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의 철학
한스-게오르크 묄러 지음, 김경희 옮김 / 이학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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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영원성과 세속적 시간성의 구분은 다른 구분과 병행한다. 영원성은 "영원한 지리"와 함께 한다. 영원한 진리는 무상하지 않다. 영원한 진리와 비교해서 세속적이고 시간적인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오류"이다. 영원성/시간성의 구분은 진리/오류의 구분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로부터 진리로 이르는 길은 시간성으로부터 영원성으로, 다시 말해 "시작"으로서의 하느님에게로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p167)... <노자>의 지속되는 시간은 시간 속에 통합되어 있는 데 반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성한 시작은 시간 너머에 있다. <노자>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는 영속성과 영원성의 차이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성은 시간-초월적인 데 반해 도가의 영속성은 시간-내재적이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68/275

한스-게오르크 묄러 (Hans-Georg Moeller, 1964 ~ )의 <도덕경의 철학>이 다른 <도덕경 道德經> 안내서와 다른 점은 독자를 동양사상을 잘 알지 못하는 서양인을 염두에 두고 풀어간다는 점일 것이다. 도(道) 안에서 통합되는 음양(陰陽)과 영속(永續)의 시간 개념은 이원론(二元論, dualism)과 절대적인 신(神)의 시간개념인 '영원(永遠)'에 익숙한 서양인들에게 분명 낯선 개념일 것이다. 이런 차이를 비교해서 설명하는 저자의 서술은 서양사상에 익숙한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한편, 동서양 철학을 개략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책이 가진 장점으로 느껴진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고대 중국철학은 참인 것과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또는 거짓인 것)을 구별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서양의 그리스철학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중국철학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질서(治)와 혼란(亂)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컸으며, 특히 혼란이 아닌 질서를 세우는 방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_ 한스-게오르크 뮐러, <도덕경의 철학> , p9/275

저자는 <도덕경>에서 서양철학이 풀지 못한 과제의 해법을 찾는다. 전면에 나서서 인류를 구원하는 영웅(英雄 hero)의 모습이 아닌, 스스로를 낮추고 감추면서 모든 것을 감싸는 성인(聖人)의 모습. 스스로 낮추면서 높은 것을 얻어내고, 비우면서 채워가는 성인의 모습은 음(陰)에서 양(陽)이 생성됨을 일깨워준다.

<노자>에서 내가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측면은 이 텍스트가 인간적 행위주체성 human agency에 도전한다는 점이다. 주체성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의 전통은 자아 ego와 그 자아의 힘들에 너무 집중해왔다. 이런 전통에서 <노자>의 입장은 다소 거북스러운 것으로 감지될지도 모른다. <노자>의 격률인 "행위하지 않음(無爲)"은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를 개별적 활동들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또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매커니즘으로 보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생산적 autopoietic" 대안이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2/275

골짜기의 효력은 생명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바로 이 효과, 즉 무궁무진한 유용성이라는 효과는 다양한 이미지와 구조 덕분에 확보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 이미지들과 구조들이 단순히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입증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것들은 동일한 교훈의 반복이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30/275


동일한 구조가 우주 전반에 적용된다. 하나는 텅비어 있고 없는 것이지만, 둘을 발생하게 한다. 하나(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없음)와 둘(있음, 음/양의 구분)이 합쳐져서 셋이 된다. 셋은 이처럼 하나와 둘의 통합이 "낳는" 것이다. 다수의 세계, 즉 만 가지 사물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은 바로 이 셋이다. 이 "적분의" 수학은 여기서 그려 보이고 잇는 것이 사실상 선형적 인과관계나 생성의 "역사적" 과정, 즉 통시적 발전이 아니라, 모든 요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공시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수는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서로 함께 간다... 도의 하나는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도는 내적인 통일성인 동시에 외적인 통일성이다. 한편으로 하나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의 중심에 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65/275

묄러는 <도덕경>에서 성(聖)과 속(俗)이 통합된 정치철학을 설명한다. 군주가 도(道)에 따라 물 흐르 듯 치세(治世)를 했을 때, 그는 '덕(德)'을 획득할 수 있다.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함으로 군주는 권위를 획득할 것이며, 권위는 그의 자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얻어지는 '덕'이 '강(强)하게 만든다는 것'이 <도덕경>전체 맥락에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고, 덕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행해지는 도(道)의 모습이 바람직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미두도록 하자. 다만, <도덕경의 철학>에서 이처럼 도(道)와 덕(德)의 관계를 보다 명쾌하게 설명되기에, 노자(老子, Bc571 ?~ ?)의 사상에서 제국주의의 위험함을 지적한 다른 글들을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이 책이 갖는 장점 중 하나라 여겨진다.

