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신장의 발전을 촉진한 최초의 중앙 지도자는 사실상 장쩌민이나 덩샤오핑, 마오쩌둥도 아닌 건륭제였다. 18세기 중반 그는 황제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서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의 대부분을 토착 지배자들의 자치적인 지배 아래에 있는 완충 지대로 남겨 두기보다는 이 지역을 개발하여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이같은 (강희제와 관료들, 지식인 계층간의) 논쟁은 19세기와 20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중국 내지에 기반을 둔 정권들은 신장의 불안, 신장의 국경에 대한 외국의 침입,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난 압박감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이 지역을 통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딜레마를 늘 고민했기 때문이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414


 제임스 A. 밀워드 (James A. Millward)의 <신장의 역사 Eurasian Crossroads: A History of Xinjiang>은 고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신장(新疆) 지역사를 다룬 책으로 신장의 현대사에 특히 무게를 두었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현재 중국의 일부면서 동시에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 문제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는 신장 지역의 역사에서 오늘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밀워드는 본문에서 오늘날 신장 지역에 대한 중국정부 정책의 기원을 청(淸)으로부터 찾는다.


 청(淸)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는 준가르 복속 이후 이 지역을 결코 방치하지 않았다. 대신, 이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경제적 투자와 유교문화권 편입 노력이 행해지면서 '이슬람 유목 제국'이었던 신장 지역은 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듯 강희제 이후 청조의 노력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지역이 청 제국 내 편입되면서 눈에 띄게 경제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장 내 청의 통치 체제는 다양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현지인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인도 통치 및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통치 체제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예외를 제외하면 신장의 군정과 벡 체제 및 다른 행정 체제는 결코 절대적으로 공정하다거나 문명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발전이 지역의 반란을 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 지역은 불붙기 직전의 마른 장작과 같은 위태로운 상태가 된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166


 <신장의 역사>에서 저자는 청 제국의 주요 정책이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책으로 계승되었음을 말한다. 제국주의(Imperialism)의 주변부가 아닌 제국(Empire)의 일부로서 신장을 바라보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다면, 그것은 이들 지역을 제국의 일부로 묶어주었던 사슬이 붕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책은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건륭제와 그 이후 청 황제들의 정책과 동일하다. 즉, 동부 지방의 인구 압력을 완화하고 변경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신장에 중국인들을 정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재정착 혹은 식민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중국의 변경 정책에서 오래된 기원을 갖는 군둔(軍屯)이었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356


 1990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신장의 상황을 다시 평가하고 신장과 중국의 다른 지역 및 세계와의 통합을 재촉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91년 소련의 해체였는데, 이로 인해 19세기 이래 신장에 대한 중국의 통치를 위협하던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거대한 경쟁자가 제거되었다. 동시에 계속된 중국과 미국의 긴장은 신장과 중앙아시아의 석유/천연가스 매장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였다. 신흥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등장과 1980년대 이래 시작된 시장 사회주의에 대한 중국의 실험으로 인해 촉발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은 위구르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주었다. 반면 1980년대 중국 전역에 걸쳐 상대적으로 국가의 통제가 이완되고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신장에서는 무슬림 민족 집단, 특히 위구르 족이 주도하는 시위와 소요가 늘어나고 심지어 무장 저항도 발생했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403


 이러한 판단은 고대 유목제국인 흉노(Huns)와 농경제국인 한(漢)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뒷받침 될 수 있다. 유목 세력의 남하가 경제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면, 농경 세력의 북침은 안보 요인때문이었다. 만약, 자연환경이 척박한 신장 지역사람들에게 경제적 이익이 보장될 수 있고, 황하 지역의 한인들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다면 이들은 공생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조공(朝貢)관계가 성립된 배경이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흉노 투쟁의 기초가 되었던 두 가지 원동력이다. 우선 몽골과 중가리아에 있는 유목 세력은 식량과 세입을 위해 타림 분지와 투루판 분지를 이용했다. 다음으로 중국에 기반을 둔 세력들은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유목 적대 세력의 자원 기반을 손상시켜 북중국을 침략할 역량을 감소시키기 위해 서쪽의 신장으로 군사 원정을 했다. 다시 말해 한의 '서역'으로의 팽창은 흉노와의 오랜 대립에서 기인한 것으로, 무역로나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열망이 아니라 안보에 대한 우려로부터 유발된 것이다. 이는 다시 확인하게 될 패턴이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68


