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 Korea’s president-elect starts with an unpopular personal project

Yoon Suk-yeol wants to move the presidential office. Citizens would rather he focus on the economy


 한국 대통령 당선자, 인기없는 개인 프로젝트 시작. 윤석열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고 싶어하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이 경제에 집중하길 원한다


 The Economist의 이번주(2022.3.16)에는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과 관련한 기사를 위와 같은 제목으로 내보냈다. 기사의 상세내용은 원주민인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니 별도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사의 마지막에 담긴 The Economist의 관점은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세계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시선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져 옮겨본다.  


With his popularity already at a historic low for an incoming president, Mr Yoon may find that his attempt to bring the people closer actually drives them farther away.

 윤 대통령 당선자는 차기 대통령 지지도가  이미 기록적으로 낮은  현상황에서, 국민들과 가까워지려는 그의 노력이 실제로는 그들을 더 멀리 쫒아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안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 보도와 함께 냉정한 평가는 언론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가 현재 우리의 언론에는 없기에,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제를 바라볼 때마저 외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에 서 있음도 함께 깨닫게 된다. 179년 전통의 <The Economist>와 한국 중앙일보에서 발간하는 <이코노미스트>. 각각의 발음은 큰 차이없지만, <이코노미스트>가 표제에서 던진 '윤석열 시대 개막, 살림살이 좀 나아질까'에 대한 답(答)을 <The Economist>의 소기사 제목에서 발견하면서 현재 시점에서 결코 넘을 수 없는 언론권위의 차이를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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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3-27 22: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귤이 회하를 건너면 낑깡이 된다는
말을 J일보에서 만드는 이름만 비
슷한 잡지에서 그대로 보여주네요.

이름이 아깝네요.

겨울호랑이 2022-03-27 22:28   좋아요 6 | URL
<이코노미스트>를 <The Economist>의 번역본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꽤 많더군요... 차라리 기사를 그대로 번역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얄라알라 2022-03-28 11: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둥지를 틀지 않은 다른 많은 분들도 겨울 호랑이님 글 구독할 채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28 11:27   좋아요 2 | URL
에고 제겐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제 이웃분들께서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글에 비해 넘치는 걸요... 얄라얄라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갱지 2022-03-28 14: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그나마 국민들 마음을(영어로라도) 알아주는 데가 있어 좀 위로가 되는 듯은 한데, 낯은 뜨겁네요.

겨울호랑이 2022-03-28 14:56   좋아요 2 | URL
네... 더 큰 문제는 아직 임기 시작도 전이라는 점이겠지요...

초란공 2022-03-28 18: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두 잡지가 같은 것이 아니었군요^^;; 다음 정부 수장이 다시 청와대로 오려면 또 다 뜯어 고치고 이동하고 이중으로 문제가 보입니다. 단순히 ‘재배치‘라고 말하는 인간이 있다는게 놀랍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장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이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몸풀기 수준인가 싶기도 하구요... 상당히 두렵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28 18:50   좋아요 3 | URL
사안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언론사(또는 사주)의 배경에 따라 어느 부분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 언론의 논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 상황과 중대성, 긴급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어느 것도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 ‘용산 이전‘ 문제는 답답하게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에 힘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정말 소중한 우리의 가치가 무속과 돈문제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5년이라는 시간동안 보존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함께 가져봅니다...^^:)

초란공 2022-03-28 19:04   좋아요 3 | URL
대통령 후보 경선할 때였던가요... 당사자의 입에서 자신있게 ‘밀턴 프리드만‘이란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식겁하기 시작했던 것 같네요. 여기에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당대표까지... 종합세트지요. 그래도 희망을...!!