도를 따름으로써 성인-군주는 이원성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뚜렷이 구분되는 측면들과 계기들은 서로를 해치려고 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호 주고받음을 통해 협력한다. 이것은 유익한(그리고 리드미컬한) 효력의 교환으로 이어진다. 이 효력(德)은 군주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에서 펼쳐지고 공동체에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위신(德)"의 형태로 "그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조차도 그가 주었던 것을 얻는 것이다. 도와 그것의 효력인 덕은 가장 넓은 차원에서는 세상 전체에 "작용하고" 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70/275

도덕은 위험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쉽게 사회적 병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지나친 오만함과 개인적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집단적 차원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고도로 "도덕적인" 사회는 타자들을 자기들보다 도덕성이 떨어지고 가치가 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적(敵)일지도 모른다고 보기가 쉽다. 도덕적 언어와 도덕적 자기 찬사가 전쟁과 분쟁의 시대에 특별히 인기가 높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57/275


묄러의 <도덕경의 철학>은 <도덕경>의 81장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대신, <도덕경>이 쓰여진 당대의 언어와 사상을 낯선 현대의 서양인들에게 보다 쉽게 풀이한 책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식은 노자 사상이 낯설지 않은 우리에게도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서양인들이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노자를 통해 해결하려는 의도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좋은 입문서적이라 여겨진다.

<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터넷의 소위 하이퍼텍스트 hypertext 같은 비전통적이고 비선형적인 텍스트들에 견주는 것이 더 용이할 수도 있다(p17)... 그 역사의 초창기에, 특히 기원전 5세기나 4세기에 <노자>는 한 권의 책으로 기능했다기보다는 일종의 고대의 하이퍼텍스트로, 또는 구성과 해체, 확대와 축소의 지속적 과정 속에 놓여 있었던 텍스트적 게슈탈트 gestalt로 기능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19/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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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2-03-16 1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찌보면 인문학적 소향은 있되 동양 철학은 부족한 독자분이나, 도덕경을 읽었더라도 서양인이 설명하는 동양 철학적 개념으로 접하고 싶으신 분께 도움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6 17:39   좋아요 2 | URL
캐모마일님 말씀처럼 <도덕경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접한 <도덕경> 입문서와는 조금은 다른 관점을 보여줘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캐모마일 2022-03-16 17:42   좋아요 1 | URL
서양철학적 기반 위에서 도덕경을 설명하는 내용이 신선하네요. 뭔가 도덕경 해석,과 함께 도덕경으로 동서양 철학을 비교하고 통섭해보는 책 같아서 흥미롭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16 17:45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님께서 말씀하신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흥미롭게 읽힐 책이라 여겨집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22-03-16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독특하네요. 동양철학을 서양인의 관점에서 독해한 책이군요. 저도 이상하게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이 어럽습니다. 동양철학이 보다 고차원적인 것 같기도 하고... 서양철학은 혼자서 계보학 따지고 들며 공부하면 대충 알겠는데 동양철학은 혼자서는 잘 이해를 못하겠더군요..

겨울호랑이 2022-03-16 18:22   좋아요 0 | URL
^^:) 곰곰발님 뿐 아니라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번역에 사용된 언어 자체가 일본학자들에 의해 변용된 단어가 대부분이라 동양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도덕경>의 큰 흐름을 잡을 때에도 유용한 책으로 느껴졌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3-16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신선한 📖 책입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3-16 19: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독서 되세요! ^^:)

