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선사 예술 이야기
장 클로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열화당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암면미술(岩面美術, art rupestre)의 주요한 세 가지 주제(기하하적 부호, 인간, 동물)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은 것은 기하학적 부호이고, 시야를 사로잡는 것은 몸집 큰 동물들이다. 작은 크기의 종들(새, 토기/산토끼, 물고기)은 좀 덜 그려졌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은 말, 들소, 오로크스, 매머드, 순록, 사슴, 야생 염소 등이다. 털코뿔소나 곰, 동굴 사자들은 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들은 사냥꾼의 주제로, 그들이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냥감, 포식동물, 여타의 큰 짐승 등을 그렸을 것이다. 반대로 식물이나 채소 그림은 부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린이, 아기, 출산이나 가사장면, 그리고 우선적으로 여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주제도 없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66/243


 프랑스 고고학자 장 클로트(Jean Clottes, 1933 ~ )는 <선사 예술 이야기 Pourquoi l'art prehistorique?>에서 선사 시대 미술 작품 안에서 신화(神話)를, 신화 아래에서 자연(自然)과 인간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이들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샤먼(Shaman)에 대해 말한다. 언어가 없었던 시대의 미술 작품은 공동체의 의사전달 수단으로 기능했다.


 신화에는 다양한 역할이 있다. 그 다양성과 복잡성 중에서 우리는 주요한 세 가지 특징을 구분해 볼 것이다. 물론 다 연결되어 있지만, 설명의 용이성을 위해 분리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역할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주요한 역할은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자연 현상에 직면하면 인간은 늘 그것을 해석해 보려는 경향이 있다(p150)... 신화의 두 번째 주요한 요소는 집단 내부의 사회적 역할이다. 신화는 한 집단이 겪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그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구전 문화를 통해 전승함으로써 집단적 정체성을 만든다(p151)...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요 역할은, 신화와 그 신화를 구체화하는 그림이 그 자체로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라는 재현물은, 또 그에 걸맞은 의식은 어떤 세계나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한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52/243


 선사 시대의 예술 작품 중 남아있는 것은 미술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어두운 깊은 곳에 의미를 가진 부호들이 바위에 새겨질 때, 시각적인 의미만 주어졌을까? 후각을 통해 동굴 안의 위험을 파악하는 것도, 작업 도중에 일종의 주문(呪文)처럼 청각 역시 예술의 일부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선사 시대 당시에는 미술의 일부였던 어느 부분처럼 암면에 새겨진 동물들의 의미 역시 단순히 사냥감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안내원들이 퓨마가 있는지 없는지 흔적이라도 살펴봐 주길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안내원은 이쪽저쪽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히 퓨마는 지금 거기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고 한번 가 보자고 했다. 우리 문명권에서는 후각을 지식과 방어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의 잊어버렸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59/243


 <선사 예술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신(神)' 이전에 '자연의 중심으로서 동물'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때 샤먼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조물주에게 많은 사냥감을 달라고 기원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조화를 기원했음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석기 시대의 수많은 신화들은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으로 소멸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어떤 신앙, 특히 샤머니즘의 근본에는 인간종과 동물종을 포함한 여러 종들 간의 깊은 상호 연대에 대한 믿음이 자리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른바 의인화된 신은 논리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구석기 예술에서 동물들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나타나는 것이 비로소 이해된다. 우주의 힘을 지배하는 정령을 구현한 것은 동물들이었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48/243


 땅과 물, 바람과 불의 신은 넷째 층에 산다. 사람마다 자기 안에 이 네 개의 신을 균형적으로 가지고 있다. 샤먼의 역할은 이 네 가지 요소의 균형이 깨졌을 때 다시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다섯째 층에는 사방위 신들이 산다. 이건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신들이다. 샤먼들이 사방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새삼 다시 알게 되는 대목이다. 우주의 기본 원칙은 조화와 균형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높은 것과 낮은 것 간의 균형이 있다. 그것이 깨지면 반향을 일으키는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샤먼이 개입해야 한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44/243


 샤머니즘은 인간이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라는 개념을 갖는다. 샤머니즘에서 정령은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모든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다 관련되어 있고 상호연결되어 있다. 샤먼 의식은 인간 집단과 돌, 동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과 우주와 정령들이 하나되도록 하는 것이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44/243


 <선사 예술 이야기>는 선사 시대 예술을 현대인의 관점이 아닌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만물이 그를 위해 존재한다는  신석기 시대 이후 세계관에서는 암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이 식량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구석기 시대 인간들에게 이들은 함께 세상을 이루는 또다른 동료였다. 자연을 개발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는 구석기 시대 인간들의 세계관이 표현된 깊은 동굴의 암면화. 선사 시대의 예술을 만든 이의 시각에서 온전하게 받아들였을 때, 오늘날 기후변화와 같은 현대 문명의 과제를 바르게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샤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기본 개념은 세계(또는 세계들)의 투과성과 유동성이다. 샤먼적 요소들(환영이나 환각)이 대부분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할지라도, 이런 개념들이 신앙 및 의례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틀을 가질 정도로 충분히 강한 도구로 사용될 때만 샤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결론은, 이만여 년 동안 충분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본 개념을 갖춘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전역에 이 종교를 토대로 한 동일한 행동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토대를 탐색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 토대를 통해 사고의 틀, 세계에 대한 특정한 개념 등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72/243



우리는 동물들이 놀라운 힘과 특질을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보는데, 동물을 신성하게 간주하는 문화의 이런저런 양태들을 보면 그 문화가 그 동물을 그렇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측면이 있다. _ p96/243

인간 정신성의 위대함이 만일 이 죽은 자들이 가있는 세계를 어떻게든 찾고 그 세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에서 일어났다면, 연속성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그 실현이라는 희열(실제 체험이든 환각이든)만이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는 근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환치 가능한 등가어인 이유는 흔히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선사인과 현대인은 죽음 앞의 이 무력함에서만큼은 진정한 동시대인이다. _ p222/243

선사인들이 동굴 내벽 너머 다른 세계와 닿기 위한 간절함으로 암각화를 새겼듯 현대의 예술가는 선과 색채를 통해, 즉 ‘언어‘를 통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세계와 닿으려고 몸부림친다. 예술이 선과 색채, 언어 자체에 있지만은 않음은 이쯤 되면 명확해진다. 우리는 회화든 문학이든 한 작품에 씌여진 ‘언어‘를 읽으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언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언어 너머로 흘러드는 것이다. 독서의 순간이다. 무아지경의 순간이다. _ p223/24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하라 2022-06-10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이야기가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거였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역사, 종교, 철학까지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예술이었네요.
깊이 있는 분야들을 독서하는 분들의 내면의 깊이를 따라 배우려면 리뷰를 통해 접한 장르들에 조심조심 따라 들어가봐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편안한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2-06-10 22:21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말씀처럼 예술에는 역사, 종교, 철학 등 당대의 사회상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사, 종교 등 다른 분야도 모두 서로의 모습을 담고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요. 어느 한 분야를 제대로 알려면 종합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참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책을 읽을수록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뿐인 듯 합니다. ㅜㅜ 이 점이 안타깝습니다만, 미력하나마 꾸준하게 채워가야겠지요... 이하라님 좋은 금요일 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