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는 미칠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두 귀를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페레이라의 소리, 신도의 신음소리는 두 귀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그만해 주시오, 중지해 주시오. 주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침묵을 깨 버리혀야 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고 꼐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올바름이며 선이며 사랑의 존재임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존재함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말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3/159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 ~ 1996)의 <침묵 沈默>과 박완서(1931 ~2011)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모두 '신(神)의 침묵'을 주제로 한다. 죄 없이 죽어가는 일본 가톨릭 신자들을 방관하는 무정한 신, 촉망받는 예비 의사 아들을 너무도 빨리 데려간 야속한 신, 하느님은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간절한 부르짖음에 끝내 응답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제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제 자신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한테나 응석부리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까요.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8/184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며 어디로 가야할 지를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침묵은 부재(不在)로 다가왔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이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한 명은 배교(背敎)로, 또 다른 한 명은 더 깊은 신앙으로.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 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6/159


 마침내 가슴에 걸린 빗장이 부러지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오면서 점심 먹은 걸 고스란히 토해냈다. 복통이 없어지자 내 존재도 소멸한 것 같았다. 완벽한 평화였다. 고통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변기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짚고 무릎 꿇은 자세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한 생각이 떠올랐다.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134/184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재에 대해 마치 겟세마니에서 피땀이 떨어지는 예수의 기도와 같이 처절하게 기도했다. 이러한 간절함에 대해 내린 서로 다른 두 길. 어느 길이 올바른 좁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기도했지.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어. 하지만 기도도 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지는 못했지. 저 사람들의 귀 뒤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 나오지, 그 고통을 나는 내 몸으로 맛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어. 기도는 결코 그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해.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34/159


 주를 믿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닌, 단지 공포 때문에 올리는 기도란 얼마나 참담한가. 참담 그 자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예수는 당신이나 십자가에 매달리고 말지, 왜 수많은 예수쟁이들까지 줄줄이 그의 못박히고 피맺힌 팔다리에 매달리게 하는가. 그래서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손톱 발톱까지 나눠 갖게 하는가. _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p70/184


  그들의 선택 또는 깨달음에 대한 판단을 선뜻 내리기는 쉽지 않다.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와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자신의 슬픔을 피정을 통해 치유하는 과정이 주는 의미는 분명 읽는 이들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이기에. 다만 신의 침묵에 대한 이들의 응답은 시간(時間)속에서의 응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원한 절대적인 신의 시간에서 자신들이 직면한 상황은 순간의 비극(悲劇)이라는. 결국, 로드리고의 배교도, 박완서 작가의 회심(回心)도 큰 틀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 상황적 선택은 아니었을까...


  종교인들은 지옥문이나 불운한 지상의 모든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구원받는다는 느낌과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신의 존재는 영원히 보존될 이상적 질서의 담보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확신시켜주듯이, 이 세상은 사실 언젠가 불타버리거나 얼어붙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세상이 신의 질서의 일부라면, 옛 이상들은 다른 세상에 가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비극은 임시적이고 부분적일 뿐이며, 파멸과 해체는 절대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_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 p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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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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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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