라파엘 2022-03-16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석학적 전통 때문인지, 확실히 독일 출신 학자들이 서양인임에도 동양 경전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좋은 편이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2-03-16 21:03   좋아요 1 | URL
^^:) 라파엘님 말씀을 듣고 보니 학문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략적으로 말해서 고대 중국철학은 참인 것과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또는 거짓인 것)을 구별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서양의 그리스철학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중국철학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질서(治)와 혼란(亂)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컸으며, 특히 혼란이 아닌 질서를 세우는 방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노자』에서 내가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측면은 이 텍스트가 인간적 행위주체성human agency에 도전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측면이기도 하다. 주체성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의 전통은 자아ego와 그 자아의 힘들에 너무 집중해왔다. 이런 전통에서 『노자』의 입장은 다소 거북스러운 것으로 감지될지도 모른다. 『노자』의 격률인 "행위하지 않음(無爲)"은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를 개별적 활동들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또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생산적autopoietic" 대안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노자』는 더 이상 그것이 생겨난 원래의 문화적 맥락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지금의 『노자』는 예전 어느 한 지역에서 생생하게 통용되었던 의미론 ─ 의미의 네트워크 ─ 이 화석화되어 나타난 변형물의 일종이며, 그 지역은 소위 "서양 문명"의 전신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던 곳이다. 『노자』에 담긴 의미가 엮어내는 의미론적 네트워크는 한때는 (살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추정상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타당성을 가졌고 숭배되었지만, 지금은 모호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많은 독자에게 어둡고 불가해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놀랍게도 『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터넷의 소위 하이퍼텍스트hypertext 같은 비전통적이고 비선형적인 텍스트들에 견주는 것이 더 용이할 수도 있다.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역시 한 명의 명확한 저자가 결여되어 있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특정한 한 가지 사안만을 다루지도 않는다.

요약하자면 『노자』에서 만나게 되는 이미지들은 많은 경우 (영속적이라든가 생산적이라든가 하는) 어떤 특성들을 가진 (텅 비어 있음/가득 차 있음, 낮음/높음 같은) 구조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들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그 이미지들은 전략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효력을 얻는 것에 대한 교수 모형이다.

『노자』에서 "네트워킹"은 언어학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장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메타포들을 사용함으로써, 또 유사한 모토들을 약간의 변주를 통해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동일한 일군의 어휘들을 응용함으로써 다른 장들과 연결되고 있다.

『노자』를 면밀히 살펴보면 볼수록 이 책은 수사학적 연결 고리들의 끝없는 연쇄이자 서로 연관된 격언들의 네트워크이며 서로 연상되는 이미지들과 교훈들의 모음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링크들을 따라가면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그 텍스트가 지닌 모호함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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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는 마땅히 그들과 정사(政事)를 모의하고, 사대부를 진퇴시키며, 위엄과 복(福)을 갖게 하여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돌아 볼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혹 죄를 졌는데 적다면 그에게 형벌을 내리고, 크다면 그를 주살하며 관대하게 용서를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였다면 비록 그들에게 전횡하라고 시키더라도 어느 누가 감히 하겠습니까! 어찌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을 살피지 않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지 않으며, 풀을 깎고 날짐승을 사로잡듯이 한다면 난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환관이 권력을 사용하여 국가의 근심이 되었던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대개 궁금(宮禁)을 출입하기 때문에 군주는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그들과 친근하고 익숙해져서 삼공육경(三公六卿)처럼 들어가 알현하는 것이 때를 맞추거나 삼엄하여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한(東漢)이 쇠약하면서 환관들이 교만하고 전횡을 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그러나 모두 군주의 권력을 빌렸고, 의지한 것은 성사(城社)였으니 천하를 혼탁하고 어지럽게 하였지만, 아직은 천자를 협박하고 위협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를 통제하는 것과 같이 하면서 폐위시키거나 남아 있게 하는 것을 손 안에 두고 동쪽에 두던 서쪽에 두던 그들의 속마음에서 나오게 하고, 천자로 하여금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호랑이와 이리를 타거나 뱀과 살모사를 잡고 있는 것 같던 당 시대와 같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대(漢代)에는 병권을 장악하지 않았으나, 당대(唐代)에는 병권을 장악하였었던 연고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법을 바꾸는 것은 사람을 양성하는 것만 못한 것인데, 바꾸는 것이 어찌 옛날의 관행만 하겠습니까! 한건(韓建)이 축척한 재물은 무수하였으나 먼저 주온(朱溫)을 섬기게 되었고, 왕가(王珂)가 법을 바꾼 것은 마(麻, 삼실)와 같았지만 하루아침에 적(賊)에게 항복하였으며, 중산성(中山城, 하북성 정주시)은 험준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채상(蔡上, 하남성 여남현)의 군사들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앞의 사례들은 아주 명확한 것들이어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또 패업을 이룬 나라 가운데에는 빈곤한 군주는 없고 강력한 장수에게는 나약한 병사는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덕을 숭상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사치를 없애고 요역을 감소시키며, 험한 곳을 설치하여 변경을 굳건히 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농사에 힘쓰십시오.