 청나라 말기 이후 국민당 정부를 거쳐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할 때까지 이 지역에서는 티베트 지역에서와 같이 종교에 기반한 독립운동이나 구 소련지역에서의 독립국가들처럼 민족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신장 지역의 중앙정부에 대한 경제적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한, 이러한 높은 기대가 그들을 제국 내에 머무르게 했다면, 이러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의 배신감은 그만큼 커지지 않을까.


 20세기 신장에서의 권리 운동 또는 독립 운동은 '이슬람의 성전'이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개념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실패로 끝난 1933~1934년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선포는 온건한 이슬람식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적 목소리를 냈으나, 1940년대에 투르크족 자치 또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조직한 주된 세력은 친소적이고 세속적이었다. 1950년대에 신장의 이슬람 기구들은 공개적인 저항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중국 공산당에 의한 재산의 국유화와 감독을 받아들였다. 반지방 민족주의 운동과 문화 대혁명에서 나타난 중국의 수사학으로 판단해 보건대, 신장에서 '단결'을 위협하는 주된 요인으로 인식된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소련과의 연계였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394


 이같은 상황에서 민족주의나 종교에 기반한 중앙정부에 대한 배신감과 반발감이 생긴다면 그 이유는 하나 뿐일 것이다. 한족과 위구르족간의 심해진 소득불균형 문제. 경제적 문제로부터 시작된 중앙정부(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민족적 갈등으로 이어졌고, 때마침 시진핑習近平)의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의 핵심 관문으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강경하게 진압한 것이 국제 이슈로 대두되면서 오늘날 신장 위구르 지역의 문제가 국제문제로 커지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신장 지역의 역사를 다룬 좋은 책들은 이전 리뷰,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고 <신장의 역사>가 미처 다루지 못한 상세한 내용이 이들 책에는 담겨있다. 신장 지역의 고대 유목제국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돌궐유목제국사>,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 ~ 840>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며, 이후 강희제의 준가르 정복사는 <중국의 서진>이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지만, 오늘날 신장지역 문제를 이해하기에는 <신장의 역사>가  적합한 책이라 생각된다. 신장의 과거를 통해 현대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홍콩 출신의 한 학자는 신장의 한족-위구르족 관계의 상태를 정량화하려는 시도를 해 왔다. 위구르인 응답자들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우루무치에서 거의 400명의 한족과 위구르족을 대상으로 한 그의 조사는 두 공동체 사이에 대단히 깊은 골이 있음을 밝혀냈다. 많은 비율의 위구르인 응답자들이 중국 시민이라는 것(88퍼센트)보다는 위구르인이라는 것(91퍼센트)과 신장의 주민이라는 사실(95퍼센트)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대답했으며, 거의 40퍼센트에 달하는 위구르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질은 한족보다 더 느리게 향상되고 있다고 믿었으며, 과반수의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에 심각한 소득 불균형이 있다고 생각했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477

한화(漢化)라는 개념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적어도 2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첫째로 이 개념은 주변의 민족들과 중국을 정복한 민족 모두 일단 중국의 문화와 조우하게 되면 우월한 중국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고 가정한다. 중국 고전에서 기원한 이 사고방식은 경험적/이론적 기반 모두에서 무시되거나 고도로 제한되었다. ‘한화‘의 두 번째 의미는 비중국적인 문화 요소들을 제거하고 특정 민족이나 지역을 중국적인 방식으로 변환시키려는 국가의 직접적인 노력을 지칭한다... 그러나 사실상 청은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이 지역의 투르크계 무슬림, 몽골족과 한족 주민들에게 서로 다른 행정/법률 체계를 시행했으며, 한족 농부들이 신장의 북부와 동부로 이주하는 것을 제한하며 느슨한 민족 분리 정책을 고수했다. - P172

