체 내부에서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문제의 내부에는 불평등이라는 분모가 자리하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되네요...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금융 감독 기관들이 인종차별 정책을 드러내 놓고 펼치는 일반은행과 저축은행 들을 인가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미국 헌법이 부여한 의무를 스스로 방기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즈음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거용 택지를 공원 용지로 수용하는 것은 백인만 사는 동네를 유지하기 위해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1959년 미주리주 항소법원이 판결한 것처럼, 토지 수용의 목적이 공적인 것이라면, 사법제도는 그 수용의 동기가 무엇인지 따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원은 확실히 공적인 공간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집을 짓는 것을 막기 위해 사유지를 강제수용하고 토지의 용도를 변경하는 수법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거의 일상적으로 쓰였다.

정부가 백인들이 사는 교외 지역에 흑인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막고, 흑인 가정을 몇몇 도심 지구에 집중시키는데 성공하자, 흑인 지역사회는 정말로 황폐화됐다. 대개의 경우, 빈민가 철거는 좋은 아이디어일 수 있었다. 소득이 적은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살고 있는 불결하고 불량한 건물들을 부수고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사는 동네에 제대로 된 새집을 제공한다는 계획은 실로 적절하고 타당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 정책 결정자가 생각하는 재배치는 그런 그림과는 완전히 달랐다. 빈민가 철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빈곤화와 함께 그들의 공간적 분리를 더욱 강화하며 결국 더욱 더 흑백 거주 분리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궁핍해질수록, 이들을 환영하는 백인 중산층 동네는 점점 더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집주인이나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세입자들이 내는 높은 재산세는 흑인 동네를 쇠퇴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구들은 높은 세금을 납부하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했다. 그래서 일부는 재산세 납부를 위해 하숙을 치거나 한집에 여러 세대가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의 게토 지역은 스스로 계속해서 또 다른 게토 지역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의 주택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가처분소득이 줄기 마련이고, 그것은 그가 집을 팔고 살던 동네를 떠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사 가서 살 수 있는 곳이 제한되면서, 비슷한 규모의 주택임에도 백인이 주로 사는 동네보다 흑인 동네의 임차료와 매매가가 더 높아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대도시 지역 어디서든 살 집을 구할 수 있었다면, 주택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어 그들이 내는 임차료와 주택 가격은 합리적인 선으로 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세를 놓거나 집을 매매하려고 하는 집주인들은 주택 수요가 공급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약점을 자유롭게 악용할 수 있었다.

인종의 분리와 차별은 국가적 부의 분배뿐 아니라, 그 부를 만들어 내는 생산성에도 큰 악영향을 미친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다른 문화적 배경 때문에 발생하는 관점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조직은 더 잘 돌아간다. 사회심리학자들은 흑백 주거 구역 분리가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우월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믿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스로 도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우월감에 빠진 집단은 성취도도 낮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만일 연방정부가 시행하는 각종 계획을 통해서 정부의 주택 보조금을 받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소득층이 정부가 확고하게 분리한 흑인 동네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됨으로써 인종 간 분리가 더욱 강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인종차별이 없는 지역사회들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국 보수당의 이론가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보수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수는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중동’은 문재인정권 내내 기득권 수호, 곧 수구의 논리를 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진보 논객 리영희의 책 제목이 말해주듯, 보수와 진보가 서로 경쟁해야 사회발전의 동력이 확보될 수 있다. 이때 필수요건은 진정성이다. 진정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 진정한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또한 양립해야 한다.

서구 정당과 언론의 또 한가지 특징은 일관성이다. 유럽에는 ‘백년 정당’이 숱한데, 한국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지면 정당 이름부터 바꾼다. ‘정론지’를 자처하는 우리 수구보수언론의 논조는 더욱 변화무쌍하다. 촛불정부의 최대 개혁과제였던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객관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종일관하는 것은 정파성이다.

대부분 종편은 ‘종합편성채널’이 아니라 편향적인 ‘정치전문채널’이 되어 선거 때면 거의 일방적으로 국민의힘 후보 편을 들고 민주당 후보를 적대시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울어진 언론지형이 민주당의 대선 패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국회 180석을 가진 정치세력이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이라는 양대 개혁과제 중 특히 언론개혁에는 손도 못 댄 상황에서 또 표를 달라고 그 손을 유권자에게 내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 행태, 특히 이번 대선국면의 보도 태도를 보면 부정적 측면이 너무나 많이 드러난다. 선거판을 좌우한 것은 후보의 역량이나 정책 차이가 아니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수로 뛰는 언론의 편파보도가 선거판을 흔들고 여론조사가 밴드왜건(bandwagon) 효과를 냈다. 일부 언론은 특정 정당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한 몸처럼 움직이고, 선거전략을 제시하며 정당의 머리 구실까지 했다

모든 자유는 자유권의 내재적 한계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고, 특히 언론에는 책임성이 강조돼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주의 자유나 기자의 특권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로 발전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쪽으로 언론의 자유가 악용되고 있다. 우리는 독재정권 시절 언론의 자유를 너무도 갈망했기에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신화에 빠져버렸다. ‘남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 ‘가짜뉴스로 명예를 훼손할 자유’는 없는데도, 기득권 언론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언론개혁에 한사코 반대했다.

언론현업단체들이 주장하는 ‘자율규제’는 어찌 보면 형용모순이다. 대형 언론사들은 편파·왜곡·선정보도를 일삼는 조직인데다, 조선NS와 같은 온라인 뉴스 자회사까지 만들어 포털을 통해 거액을 벌어들이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자율규제로 극성스러운 상업주의를 제재하겠다는 것은 언론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을 좇는 것이다.

『르몽드』(Le Monde)의 전 발행인 콜롱바니(J. Colombani)는 "언론에 두 주적이 있는데 하나는 돈, 하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재정이 중요한 건 당연하고, 시간과 관련해서는 인터넷과 포털을 중심으로 속보성이 중요해짐에 따라 진지한 언론이 밀리고 있다는 시각이다. 한국에서는 포털이 진지한 언론의 적이 되고 있다. 진지한 언론은 건전한 공론장을 조성하고 숙의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조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