난을 평정한 사람은 무신으로 가려 뽑고, 정치를 통제하는 사람은 문리(文吏)로 가려 뽑으며, 돈과 곡물은 명부에 기록함이 있고, 형벌을 주는 것은 법률이 있게 하십시오. 주살하는 것과 상을 내리는 것을 나에게서부터 나오게 한다면 아래에서 위엄과 복을 주는 폐단이 없게 되며, 가까이하고 친밀한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바르다면 사람들은 헐뜯거나 비난하는 걱정은 없게 될 것입니다.

밖으로 원흉(元兇)을 쳐부수고, 안으로 나태한 습속을 제거하면, 명성은 오패(五覇)보다 높게 되고 도(道)는 팔원(八元)보다 으뜸갈 것입니다. 여염을 계산하는데 있어서는 간가(間架)를 정하고, 국얼(麴蘖)을 늘리며, 논과 밭을 조사하고, 국가를 열고 봉국(封國)을 건립하는 것은 아마도 아직은 절실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존욱이 말씀을 올려 말하였다. "사물이 극(極)에 달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게 되며, 사악함이 극에 달하지 않으면 멸망하지 않게 됩니다. 주씨(朱氏)가 그의 속임수와 힘을 믿고 흉악함을 다하고 사납기가 극에 달하여 사방의 이웃을 삼켜 없애버리니, 사람들은 원망하고 신(神)은 화가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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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치러진 19대 대통령선거를 이전 선거와 대조해보자.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차이가 ‘샛강’이라면, 노무현 후보와 저 권영길의 차이는 ‘한강’입니다"라고 열변을 토했고, 민주당 편에서는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것은 사표라고 노골적으로 선전했다. 또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 때는 이명박 후보의 당선도 정상적인 정권교체이며 그의 당선이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민주당에 의한 ‘두려움의 동원’일 뿐이며, 남북관계는 보수 후보가 당선되어도 후퇴할 일이 없다고 말했던 많은 진보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민주당의 몰락을 진보정당 약진의 기회로 생각했다. 하지만 2017년 대선에서 정의당과 더불어민주당 사이에는 상호 존중이 이루어졌고 갈등과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최소화되었다. 두 당은 동반상승을 시도했고 그것만이 가능한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국민국가 문제를 다룬 저서에서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을 두고 "종족이라는 면에서 거의 또는 완전히 동질적인 인구로 구성된 역사적 국가의 극히 희귀한 사례"1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중·일 가운데서도 이런 동질성이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한반도 주민이 국민국가를 형성하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종족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우리가 70여년 동안 반으로 갈라져 통상적인 국민국가와는 전연 다른 국가 형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례는 국민국가에 대한 모든 논의를 한계까지 몰아간다고 할 수 있다.

시가 의미를 혁신한다면, 개념은 이런 의미를 응축하고 총괄한다. 예컨대 헤겔(G. Hegel)의 ‘인정투쟁’, 맑스(K. Marx)의 ‘잉여가치’, 뒤르켐(E. Durkheim)의 ‘연대’, 베버(M. Weber)의 ‘카리스마’ 같은 개념은 수많은 의미를 불러 모아 응축하고 있으며 사유를 새롭게 전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성된 새로운 의미를 다시 총괄할 수 있는 거점이 된다. 의미의 장을 형성하는 힘을 가진 말, 그것이 개념인 것이다.