청 제국의 붕괴로 인해 토착 엘리트들이 신흥 국가, 즉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민족 독립을 선언한 티베트나 몽골에서와는 달리 신장에는 이러한 선언을 할 만큼 충분히 두드러지는 위치에 있었던 엘리트들이 없었으며 청의 붕괴에 대한 통일된 대응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장의 좀 더 세속적인 투르크계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적 사고의 동요가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신장 성에 신식 투르크 학교가 설립된 것에 가장 잘 나타나 있었는데, 이는 몇몇 도시에 거주하는 부유하고 자주 여행을 다니는 상인들이 선도한 운동이었다. - P254

개발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역사 편찬과 교육 개혁의 목적은 신장을 중국의 다른 지역들과 더욱 밀접하게 통합하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공화국들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탈퇴하도록 이끈 것이 민족주의 그 자체는 아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이 정의 내린 바로 그 민족 경계를 따라 분열되었다. 중국의 헌법은 소련과 달리 중국의 ‘소수 민족 자치구‘에 분리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여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 정책은 이어 붙인 중국 민족 구조의 갈라진 틈을 지우기보다는 오히려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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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5-24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농담이 아니고 잠시 소름이 끼쳤네요! 제가 얼마 전에 이 책을 샀거든요(물론 시작은 못했지만ㅋㅋ) <오리엔탈리즘>에서 참고도서로 이 책이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담아놨다가 중앙유라시아지도 주는 행사도서에 포함되길래 샀답니다. 신장의 역사를 알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런 연구총서는 왠만해서는 중쇄 찍는 경우도 드물고 품절이나 절판되면 다시 나오기도 힘든 경우가 많아서 이럴 때 사야해! 하면서 샀답니다. 겨울호랑이님께서 별점 5점을 주셨다니! 역시 잘 샀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만주족의 역사와도 병행해가면서 읽어야겠습니다. 올려주신 리스트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구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덧) 그러고보니 돌궐유목제국사부터 읽어야겠네요ㅋㅋ

겨울호랑이 2023-05-24 15:07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거리의화가님처럼 저도 정말 보고싶은 연구총서는 제법 있지만, 언제 절판, 품절될 지 모르는 시한부 삶이라 항상 조마조마합니다. 덕분에 밀린 재고량도 꽤 되고 참 부작용이 크네요 ㅋ 그래도, <신장의 역사> <중국의 서진>과 같은 책들을 보면 든든한 현인을 모신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거리의화가님께서는 워낙 책을 다양하게 읽으시니 저보다 낫겠습니다만. 지도를 보면서 지정학적으로 보는 역사도 즐거울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님, 화창한 날 즐거운 독서 시간 가지세요! ^^:)

거리의화가 2023-05-24 15:11   좋아요 1 | URL
<중국의 서진>은 그래도 지역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을 듯한데 <위구르 유목제국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신청해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재고로 쌓이는 병폐는 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런 책들은 결국 사두어야 좋은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5-24 15:30   좋아요 1 | URL
^^:) 재고 처리를위해서도 정말 부지런히 읽어야할 것 같아요. 시간을 짧은데 읽어야 할 책은 참 많고, 좋은 책은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빠른 런닝 머신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되네요.
 
연옥의 탄생 우리 시대의 고전 6
자크 르 고프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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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옥 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친 형성 과정은 기독교적 상상세계의 시공간적 구조의 실질적인 변모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변모를 초래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이러한 정신적 구조들은 한 사회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의 기반이다. 고대 후기로부터 산업 혁명까지 지속된 긴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그러했듯이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을 때에는 저승의 지리 곧 우주의 지리를 변경한다는 것, 내세의 시간을 즉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20


