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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의 탄생 ㅣ 우리 시대의 고전 6
자크 르 고프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평점 :
연옥 신앙의 출현과 수세기에 걸친 형성 과정은 기독교적 상상세계의 시공간적 구조의 실질적인 변모를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 변모를 초래한다. 그런데 시공간의 이러한 정신적 구조들은 한 사회의 사고 및 생활 방식의 기반이다. 고대 후기로부터 산업 혁명까지 지속된 긴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그러했듯이 사회가 온통 종교로 침윤되어 있을 때에는 저승의 지리 곧 우주의 지리를 변경한다는 것, 내세의 시간을 즉 현세의 역사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느리지만 근본적인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20
자크 르 고프 (Jacques Le Goff, 1924 ~ 2014)는 <연옥의 탄생 La Naissance du purgatoire>에서 '천국-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사후세계에서 '연옥'이라는 제3의 공간의 중세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를 중세철학사상과 문학작품을 통해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현대인과는 전혀 다른 중세적 사고틀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원래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연옥'의 개념이 사도 바오로(Paulus, CE 5 ? ~ 64 ?)의 <코린토 1서>의 내용을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 암브로시오스(Aurelius Ambrosius, 330 ~ 397) 등 교부들의 해석 과정을 거쳐 큰 틀이 만들어졌고, 틀 안의 세부 내용이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조금씩 바뀌다가 최종적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바울의 텍스트는 "어떤 가벼운 죄과들에 대해서는 심판 이전에 정화하는 불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로 말하자면, 만일 사람이 철이나 청동이나 납으로 집을 지으면, 즉 "중대한 죄들"을 짓는다면 이 죄들은 불에 타 없어질 수 없을 것이지만, 나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즉 "미미하고 가벼운 죄들"을 짓는다면 이 죄들은 불에 타서 없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죄들이 죽은 뒤 불에 타 없어지기 위해서는 생전에 선행으로써 그럴말한 덕을 쌓아야 한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88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인 구조는 고대 종교의 공통된 틀이다.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선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는 구도는 기독교만의 것은 아니지만, 연옥의 등장은 이전 고대 종교와는 분명 구분되는 새로운 변화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육체의 심판 이후 영혼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교리와 영혼에 대한 심판 이후에도 가벼운 죄에 대한 구원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이 전제되어야 했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초대 교회의 교부(敎父)들이었다.
오리게네스의 개념들은 보다 세밀하고 광범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전적으로 무죄한 인간은 없으므로 의인들까지도 불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체와 결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영혼은 더럽혀진 것이다. 의인들에게는 이 불의 통과가 세례이다. 불은 영혼을 무겁게 하던 납을 녹여내어 정금으로 만든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27
암브로시우스는 오리게네스보다는 바울의 영향에 이끌려 모든 죄인들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졌을 터이므로 불을 통해 구원되리라고 생각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죽은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산 자들의 기도에 효력이 있을 수 있음을, 형벌의 완화를 위한 대도의 가치를 분명히 긍정하였다(p130)... 암브로시우스는 형제를 위해 기도한다. 그것은 저승에서의 가족적 구명망(救命網)이다. 그것은 중세에 그리고 연옥이라는 시각에서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특시 사튀로스가 구한 자들의 대도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회적 현상을 본다. 즉 로마의 클리엔트 clientele가 기독교적 차원으로 환치되는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139
교회의 초대 교부들인 오리게네스, 암브로시우스 등에 의해 제기된 사후 심판에 대한 논의는 바로 교회권한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죄를 지은, 언젠가 천국으로 가야할 영혼은 언제 어떻게 구원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이러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연결시켜주며, 생전 선행을 장려하면서 세속에서의 권한을 팽창시켜나갔다. 이런 면에서 바로 연옥의 존재는 중세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연옥'이라는 제3의 세계가 중세 이후 본격적으로 부상하게 되는 제3계급 부르주아(bourgeois)와의 연계성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도시의 발달을 통해 새롭게 부상하는 도시 중간층의 등장이 중세 사회의 '팽창'이라면, 연옥은 사후 세계의 '팽창'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연옥을 통한 교회의 팽창과 도시 발전을 통한 제3신분의 팽창, 성지 탈환을 위한 군사적 팽창. 이런 면에서 '팽창'은 12세기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연옥에 대한 간섭은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관련된다. 분명 이 새로운 영역은 전적으로 교회에 의해 병합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중간적 상황 때문에 신과 교회의 공통의 사법권에 속한다. 봉권제가 이 시대에 발전시킨 공동 사법에 견주어, 신과 교회가 연옥에 대한 파리아주(pariage, 공동 영주권)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권세를 얼마나 확대하는 일인가!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482