겨울호랑이 2022-03-28 19:12   좋아요 3 | URL
그렇지요... 단순히 밀턴 프리드먼의 사상을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기를 고민하기 보다 자신이 뱉어놓은 말을 덮기 위한 인용구로 유명학자의 사상 일부를 가져다 쓴 것에 대해 저 또한 걱정하게 됩니다... 사실, 당선자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 모호했을 때 걱정하고 우려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그저 로또에 당첨된 졸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네요...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점진적·단계적 통일과정의 진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너무 급속하고 전면적인 통일을 추구해도 평화에 위협이 되지만, 통일을 제쳐두고 평화만을 이야기한다고 평화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지담론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평화담론과 결합할 필요성은 많은 이들이 인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재정조달을 위해 상당한 수준의 국방비 감축이 필요하리라는 계산에 멈추어서는 불충분하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이를 빌미로 수구세력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복지확대를 위한 정치적 동력이 생기기 어렵다는 사실에까지 미쳐야 하는 것이다.

남북이 함께하는 2013년체제라면 당연히 6·15공동선언과 더불어 9·19공동성명도 복원된 상태를 뜻할 것인바, 이는 경제적 상호의존과 교류·협력이 꾸준히 증대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역협력을 한층 긴밀하고 원활하게 만들 것이다.

눈앞의 과제로는 원전의 안전성 문제가 있다. 이는 기술적인 능력뿐 아니라 관계기관의 신뢰성과 책임성 그리고 정보의 투명한 공개 등 민주주의 및 공정·공평 원칙과 직결된 문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평화의제와의 연결이 각별한데, 북과의 대결 추구가 어느 모로 보나 위험천만이지만 좁은 땅에 그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지어놓고 군사력이 좀 앞섰다고 일전불사를 외쳐대는 이들의 무모함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런 것이 제대로 문제삼아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정부가 ‘배 째라’고 버티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이 땅의 자칭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원칙있는 보수주의자가 드문 것이 또 하나의 이유지만, 국민들이 아무튼 북측 체제가 나쁜 체제고 북측 당국이 우리 정부보다 훨씬 나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인식 자체가 타당하다고 해도 남녘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이 북측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런 엉터리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에게 향상은 없다.

분단체제는 남북이 서로 적대적이고 단절된 사회이면서도 동일한 ‘체제’라고 말할 만큼 쌍방 기득권세력이 공생관계에 있고 양쪽이 나쁜 점을 서로 닮아가며 재생산되는 구조다. 동시에 엄밀한 의미의 사회체제는 아니고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국지적 현실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애당초 남북분단을 주도한 현존 세계체제의 패권국을 포함해 수많은 외세가 개입해서 굴러가는 다소 느슨한 의미의 ‘체제’이다.
17

무엇보다 이렇게 나라가 온통 난장판인데도 우선 내 먹을 것 있고 내 집값이나 좀 올라주면 나머지는 알 바 없다거나, 이 나라에 대해 그렇게 말이 많을 거면 이북에 가서 살지 그러느냐고 하면서 지내다보면, 각자의 마음마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황폐한 심전(心田)에서 독재정치와 불공정사회가 자라나고, 자칫하면 짐승 대신에 인간이 대량 살처분되는 전쟁이 터지거나 대규모 재해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87년체제의 기본적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여러가지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민주화의 성취가 어디까지나 한반도 남녘에 국한된 성취였고 따라서 1953년 휴전 이후 굳어진 분단체제를 흔들기는 했을지언정 ‘53년체제’의 틀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존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것을 구성하는 국민국가들의 배타적이고 이론상 대등한 ‘주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패권국가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정부상태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중기적으로도 북의 급변사태를 방지하려는 중국의 의지와 능력에 큰 변동이 없을 터인데다, 지금은 내부적으로 비교적 질서정연한 승계작업이 진행되는 모양새이고, 중국뿐 아니라 미국, 러시아, 일본이 모두 행여나 순탄한 진행이 안될까봐 일제히 ‘안정 최우선’을 부르짖고 나오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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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주거양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의 아파트는 "사는 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 buying 것"(아파트 한국사회)이며,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로 사람들을 철저하게 서열화하는 무서운 괴물이다. 가파르게 고공행진 중인 아파트값은 또 어떻고. 집 한 간 얻느라 평생 빚더미 위에 사는 하우스푸어가 부지기수다. 결혼 적령기의 청춘들은 높은 집값 탓에 결혼을 포기할 정도고, 아파트가 주거문화를 획일적으로 만드는 한편 전통적 삶의 터전을 잃게 만들었고 도시 미관을 건조하게 했다는 비판은 오히려 순진하게 들릴 정도다. 국민 대부분이 아파트 때문에 이렇게 극심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정말 우리에게 단란하고 행복한 둥지를 제공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권위주의 국가는 인구성장을 관리하고 봉급생활자들이 경제발전에 헌신하도록 가격이 통제된 아파트를 대량 공급하려 했다. 그리하여 중간계급을 대단위 아파트로 결집시키고, 이들에게 주택 소유와 자산 소득 증가라는 혜택을 주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호 혜택과 구조 때문에 한국의 도시 중산층과 중간계급 일반이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하층의 사회계층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아파트공화국>

