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떠나는 명빈의 병든 몰골을 보면서 명희는 이들 세대의 종언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감옥에 유폐되었거나, 친일파로 전락되었거나 해외로 탈출했거나 혹은 낙향하여 숨어버렸거나 아니면 칼끝 같은 정세를 관망하며 불안하게 사업체를 붙들고 있거나, 어쨌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만 이들의 세대, 젊었던 한철 의기양양했으며 비분강개하고 3.1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이들의 세대, 무너지고 산산조각이 난 것을 명희는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것이었다.(p184)... 하기는 무위하게 보낸 세월이 임명빈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능했던 것도 어디 임명빈만의 몫이겠는가. 조선의 세월 그 자체가 무위했으며 무능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소리 지를 땅은 어디 있었으며 주장할 연단은 어디 있었으며 터전에다 말뚝 박고 줄 쳐서 내 것 만들 권리는 없었다. _ 박경리, <토지 18> , p185/672


 <토지> 독서챌린지 35주차. <토지 18>에서 명희는 오빠 명빈의 쇠약해진 모습에서 한 세대의 퇴장을 읽는다.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끝을 보고,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을 꿈꾸었던 세대. 그렇지만, 기대가 큰 만큼 좌절에 대한 실망도 컸기에 이들 세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음 10년을 살아갔다. 누군가는 독립투자로 누군가는 친일파로. 명희는 쇠약해진 오빠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세대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그녀가 본 것이 과연 세대의 모습이었을까.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명희가 명빈의 모습에서 발견한 좌절한 세대의 모습은 그 세대의 모습이 아니라, 좌절한 명희의 눈에 비춰진 한 세대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명희 개인의 경험 - 조용하와의 이혼과 용하의 죽음이라는 상황 - 이 좌절된 삶이었기에 그의 눈에 비친 세대의 종언은 사실 명희 자신의 삶 목적 상실은 아니었는지.


 '세대위치 Generationslagerung'는 '실제세대 Generationzusammenhang'와 동일하지 않다. 단순한 계급 지위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구성된 계급과 동일하지 못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실제세대는 단순한 세대위치보다 훨씬 더 많은 어떤 것을 뜻한다 _ 카를 만하임, <세대문제> , p93/254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은 <세대문제 Das Problem der Generationen>에서 '실제세대'와 '세대위치'를 구분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는 '실제세대'들은 여러 '세대단위'로 나뉘어지는데, 각 세대단위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경험(엔텔레키 Entelechie)을 가지고 그들만의 통일성을 갖게 된다. 최근 20대 대통령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가치관에 우선순위를 두고 투표에 임했고, 이를 성별, 연령별로 구조화시켜 분석한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연령별, 성별, 지역별 유권자의 투표성향이 어느 정도 경향성을 띄었다는 점에서 카를 만하임의 분석틀의 유효성을 확인하게 된다. 


 세대단위들은 다양한 개인들이 공통적인 사건들에 느슨하게 참여하기는 하지만, 주어진 사건 관계를 다르게 해석하며, 통일적인 반응, 즉 특정한 세대위치에서 결합한 개인들이 상술한 의미에서 형성했던 표현과 형상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동일한 실제 세대라는 범주 안의 양극에서 적대적으로 다투고 있는 다수의 세대단위들이 형성될 수 있다. 이들이 서로 다투면서도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여러 세대단위들은 하나의 

'실제세대'를 구성한다. _ 카를 만하임, <세대문제> , p103/254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사정권 시기, 1990년대 3저 호황과 IMF, 2000년대 초반 신용카드 위기와 글로벌 외환위기를 모두 경험한 세대와 부분적으로 경험한 세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으로 부터 얻어진 신념. 그것이 가치관이 되고 개인의 가치관이 집단의 시대정신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명희가 읽어낸 '세대의 종언'은 과연 있는 것일까. 


 새로운 청년세대가 사소한 변화를 새롭고 중요한 것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새로운 자극으로 무장한 더 많은 매개자들이 가장 나이 많은 세대의 가치체계와 가장 나이 어린 세대의 가치체계 사이에 슬며시 끼어들게 된다. 변동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생명적 반응의 기초 자산은 그 자체로 남아 있다. 청년세대와 나이 든 세대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 차이가 줄어드는 반면, 전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안정적인 시기에는 변화가 마찰 없이 행해진다. _ 카를 만하임, <세대문제> , p92/254


 유기체와 세포들. 유기체를 구성하는 수많은 세포들은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소멸되지만, 유기체 자체의 생명은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세대의 종언'은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다른 세대로 자연스럽게 대체되며 사라지기에 우리는 종언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자연스럽게 대체되는 것을 종언 또는 죽음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토지18>에서 또다른 죽음의 모습에서 세대의 종언을 발견한다. 바로 조준구의 죽음이다.