우리는 11세기초에 정의되어 12세기에 확충된 기도하는 자들 oraotres, 전투하는 자들 bellatores, 일하는 자들 laboratores의 삼분적 사회 체제를 볼 수 있다. 요컨대 사회의 비약적 발전이 새로운 표상 체계에 의해 인준된 것이라 하겠다. 12세기의 발전은 지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팽창이기도 하며, 12세기는 십자군 운동의 대세기이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역사에 있어 영적이고 지적인 시기였으니, 샤르트르 Chartres, 프로몽트레 Premontres, 시토 Citeaux 등의 수도원 부흥이 일어나는가 하면, 동시에 도시 학교들에서는 지식의 새로운 개념 및 새로운 지적 방법들, 즉 스콜라주의가 태어난다. 연옥은 사회적 상상 세계, 저승 지리, 종교적 확신 등에 있어서 이 같은 팽창의 한 요소이며, 그러한 체제의 일부로서, 12세기가 정복한 것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262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은 12세기 팽창을 상징하는 '연옥'의 개념이 13세기에 뿌리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에서 묘사된 연옥의 모습은 12세기와 13세기 전통의 완성이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12세기 신학의 '천국의 예비소'와 13세기 신학의 '가장 가벼운 징벌의 장소' 사이에서 방황하던 연옥의 위치는 이로써 확고하게 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3세기에 연옥은 신학에서나 교의적 차원에서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존재는 확실한 것이었고, 연옥이란 신앙과 교회의 진리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건 다소간에 추상적인 의미에서건, 그것은 하나의 장소로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공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죽은 자들을 위한 대도라는 기독교의 아주 오래된 관행에 온전한 의의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교회 조직은 그것을 통제하고 그것이 신자들의 상상 가운데 멋대로 자라나지 않게끔 제한하였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551
<연옥의 탄생>에서 독자들은 '연옥'이라는 제3의 사후세계를 통해 중세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바늘 끝에 얼마나 많은 천사가 매달릴 수 있는가'하는 문제마저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을 오늘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연옥의 탄생>을 통해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성(聖)과 속(俗)을 연결시키려는 당대 신학자들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면, 중세인들의 시각에 가깝게 당대 역사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연옥의 탄생>은 이처럼 독자들을 중세의 세계관으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현대와 중세를 잇는 고전이라 생각된다...
단테는 연옥을 저승의 중개적 처소로 만드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히 성공했으며, 그럼으로써 13세기 교회가 지옥화했던 연옥을 제 위치에 돌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지옥과 천국이라는 양극 사이에서 천국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지는 정통적 연옥의 논리에 보다 충실했던 단테는 연옥을 희망의 장소, 희락이 시작되며 빛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장소로 그려놓았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단테가 스콜라 학자들을 넘어 연옥의 근거를 참회에 두었던 12세기 신학자들의 위대한 전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_ 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 p657
논리적 · 수학적 구조인 ‘중간‘이라는 개념은 중세의 사회적·정신적 현실들의 깊은 변모와 관련된다. 권력 있는 자들과 가난한자들, 성직자들과 속인들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중간적 범주, 중간 계급 내지는 제3계급을 도입하게 되는 것도 같은 필요에서 나온 현상으로, 변모한 사회를 반영한다. 그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가 그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 사고 편성에 있어 이원적 체제에서 삼원적 체제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것이다. - P32
연옥은, 다른 많은 신앙들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는 지성인들의 사색과 집단의 압력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소극적으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과의 투쟁에서도 태어났다. 이 투쟁은 연옥이 당시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마 교회가 연옥 교의를 정립한 것은 12~13세기의 이단들, 13~14세기의 그리스인들, 16~17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에 맞서서였다. 공식 로마 교회의 적수들은 끈질기게 연옥을 공격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저승에서의 인간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공덕과 하나님의 뜻에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332
연옥은 그보다는 덜 장엄한 심판, 죽음 직후의 개인적 심판에 달려 있으니, 중세 기독교는 그것을 망자의 영혼을 놓고 벌이는 선한 천사들과, 고유한 의미에서의 천사들과 마귀들간의 싸움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낸다. 연옥의 영혼들은 종국에는 구원될 선택된 영혼들이므로 천사들에게 속하나 복잡한 사법적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들은 사실 형(刑)의 유예나 가석방을 누릴 수도 있으며, 이는 그들 자신의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외적인 개입 즉 대도 덕분이다. - P411
종말론적 시간과 지상적 시간 사이의 결합은 시간에 대한 13세기의 새로운 태도들의 특징이다. 지상적 시간은 점점 더 선조성을 띠게 되며 점점 더 시간 속의 크고 작은 사건들에 의해 구획되기 시작한다(p555)...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이론적인 답변에 의하면 참회는 이생에서만 가능하고 죽은 뒤에는 징벌만이 있다. 그러므로 연옥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망자 개개인에게 연옥의 시간이 반드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전기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십중팔구 심판 이전에 구원될 것이며, 그 구원의 시기는 정화되어야 할 죄의 성질과 분량에 따라, 그리고 산 자들이 드리는 대도의 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의 시간은 가변적이고 측량 가능하며 심지어 조정 가능한 것이 된다. - P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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