단지로 들어오는 도로와 단지 내부를 잇는 도로, 주차장, 관리사무소, 조경시설, 수해방지시설, 안내표지판과 보안등, 통신시설과 가스공급시설 뿐만 아니라 비상급수시설과 난방설비, 전기설비와 소방설비, 공동 수신설비, 급배수설비 등(이상 부대시설)과 어린이놀이터, 근린생활시설, 유치원, 주민운동시설, 경로당, 주민공동시설, 보육시설과 문고 등(이상 복리시설)에 대한 설치기준이 법률로 정해져 있고, 모두 입주자 부담이다. 법률이라는 절대적 공권력은 입주자의 부담으로 기반시설을 확보할 것을 강제한다. _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단지 만들기 전략은 지역 불균형을 초래한다. 단지 만들기린 결국 공공인프라 부족을 집단적인 사설 오이시스로 만회하는 시회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어느 오아시스가 넓고 안전한가, 어느 곳의 물이 풍부하고 그들이 많이 드리워져 있는가에 따라 좋고 나쁨이 가려지는 무리지음과 서열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_ <
아파트 :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내 집을 팔아치우지 않고 계속 갖고 있다면 집값이 오른다고 해서 내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명목상 재산이야 늘어나겠지만 영원히 현금화할 수 없는 재산일 뿐이다. 반면에 경제적 부담은 늘어난다. 우선 재산세가 늘어난다. 공시가격 기준으로 3억 원 하던 집이 4억 원으로 올랐다면 재산세는 24만원에서 42만 원으로 들어난다. 5억 원 하던 집이 6억 원으로 올랐다면 57만 원에서 81만 원으로 들어난다. 현금화할 수 없는 재산이 늘어나서 흐뭇한 기분 값으로 1년에 몇십만 원씩 더 내야 하는 것이다." _<아파트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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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으로 떠나는 명빈의 병든 몰골을 보면서 명희는 이들 세대의 종언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감옥에 유폐되었거나, 친일파로 전락되었거나 해외로 탈출했거나 혹은 낙향하여 숨어버렸거나 아니면 칼끝 같은 정세를 관망하며 불안하게 사업체를 붙들고 있거나, 어쨌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만 이들의 세대, 젊었던 한철 의기양양했으며 비분강개하고 3.1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이들의 세대, 무너지고 산산조각이 난 것을 명희는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것이었다.(p184)... 하기는 무위하게 보낸 세월이 임명빈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능했던 것도 어디 임명빈만의 몫이겠는가. 조선의 세월 그 자체가 무위했으며 무능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소리 지를 땅은 어디 있었으며 주장할 연단은 어디 있었으며 터전에다 말뚝 박고 줄 쳐서 내 것 만들 권리는 없었다. _ 박경리, <토지 18> , p185/672