 몽치는 부릅뜬 조준구의 눈을 쓸어서 감겨주었다. 끔찍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능, 존재했던 육체의 마지막 한 오리 한 방울까지 훑어내고 짜내버린 종말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고 머리끝이 치솟는 것 같은 공포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생명에 대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호박덩이 같았던 두상은 쪼그라져서 조그맣게 돼 있었다. 몸도 줄어들어서 아주 작아져 있었다. 손가락은 모두 펴진 채, 그 다섯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었다. 삼 년을 넘게 병상에 있었는데 어쩌면 조준구의 마지막 일 년은 살아 있었다기보다 죽음을 살았는지 모른다. 죽은 후의 과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시신을 씻을 때 욕창으로 탈저(脫疽)된 부분이 문적문적 떨어져나왔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의를 입히고 갈고리같이 된 손가락을 펴고 두 팔을 가지런히 한 뒤 염포(殮布)로 묶고, 그러는 동안 몽치는 땀을 많이 흘렸다... 곡성은 마치 한 줄기 빛이 되어 시공을 뚫고 저 머나먼 저승의 나라, 명부(冥府)의 캄캄한 삼도천까지 울리어 가고 있는 듯 이상하고도 이상한 귀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8> , p212/562


  사실 <토지>에서 조준구는 이미 서희가 용정에서 진주로 내려온 <토지> 중반 이후부터 거의 죽은 인물과 다름 없었다. 평사리 집을 오천원에 넘기고 그 돈으로 재기에 성공한 조준구지만, 이와는 별개로 그는 이미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 잊혀진 악한의 생물학적인 죽음은 작품의 막바지인 <토지 18>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데, 조준구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 이전에 평사리에서 떠난 시점에서 실제적으로 이뤄졌던 것은 아닐까. 조준구의 두 죽음 - 실제적인 죽음과 생물학적인 죽음 - 이야말로 한 세대의 종말을 잘 설명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를 통해 한 세대의 종언과 세대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세대 종언이 세대의 완전한 퇴장이 아닌 '자연스러운 물러남'이라면, 우리는 '청년-노년'의 단절적 구분 대신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대'로 시선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진 각각의 세대들이 만들어가는 한 시대. 시대를 구성하는 세대가 이질적이라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말한 '시대정신 Zeitgeist' 역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다르게 표상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상대성을 인정했을 때 세대갈등의 문제에 좀 더 유연한 자세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페이퍼의 마지막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 ~ 2003)의 <죽음의 선고>로 끝내려 한다. '죽음'을 소재로 한 다소 몽환적인 이 작품에서 '세대갈등'을 떠올린다면 다소 엉뚱할 수도 있겠다. '나'와 '그녀'의 부름과 다가옴이라는 사건에서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경험으로 만들어진 각 세대들의 절대세계가 하나의 사건을 통해 접점이 만들어는 과정이 연상된다. 이처럼 서로 다름을 확인한다면, 이러한 멀티 유니버스(Multiverse)에서 다양한 가치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문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이제 그것이 여기 있고 당신이 열어 보았고,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의 영원과 나의 영원을 위해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을 정면으로 보았다는 것! 그렇소, 알아요. 알아. 나는 벌써 알고 있었소." 나는 이 말들이나 다른 비슷한 말들이 그녀의 귀까지 도달하기는 하였는지, 어떤 정신으로 내가 그 말들을 그녀에게 듣게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마찬가지로 그 일들이 정말 그렇게 일어났는지를 아는 것도 무의미했다(p100)... 그리하여 이 너무 큰 힘,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이 우리를 어쩌면 한없는 불행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이 불행, 나는 그것을 기꺼이 짋어지고 무한히 그것을 즐기며, 그녀에게 나는 영원히 말한다. "이리 와." 그리고 영원히 그녀는 여기에 있다. _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p102


 <죽음의 선고>의 유일한 사건은 "이리 와"라는 부름과 그에 답하는 다가옴이다. 내가 그녀에게 "이리 와"라고 말하고 그녀가 다가오는 그 사건은 금기를 위반하게 반드는 열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두 절대적 세계의 만남이다... 경계와 한계 너머로 건너오라는 부름에 몸을 던져 무한한 움직임으로 답하는 만남의 사건은 모든 이야기의 유일한 사건이다. 블랑쇼는 만남이란 죽음을 건너야 하는 위험한 사건임을 상기시킨다.. _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 옮긴이 후기 -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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