 자크 르 고프 (Jacques Le Goff, 1924 ~ 2014)는 <연옥의 탄생 La Naissance du purgatoire>에서 '천국-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사후세계에서 '연옥'이라는 제3의 공간의 중세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를 중세철학사상과 문학작품을 통해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현대인과는 전혀 다른 중세적 사고틀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원래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연옥'의 개념이 사도 바오로(Paulus, CE 5 ? ~ 64 ?)의 <코린토 1서>의 내용을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 암브로시오스(Aurelius Ambrosius, 330 ~ 397) 등 교부들의 해석 과정을 거쳐 큰 틀이 만들어졌고, 틀 안의 세부 내용이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조금씩 바뀌다가 최종적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바울의 텍스트는 "어떤 가벼운 죄과들에 대해서는 심판 이전에 정화하는 불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로 말하자면, 만일 사람이 철이나 청동이나 납으로 집을 지으면, 즉 "중대한 죄들"을 짓는다면 이 죄들은 불에 타 없어질 수 없을 것이지만,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즉 "미미하고 가벼운 죄들"을 짓는다면 이 죄들은 불에 타서 없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죄들이 죽은 뒤 불에 타 없어지기 위해서는 생전에 선행으로써 그럴말한 덕을 쌓아야 한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88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인 구조는 고대 종교의 공통된 틀이다.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선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는 구도는 기독교만의 것은 아니지만, 연옥의 등장은 이전 고대 종교와는 분명 구분되는 새로운 변화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육체의 심판 이후 영혼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교리와 영혼에 대한 심판 이후에도 가벼운 죄에 대한 구원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이 전제되어야 했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초대 교회의 교부(敎父)들이었다. 


 오리게네스의 개념들은 보다 세밀하고 광범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전적으로 무죄한 인간은 없으므로 의인들까지도 불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체와 결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영혼은 더럽혀진 것이다. 의인들에게는 이 불의 통과가 세례이다. 불은 영혼을 무겁게 하던 납을 녹여내어 정금으로 만든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27


 암브로시우스는 오리게네스보다는 바울의 영향에 이끌려 모든 죄인들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졌을 터이므로 불을 통해 구원되리라고 생각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죽은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산 자들의 기도에 효력이 있을 수 있음을, 형벌의 완화를 위한 대도의 가치를 분명히 긍정하였다(p130)... 암브로시우스는 형제를 위해 기도한다. 그것은 저승에서의 가족적 구명망(救命網)이다. 그것은 중세에 그리고 연옥이라는 시각에서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특시 사튀로스가 구한 자들의 대도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회적 현상을 본다. 즉 로마의 클리엔트 clientele가 기독교적 차원으로 환치되는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39


 교회의 초대 교부들인 오리게네스, 암브로시우스 등에 의해 제기된 사후 심판에 대한 논의는 바로 교회권한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죄를 지은, 언젠가 천국으로 가야할 영혼은 언제 어떻게 구원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이러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연결시켜주며, 생전 선행을 장려하면서 세속에서의 권한을 팽창시켜나갔다. 이런 면에서 바로 연옥의 존재는 중세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옥'이라는 제3의 세계가 중세 이후 본격적으로 부상하게 되는 제3계급 부르주아(bourgeois)와의 연계성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도시의 발달을 통해 새롭게 부상하는 도시 중간층의 등장이 중세 사회의 '팽창'이라면, 연옥은 사후 세계의 '팽창'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연옥을 통한 교회의 팽창과 도시 발전을 통한 제3신분의 팽창, 성지 탈환을 위한 군사적 팽창. 이런 면에서 '팽창'은 12세기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연옥에 대한 간섭은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관련된다. 분명 이 새로운 영역은 전적으로 교회에 의해 병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중간적 상황 때문에 신과 교회의 공통의 사법권에 속한다. 봉권제가 이 시대에 발전시킨 공동 사법에 견주어, 신과 교회가 연옥에 대한 파리아주(pariage, 공동 영주권)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권세를 얼마나 확대하는 일인가!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482