 <토지> 독서챌린지 35주차. <토지 18>에서 명희는 오빠 명빈의 쇠약해진 모습에서 한 세대의 퇴장을 읽는다.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끝을 보고,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을 꿈꾸었던 세대. 그렇지만, 기대가 큰 만큼 좌절에 대한 실망도 컸기에 이들 세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음 10년을 살아갔다. 누군가는 독립투자로 누군가는 친일파로. 명희는 쇠약해진 오빠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세대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그녀가 본 것이 과연 세대의 모습이었을까.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명희가 명빈의 모습에서 발견한 좌절한 세대의 모습은 그 세대의 모습이 아니라, 좌절한 명희의 눈에 비춰진 한 세대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명희 개인의 경험 - 조용하와의 이혼과 용하의 죽음이라는 상황 - 이 좌절된 삶이었기에 그의 눈에 비친 세대의 종언은 사실 명희 자신의 삶 목적 상실은 아니었는지.


 '세대위치 Generationslagerung'는 '실제세대 Generationzusammenhang'와 동일하지 않다. 단순한 계급 지위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구성된 계급과 동일하지 못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실제세대는 단순한 세대위치보다 훨씬 더 많은 어떤 것을 뜻한다 _ 카를 만하임, <세대문제> , p93/254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은 <세대문제 Das Problem der Generationen>에서 '실제세대'와 '세대위치'를 구분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는 '실제세대'들은 여러 '세대단위'로 나뉘어지는데, 각 세대단위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경험(엔텔레키 Entelechie)을 가지고 그들만의 통일성을 갖게 된다. 최근 20대 대통령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가치관에 우선순위를 두고 투표에 임했고, 이를 성별, 연령별로 구조화시켜 분석한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연령별, 성별, 지역별 유권자의 투표성향이 어느 정도 경향성을 띄었다는 점에서 카를 만하임의 분석틀의 유효성을 확인하게 된다. 


 세대단위들은 다양한 개인들이 공통적인 사건들에 느슨하게 참여하기는 하지만, 주어진 사건 관계를 다르게 해석하며, 통일적인 반응, 즉 특정한 세대위치에서 결합한 개인들이 상술한 의미에서 형성했던 표현과 형상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동일한 실제 세대라는 범주 안의 양극에서 적대적으로 다투고 있는 다수의 세대단위들이 형성될 수 있다. 이들이 서로 다투면서도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여러 세대단위들은 하나의 

'실제세대'를 구성한다. _ 카를 만하임, <세대문제> , p103/254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사정권 시기, 1990년대 3저 호황과 IMF, 2000년대 초반 신용카드 위기와 글로벌 외환위기를 모두 경험한 세대와 부분적으로 경험한 세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으로 부터 얻어진 신념. 그것이 가치관이 되고 개인의 가치관이 집단의 시대정신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명희가 읽어낸 '세대의 종언'은 과연 있는 것일까. 


 새로운 청년세대가 사소한 변화를 새롭고 중요한 것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새로운 자극으로 무장한 더 많은 매개자들이 가장 나이 많은 세대의 가치체계와 가장 나이 어린 세대의 가치체계 사이에 슬며시 끼어들게 된다. 변동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생명적 반응의 기초 자산은 그 자체로 남아 있다. 청년세대와 나이 든 세대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 차이가 줄어드는 반면, 전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안정적인 시기에는 변화가 마찰 없이 행해진다. _ 카를 만하임, <세대문제> , p92/254


 유기체와 세포들. 유기체를 구성하는 수많은 세포들은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소멸되지만, 유기체 자체의 생명은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세대의 종언'은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다른 세대로 자연스럽게 대체되며 사라지기에 우리는 종언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자연스럽게 대체되는 것을 종언 또는 죽음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토지18>에서 또다른 죽음의 모습에서 세대의 종언을 발견한다. 바로 조준구의 죽음이다.