요컨대 분단체제론이 구성하는 개념적 단위들인 근대성?세계체제?(동아시아)?분단체제?남북한 사회 등의 연계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이론적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분단체제론으로서는 이런 연계를 더 이론적으로 충실하게 해야 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더 개방적으로 다양한 이론과 논쟁하고 교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논쟁의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분단체제론은 분단이 한반도 주민의 삶에 가한 근본적 제약에 주목해왔다. 이 제약은 지정학적이거나 지경학적인 제약처럼 객관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주관성 안으로 범람해 들어온다. 그렇게 해서 주관화된 제약은 우리의 선호체계에도 관철된다. 이렇게 사회의 구조적 제약의 영향 아래에서 선호가 그것에 맞추어 변경된 경우를 "적응적 선호"(adaptational preference)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분단체제론은 해방 후 한반도에 수립된 두개의 국가인 한국과 북조선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회는 분단체제의 하위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위체제인 분단체제와 하위체제인 한국사회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상위체제가 하위체제에 대해 갖는 결정력은 하위체제가 상위체제에 대해 갖는 결정력보다 큰 법이다. 하지만 상위체제의 결정이 하위체제의 구체적 형태를 세세하게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상위체제는 하위체제의 가능한 형태와 불가능한 형태의 경계를 확정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한정(limitation)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87년체제론이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체제 재편이든, 민주주의의 위기이든, 6·15공동선언 이후 형성된 분단체제의 형태 변화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든, 이런 상황을 체계적으로 조망할 능력을 입증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87년체제의 궤적을 스케치해보고자 한다. 불가피하게 축약적일 이 논의가 자임한 과제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면한 문제들, 특히 2007년 봄 내내 진행된 ‘진보논쟁’에서 드러난 몇가지 편향에 대해 비판적 논평을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촛불항쟁과 관련해서는 특히 정보통신기술의 활용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뒤에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촛불항쟁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거의 일체화되다시피 하는 항쟁에서는 특정 집단의 동원 맥락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것이 정보통신기술의 활용능력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정보통신기술 활용, 예컨대 휴대전화나 인터넷의 활용은 양적으로 남성에게 별로 뒤지지 않을뿐더러 질적으로는 더 농밀하다. 남성들은 정보통신매체에 도구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성들은 그것을 친밀성의 소통매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예로 든다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동호회 활동에 훨씬 열심히 참여할 뿐 아니라 더 내밀하게 교류한다. 촛불항쟁을 통해서 ‘82cook’이나 ‘소울드레서’ 같은 여성 중심의 인터넷 동호회들이 보인 정치적 활동성은 단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이 먹을거리라는 좀더 여성적 의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보여준 것은 축적된 문화적 능력, 즉 긴밀하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능력이 정치적 자기계몽과 결합할 때 어느 정도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87년체제를 통해서 개혁진영은 보수적 헤게모니에 굴복하여 ‘극복 없는 적응’에 경사될 때가 많았고, 진보진영은 ‘적응 없는 극복’을 외쳤을 뿐이다. 그 결과 대중을 극복 없는 적응의 길로 내몰았다. 이 궁지에서 벗어나 극복/적응의 이중과제를 구현하는 제도적 비전을 마련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대중이 모순적이고 갈등적인 이 체제와 그 체제의 환경에서 적응하면서 극복하는 길, 극복을 성취하는 적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촛불항쟁은 지금 그렇듯이 87년체제의 보수적 재편에 제동을 거는 것에서 더 나아가, 87년체제를 민주적으로 재편함으로써 긴 교착의 상태를 끝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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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흔들리는 분단체제
백낙청 지음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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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라는 낱말이 한갓 수사를 넘어 개념의 수준에 이를 때 비로소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라는 표현은 -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운동' 이라는 동어반복과는 달리 - 구체적인 내용을 갖게 된다.(p11)... 세 가지 의미의 '체제'를 동일선상에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일견 복잡성을 더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혼란을 제거하는 데 이바지 한다. 곧, 세계체제와 그 속의 분단체제 그리고 후자를 구성하는 두 분단국가의 '체제'는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하면서 구체적인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4/172

일국 사회 역시 사회분석의 기본단위일 수는 없고 '세계체제'의 하위체제(sub system)에 해당한다는 것이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등의 세계체제분석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시각인데, 그렇다고 이것이 일국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근대세계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하나의 토대를 지닌 사회이면서 많은 수의 일국사회들이 모인 열국체제를 상부구조로 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경제적 실체로서의 계급은 엄밀히 말해 세계체제 전체 차원에서 규정되지만, 그 자기형성과정이나 정치투쟁의 전개는 일국사회 차원의 고려를 떠나서는 무의미해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급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단순해질 수 없는데, 단지 그 점이 한반도처럼 분단체제라는 특이한 중간항이 끼여들었을 때에 더욱 도드라질 따름인 것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25/172

분단체제라고 할 때는 그 대랍항을 분단되어 있는 남과 북으로 잡기보다는 남과 북의 수구세력이 극과 극으로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교묘한 공생관계에 있는 그러한 체제와, 그 공생관계에서 소외되고 그로부터 고통을 받는 남북한의 다수 민중, 이 둘이 대립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견해입니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94/172

저자는 분단체제를 '세계체제-분단체제-남북 내 체제'의 구조 속에서 이해한다. 세계체제의 흐름이 90년대 이후 '자본주의(資本主義)' 일방으로 흐르는 반면, 분단체제의 흐름은 남북 수구 세력의 현실고착화 움직임으로 유지되고, 각 체제 내부에서는 생태, 계급, 민족, 여성 문제 등의 다양한 사회문제가 대두되는 상호연결적 관계. 저자는 분단 문제를 단순한 남북의 대립 구조 안에서 파악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각기 완결된 체제가 못 되는 이유가 이처럼 단순히 세계체제의 하위범주라서만이 아니고, 분단이 되지 않은 국가들과는 달리 남북한이라는 두 개의 하위체제의 경우에는 그들이 세계체제에 참여하고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그 내부에 작동하는 방식이 일정하게 구조화된 분단현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단체제'라는 또 하나의 체제 개념이 끼여들 수밖에 없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5/172