  우리는 11세기초에 정의되어 12세기에 확충된 기도하는 자들 oraotres, 전투하는 자들 bellatores,  일하는 자들 laboratores의 삼분적 사회 체제를 볼 수 있다. 요컨대 사회의 비약적 발전이 새로운 표상 체계에 의해 인준된 것이라 하겠다. 12세기의 발전은 지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팽창이기도 하며, 12세기는 십자군 운동의 대세기이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역사에 있어 영적이고 지적인 시기였으니, 샤르트르 Chartres, 프로몽트레 Premontres, 시토 Citeaux 등의 수도원 부흥이 일어나는가 하면, 동시에 도시 학교들에서는 지식의 새로운 개념 및 새로운 지적 방법들, 즉 스콜라주의가 태어난다. 연옥은 사회적 상상 세계, 저승 지리, 종교적 확신 등에 있어서 이 같은 팽창의 한 요소이며, 그러한 체제의 일부로서, 12세기가 정복한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262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은 12세기 팽창을 상징하는 '연옥'의 개념이 13세기에 뿌리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에서 묘사된 연옥의 모습은 12세기와 13세기 전통의 완성이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12세기 신학의 '천국의 예비소'와 13세기 신학의 '가장 가벼운 징벌의 장소' 사이에서 방황하던 연옥의 위치는 이로써 확고하게 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3세기에 연옥은 신학에서나 교의적 차원에서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존재는 확실한 것이었고, 연옥이란 신앙과 교회의 진리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건 다소간에 추상적인 의미에서건, 그것은 하나의 장소로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공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죽은 자들을 위한 대도라는 기독교의 아주 오래된 관행에 온전한 의의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교회 조직은 그것을 통제하고 그것이 신자들의 상상 가운데 멋대로 자라나지 않게끔 제한하였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551


<연옥의 탄생>에서 독자들은 '연옥'이라는 제3의 사후세계를 통해 중세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바늘 끝에 얼마나 많은 천사가 매달릴 수 있는가'하는 문제마저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을 오늘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연옥의 탄생>을 통해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성(聖)과 속(俗)을 연결시키려는 당대 신학자들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면, 중세인들의 시각에 가깝게 당대 역사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연옥의 탄생>은 이처럼 독자들을 중세의 세계관으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현대와 중세를 잇는 고전이라 생각된다... 


 단테는 연옥을 저승의 중개적 처소로 만드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히 성공했으며, 그럼으로써 13세기 교회가 지옥화했던 연옥을 제 위치에 돌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지옥과 천국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천국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지는 정통적 연옥의 논리에 보다 충실했던 단테는 연옥을 희망의 장소, 희락이 시작되며 빛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장소로 그려놓았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단테가 스콜라 학자들을 넘어 연옥의 근거를 참회에 두었던 12세기 신학자들의 위대한 전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657


논리적 · 수학적 구조인 ‘중간‘이라는 개념은 중세의 사회적·정신적 현실들의 깊은 변모와 관련된다. 권력 있는 자들과 가난한자들, 성직자들과 속인들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 중간 계급 내지는 제3계급을 도입하게 되는 것도 같은 필요에서 나온 현상으로, 변모한 사회를 반영한다. 그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가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 사고 편성에 있어 이원적 체제에서 삼원적 체제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 P32

연옥은, 다른 많은 신앙들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는 지성인들의 사색과 집단의 압력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소극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과의 투쟁에서도 태어났다. 이 투쟁은 연옥이 당시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마 교회가 연옥 교의를 정립한 것은 12~13세기의 이단들, 13~14세기의 그리스인들, 16~17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에 맞서서였다. 공식 로마 교회의 적수들은 끈질기게 연옥을 공격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저승에서의 인간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공덕과 하나님의 뜻에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332

연옥은 그보다는 덜 장엄한 심판, 죽음 직후의 개인적 심판에 달려 있으니, 중세 기독교는 그것을 망자의 영혼을 놓고 벌이는 선한 천사들과, 고유한 의미에서의 천사들과 마귀들간의 싸움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낸다. 연옥의 영혼들은 종국에는 구원될 선택된 영혼들이므로 천사들에게 속하나 복잡한 사법적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들은 사실 형(刑)의 유예나 가석방을 누릴 수도 있으며, 이는 그들 자신의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외적인 개입 즉 대도 덕분이다. - P411