 몽치는 부릅뜬 조준구의 눈을 쓸어서 감겨주었다. 끔찍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능, 존재했던 육체의 마지막 한 오리 한 방울까지 훑어내고 짜내버린 종말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고 머리끝이 치솟는 것 같은 공포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생명에 대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호박덩이 같았던 두상은 쪼그라져서 조그맣게 돼 있었다. 몸도 줄어들어서 아주 작아져 있었다. 손가락은 모두 펴진 채, 그 다섯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었다. 삼 년을 넘게 병상에 있었는데 어쩌면 조준구의 마지막 일 년은 살아 있었다기보다 죽음을 살았는지 모른다. 죽은 후의 과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시신을 씻을 때 욕창으로 탈저(脫疽)된 부분이 문적문적 떨어져나왔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의를 입히고 갈고리같이 된 손가락을 펴고 두 팔을 가지런히 한 뒤 염포(殮布)로 묶고, 그러는 동안 몽치는 땀을 많이 흘렸다... 곡성은 마치 한 줄기 빛이 되어 시공을 뚫고 저 머나먼 저승의 나라, 명부(冥府)의 캄캄한 삼도천까지 울리어 가고 있는 듯 이상하고도 이상한 귀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8> , p212/562


  사실 <토지>에서 조준구는 이미 서희가 용정에서 진주로 내려온 <토지> 중반 이후부터 거의 죽은 인물과 다름 없었다. 평사리 집을 오천원에 넘기고 그 돈으로 재기에 성공한 조준구지만, 이와는 별개로 그는 이미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 잊혀진 악한의 생물학적인 죽음은 작품의 막바지인 <토지 18>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조준구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 이전에 평사리에서 떠난 시점에서 실제적으로 이뤄졌던 것은 아닐까. 조준구의 두 죽음 - 실제적인 죽음과 생물학적인 죽음 - 이야말로 한 세대의 종말을 잘 설명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를 통해 한 세대의 종언과 세대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세대 종언이 세대의 완전한 퇴장이 아닌 '자연스러운 물러남'이라면, 우리는 '청년-노년'의 단절적 구분 대신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대'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진 각각의 세대들이 만들어가는 한 시대. 시대를 구성하는 세대가 이질적이라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말한 '시대정신 Zeitgeist' 역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다르게 표상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상대성을 인정했을 때 세대갈등의 문제에 좀 더 유연한 자세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페이퍼의 마지막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 ~ 2003)의 <죽음의 선고>로 끝내려 한다. '죽음'을 소재로 한 다소 몽환적인 이 작품에서 '세대갈등'을 떠올린다면 다소 엉뚱할 수도 있겠다. '나'와 '그녀'의 부름과 다가옴이라는 사건에서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진 각 세대들의 절대세계가 하나의 사건을 통해 접점이 만들어는 과정이 연상된다. 이처럼 서로 다름을 확인한다면, 이러한 멀티 유니버스(Multiverse)에서 다양한 가치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이제 그것이 여기 있고 당신이 열어 보았고,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의 영원과 나의 영원을 위해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을 정면으로 보았다는 것! 그렇소, 알아요. 알아. 나는 벌써 알고 있었소." 나는 이 말들이나 다른 비슷한 말들이 그녀의 귀까지 도달하기는 하였는지, 어떤 정신으로 내가 그 말들을 그녀에게 듣게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마찬가지로 그 일들이 정말 그렇게 일어났는지를 아는 것도 무의미했다(p100)... 그리하여 이 너무 큰 힘,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이 우리를 어쩌면 한없는 불행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이 불행, 나는 그것을 기꺼이 짋어지고 무한히 그것을 즐기며, 그녀에게 나는 영원히 말한다. "이리 와." 그리고 영원히 그녀는 여기에 있다. _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p102


 <죽음의 선고>의 유일한 사건은 "이리 와"라는 부름과 그에 답하는 다가옴이다. 내가 그녀에게 "이리 와"라고 말하고 그녀가 다가오는 그 사건은 금기를 위반하게 반드는 열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두 절대적 세계의 만남이다... 경계와 한계 너머로 건너오라는 부름에 몸을 던져 무한한 움직임으로 답하는 만남의 사건은 모든 이야기의 유일한 사건이다. 블랑쇼는 만남이란 죽음을 건너야 하는 위험한 사건임을 상기시킨다.. _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 옮긴이 후기 -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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