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 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친 형성 과정은 기독교적 상상세계의 시공간적 구조의 실질적인 변모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변모를 초래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이러한 정신적 구조들은 한 사회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의 기반이다. 고대 후기로부터 산업 혁명까지 지속된 긴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그러했듯이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을 때에는 저승의 지리 곧 우주의 지리를 변경한다는 것, 내세의 시간을 즉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 P20

연옥의 존재는 또한 죽은 자들의 심판이라는 관념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여러 종교에 널리 유포되어 있으나, "이 심판의 양상들은 문명에 따라 매우 달랐다. 연옥의 존재를 상정하는 심판이란 매우 특이한 것으로, 그것은 실상 이중적 심판 즉 죽음의 순간에 첫번째 심판을, 세상의 종말에 두번째 심판을 맞게 된다는신앙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심판의 중간에 다양한 요인들에 따른 형벌의 완화 내지 단축이라는 복잡한 심리과정을 둔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도화된 정의 관념 및 형벌 체계의 투영을 전제로 한다. - P29

연옥은 또한 개인적 책임 및 자유 의지라는 관념 즉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성(性)을 타고나지만 그렇더라도 각 사람은 자기 책임하에 지은 죄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생각과 결부되어 있다. 중간적 저승인 연옥은 성인들이나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의 무함과 범죄한 자들의 용서할 수 없는 죄성 사이에 있는 중간적 죄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 P29

미래의 선택된 자들을 위한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천국 쪽에 가까우며, 따라서 위쪽으로 따라 올라간 중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연옥이란 봉건적 사고의 특징인 중심이 치우친 균형 체제, 동시대의 봉신제도나 결혼 제도의 유형에서 보듯 대등한 관계이면서도 봉신은 영주에게 예속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예속되는 평등 속의 불평등 체제의 일환이다. - P32

논리적 · 수학적 구조인 ‘중간‘이라는 개념은 중세의 사회적·정신적 현실들의 깊은 변모와 관련된다. 권력 있는 자들과 가난한자들, 성직자들과 속인들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 중간 계급 내지는 제3계급을 도입하게 되는 것도 같은 필요에서 나온 현상으로, 변모한 사회를 반영한다. 그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가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 사고 편성에 있어 이원적 체제에서 삼원적 체제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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