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략적으로 말해서 고대 중국철학은 참인 것과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또는 거짓인 것)을 구별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서양의 그리스철학자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중국철학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보다는 질서(治)와 혼란(亂)을 구별하는 데 관심이 컸으며, 특히 혼란이 아닌 질서를 세우는 방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노자』에서 내가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측면은 이 텍스트가 인간적 행위주체성human agency에 도전한다는 점이다. 이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측면이기도 하다. 주체성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의 전통은 자아ego와 그 자아의 힘들에 너무 집중해왔다. 이런 전통에서 『노자』의 입장은 다소 거북스러운 것으로 감지될지도 모른다. 『노자』의 격률인 "행위하지 않음(無爲)"은 인간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를 개별적 활동들에 기초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또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생산적autopoietic" 대안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노자』는 더 이상 그것이 생겨난 원래의 문화적 맥락 속에 놓여 있지 않다. 지금의 『노자』는 예전 어느 한 지역에서 생생하게 통용되었던 의미론 ─ 의미의 네트워크 ─ 이 화석화되어 나타난 변형물의 일종이며, 그 지역은 소위 "서양 문명"의 전신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던 곳이다. 『노자』에 담긴 의미가 엮어내는 의미론적 네트워크는 한때는 (살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추정상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타당성을 가졌고 숭배되었지만, 지금은 모호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많은 독자에게 어둡고 불가해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놀랍게도 『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터넷의 소위 하이퍼텍스트hypertext 같은 비전통적이고 비선형적인 텍스트들에 견주는 것이 더 용이할 수도 있다.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역시 한 명의 명확한 저자가 결여되어 있고 시작과 끝이 없으며 특정한 한 가지 사안만을 다루지도 않는다.

요약하자면 『노자』에서 만나게 되는 이미지들은 많은 경우 (영속적이라든가 생산적이라든가 하는) 어떤 특성들을 가진 (텅 비어 있음/가득 차 있음, 낮음/높음 같은) 구조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들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그 이미지들은 전략들을 설명해주는 실례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효력을 얻는 것에 대한 교수 모형이다.

『노자』에서 "네트워킹"은 언어학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장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메타포들을 사용함으로써, 또 유사한 모토들을 약간의 변주를 통해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동일한 일군의 어휘들을 응용함으로써 다른 장들과 연결되고 있다.

『노자』를 면밀히 살펴보면 볼수록 이 책은 수사학적 연결 고리들의 끝없는 연쇄이자 서로 연관된 격언들의 네트워크이며 서로 연상되는 이미지들과 교훈들의 모음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링크들을 따라가면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그 텍스트가 지닌 모호함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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