'운동'이라는 말은 일상성과의 미묘한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무언가 일상성의 틀에서 벗어난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이 운동이면서, 다른 한편 그 노력이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고 그야말로 하나의 운동으로 지속되자면 일상생활 속에 자리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1/172

이처럼 분단의 문제를 체제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힘들이 충돌로 해석한다면, 이것을 화해로 이끄는 과정은 단순한 방적식이 아닌 복잡한 방정식의 형태를 띨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보다 안정적인 세계경제상황 아래에서 남북 양측의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지속가능한 복지사회가 사회적, 인류적 차원에서 합의된다라면 각 체제의 모든 변수(變數)를 만족시킬 해(解)가 되겠지만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해찾기 방법은 '시행착오법 trial and error'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분단체제극복의 과정에서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남북 정권이 각기 얼마만큼 장애가 되고 얼마만큼의 이바지를 할 수 있을지는 민중의 입장에서 판별하여 대응할 일인바, '민중의 입장'이라는 것 자체가 남북 민중들의 때로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포괄하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는 만큼 남북의 정권 및 정부에의 대응도 다원고차방정식(多元高次方程式)의 일부로 지혜롭게 풀어가야 할 것이다. 이 다원방정식에는 당연히 분단체제의 상위체제인 세계체제의 작동이 반영되어야 하고, 특히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을 중요한 변수로 대입해야 한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7/172

남북민중의 일차적 과제는 남북 각각의 현장에서 벌이는 독자적인 현실개혁운동 겸 분단체제변혁운동이다. 또한 분단체제가 스스로 완결된 체제가 아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하위체제 가운데 하나이므로 남북 민중이 연대한 이 운동은 곧바로 세계적 차원의 현실개혁운동이며, 현존 세계체제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세계 민중의 욕구를 실현할 수 없을뿐더러 생태계파괴를 통한 인류공멸의 운명을 재촉하는 체제임을 인식하는 모든 사람들과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가능케 하며 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65/172

모든 조건이 충족된 최선(最善)의 해를 찾는 대신, 분단과 맞닿아 있는 모든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개선을 이루어가면서, 그때마다 상황에 맞는 해를 찾아가는 방식. 이 방식이 저자가 말하는 '변혁적 중도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책 자체는 1998년에 출간된 오래된 책이다. 그렇지만, 책이 담고 있는 내용 - 분단을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차원에서 파악하지 않고, 1953년 판문점 체제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다 영속적인 체제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이해집단들의 견제와 균형이 만들어 낸 세계체제의 일부로 파악 - 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분단이라는 상황과 사회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상황을 인식해야 할 것인가.

불안정성 또한 하나의 운동으로 인식하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이전 과는 다른 해법을 우리는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통일 이전에 분단체제의 문제를 풀기 위한 준비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지난 20대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사회적 갈등을 단순히 위기상황으로 보는 대신 오히려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시행착오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잘못된 풀이가 훗날 해찾는 묘수가 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중요한 것은 물론 통일 한반도의 모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점이다. 우리가 당장에 선택할 방어적 전략의 내용도 여기에 좌우될 것이다. 그런데 분단체제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한 하위체제요 세계체제의 수명은 이 하위체제보다 길 것이라는 전망이 정확하다면, 분단체제가 극복된다 해서 우리가 곧바로 시장경제의 논리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48/172

'정신'으로 근본을 삼자는 정산의 주장을 단지 종교인의 '거룩한 말씀'으로 치부하기는 어렵겠다. 물론 사람마다 수양이 완벽해진 후에야 통일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면 이는 통일이건 건국이건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절대적인 선후관계가 아니라 일의 본말로서 어느정도의 정신자세 확립이 근본이 된다는 주장이라면 이는 얼마든지 용납할 만한 주장이며, 그 실제 내용이 얼마나 사리에 맞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p146)... 다수 민중의 수준높은 정신수양이 갖춰지기 전에 강압적으로 물질적 평등부터 구현하고 보자는 '현실사회주의식'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는 바로 평등사상의 그러한 '진실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 결과라는 해석이 오늘날 적지 않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_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 p149/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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