종말론적 시간과 지상적 시간 사이의 결합은 시간에 대한 13세기의 새로운 태도들의 특징이다. 지상적 시간은 점점 더 선조성을 띠게 되며 점점 더 시간 속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의해 구획되기 시작한다(p555)...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이론적인 답변에 의하면 참회는 이생에서만 가능하고 죽은 뒤에는 징벌만이 있다. 그러므로 연옥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망자 개개인에게 연옥의 시간이 반드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전기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십중팔구 심판 이전에 구원될 것이며, 그 구원의 시기는 정화되어야 할 죄의 성질과 분량에 따라, 그리고 산 자들이 드리는 대도의 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의 시간은 가변적이고 측량 가능하며 심지어 조정 가능한 것이 된다.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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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충분히 오랜 시간 속다 보면 속임수라는 증거가 나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가장 슬픈 역사의 교훈 중 하나이다. 진실을 찾는 데 관심을 잃고 속임수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된다. 속임수에 낚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너무나 괴로운 탓에 사기꾼에게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넘기고 나면 다시는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오래된 속임수가 새로운 옷을 입고 계속해서 살아남게 된다.

그렇다면 샤머니즘이나 신학이나 뉴 에이지 교리와 양자 역학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당신은 양자 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양자 역학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는 검증할 수 있다. 답은 여기에 있다.

과학의 권위는 다양한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여 개선책을 제시하도록 권장하는 성질을 가진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뉴먼 추기경이 성서의 무오류성을 의문시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처럼, 사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제도에서 생기는 권위와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왜곡된 필터를 통해 기술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역사가 자신도 왜곡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은 한때 적국이었던 다른 나라 역사가들의 견해에도 정통해야 한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근삿값을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 고작이다.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며 자기 인식을 심화해 가야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을 무효화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성적으로 이성에 반대하고 있는지 비이성적으로 이성에 반대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만약 이성적으로 그러는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몰아내 버리려고 애쓰는 바로 그 원리를 옹립하려는 꼴이 된다. 그게 아니라 만약 비이성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라면(모순을 피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들은 이성적으로 납득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대가 된다. 즉 그들은 이성적 토의가 불가능한 상대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과학이란 집단 작업이다. 팀워크가 승리를 가져다준다. 우리 중에 가장 똑똑한 사람이 오류를 놓치고 실수를 범해도 가장 둔하고 무능한 사람이 그것을 밝혀내고 교정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전통은 워낙 풍부하고 다면적이기 때문에 수정과 교정의 기회 역시 잔뜩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들의 경전을 은유나 우화로서 해석할 때 그런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고치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회의주의 운동에도 결함이 있다. 먼저 눈에 띄는 중요한 결함은 진영 논리, 또는 흑백 논리적 양극화이다. ‘우리’ 대 ‘저들’로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진리를 독점하고 있고, 저런 바보 같은 교리를 신봉하는 저들은 멍청이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역설해 왔듯이, 과학의 핵심은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두 가지 태도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다. 하나는 아무리 이상하고 직관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모든 아이디어를 회의적으로, 그리고 아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잡고 나서야 비로소 터무니없는 헛소리로부터 심오한 진리를 구별해 낼 수 있다. 창의적인 사고와 회의적인 사고의 합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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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는 미칠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두 귀를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페레이라의 소리, 신도의 신음소리는 두 귀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그만해 주시오, 중지해 주시오. 주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침묵을 깨 버리혀야 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고 꼐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올바름이며 선이며 사랑의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함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말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3/159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 ~ 1996)의 <침묵 沈默>과 박완서(1931 ~2011)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모두 '신(神)의 침묵'을 주제로 한다. 죄 없이 죽어가는 일본 가톨릭 신자들을 방관하는 무정한 신, 촉망받는 예비 의사 아들을 너무도 빨리 데려간 야속한 신, 하느님은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간절한 부르짖음에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제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제 자신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한테나 응석부리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까요.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8/184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며 어디로 가야할 지를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침묵은 부재(不在)로 다가왔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이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한 명은 배교(背敎)로, 또 다른 한 명은 더 깊은 신앙으로.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 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6/159


 마침내 가슴에 걸린 빗장이 부러지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오면서 점심 먹은 걸 고스란히 토해냈다. 복통이 없어지자 내 존재도 소멸한 것 같았다. 완벽한 평화였다. 고통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변기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짚고 무릎 꿇은 자세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한 생각이 떠올랐다.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134/184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재에 대해 마치 겟세마니에서 피땀이 떨어지는 예수의 기도와 같이 처절하게 기도했다. 이러한 간절함에 대해 내린 서로 다른 두 길. 어느 길이 올바른 좁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기도했지.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어. 하지만 기도도 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지는 못했지. 저 사람들의 귀 뒤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 나오지, 그 고통을 나는 내 몸으로 맛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어. 기도는 결코 그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해.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4/159


 주를 믿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닌, 단지 공포 때문에 올리는 기도란 얼마나 참담한가. 참담 그 자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예수는 당신이나 십자가에 매달리고 말지, 왜 수많은 예수쟁이들까지 줄줄이 그의 못박히고 피맺힌 팔다리에 매달리게 하는가. 그래서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손톱 발톱까지 나눠 갖게 하는가.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70/184


  그들의 선택 또는 깨달음에 대한 판단을 선뜻 내리기는 쉽지 않다.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와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자신의 슬픔을 피정을 통해 치유하는 과정이 주는 의미는 분명 읽는 이들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이기에. 다만 신의 침묵에 대한 이들의 응답은 시간(時間)속에서의 응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원한 절대적인 신의 시간에서 자신들이 직면한 상황은 순간의 비극(悲劇)이라는. 결국, 로드리고의 배교도, 박완서 작가의 회심(回心)도 큰 틀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 상황적 선택은 아니었을까...


  종교인들은 지옥문이나 불운한 지상의 모든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구원받는다는 느낌과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신의 존재는 영원히 보존될 이상적 질서의 담보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확신시켜주듯이, 이 세상은 사실 언젠가 불타버리거나 얼어붙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세상이 신의 질서의 일부라면, 옛 이상들은 다른 세상에 가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비극은 임시적이고 부분적일 뿐이며, 파멸과 해체는 절대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_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p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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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3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옥 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친 형성 과정은 기독교적 상상세계의 시공간적 구조의 실질적인 변모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변모를 초래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이러한 정신적 구조들은 한 사회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의 기반이다. 고대 후기로부터 산업 혁명까지 지속된 긴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그러했듯이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을 때에는 저승의 지리 곧 우주의 지리를 변경한다는 것, 내세의 시간을 즉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 P20

연옥의 존재는 또한 죽은 자들의 심판이라는 관념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여러 종교에 널리 유포되어 있으나, "이 심판의 양상들은 문명에 따라 매우 달랐다. 연옥의 존재를 상정하는 심판이란 매우 특이한 것으로, 그것은 실상 이중적 심판 즉 죽음의 순간에 첫번째 심판을, 세상의 종말에 두번째 심판을 맞게 된다는신앙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심판의 중간에 다양한 요인들에 따른 형벌의 완화 내지 단축이라는 복잡한 심리과정을 둔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도화된 정의 관념 및 형벌 체계의 투영을 전제로 한다. - P29

연옥은 또한 개인적 책임 및 자유 의지라는 관념 즉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성(性)을 타고나지만 그렇더라도 각 사람은 자기 책임하에 지은 죄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다. 중간적 저승인 연옥은 성인들이나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의 무함과 범죄한 자들의 용서할 수 없는 죄성 사이에 있는 중간적 죄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 P29

미래의 선택된 자들을 위한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천국 쪽에 가까우며, 따라서 위쪽으로 따라 올라간 중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연옥이란 봉건적 사고의 특징인 중심이 치우친 균형 체제, 동시대의 봉신제도나 결혼 제도의 유형에서 보듯 대등한 관계이면서도 봉신은 영주에게 예속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예속되는 평등 속의 불평등 체제의 일환이다. - P32

논리적 · 수학적 구조인 ‘중간‘이라는 개념은 중세의 사회적·정신적 현실들의 깊은 변모와 관련된다. 권력 있는 자들과 가난한자들, 성직자들과 속인들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 중간 계급 내지는 제3계급을 도입하게 되는 것도 같은 필요에서 나온 현상으로, 변모한 사회를 반영한다. 그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가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 사고 편성에 있어 이원적 체제에서 삼원적 체제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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