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충분히 오랜 시간 속다 보면 속임수라는 증거가 나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가장 슬픈 역사의 교훈 중 하나이다. 진실을 찾는 데 관심을 잃고 속임수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된다. 속임수에 낚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너무나 괴로운 탓에 사기꾼에게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넘기고 나면 다시는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오래된 속임수가 새로운 옷을 입고 계속해서 살아남게 된다.

그렇다면 샤머니즘이나 신학이나 뉴 에이지 교리와 양자 역학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당신은 양자 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양자 역학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는 검증할 수 있다. 답은 여기에 있다.

과학의 권위는 다양한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여 개선책을 제시하도록 권장하는 성질을 가진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뉴먼 추기경이 성서의 무오류성을 의문시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처럼, 사특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제도에서 생기는 권위와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왜곡된 필터를 통해 기술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역사가 자신도 왜곡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은 한때 적국이었던 다른 나라 역사가들의 견해에도 정통해야 한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근삿값을 조금씩 개선해 가는 것이 고작이다.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며 자기 인식을 심화해 가야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을 무효화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성적으로 이성에 반대하고 있는지 비이성적으로 이성에 반대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만약 이성적으로 그러는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몰아내 버리려고 애쓰는 바로 그 원리를 옹립하려는 꼴이 된다. 그게 아니라 만약 비이성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라면(모순을 피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들은 이성적으로 납득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대가 된다. 즉 그들은 이성적 토의가 불가능한 상대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과학이란 집단 작업이다. 팀워크가 승리를 가져다준다. 우리 중에 가장 똑똑한 사람이 오류를 놓치고 실수를 범해도 가장 둔하고 무능한 사람이 그것을 밝혀내고 교정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전통은 워낙 풍부하고 다면적이기 때문에 수정과 교정의 기회 역시 잔뜩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들의 경전을 은유나 우화로서 해석할 때 그런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고치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회의주의 운동에도 결함이 있다. 먼저 눈에 띄는 중요한 결함은 진영 논리, 또는 흑백 논리적 양극화이다. ‘우리’ 대 ‘저들’로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진리를 독점하고 있고, 저런 바보 같은 교리를 신봉하는 저들은 멍청이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역설해 왔듯이, 과학의 핵심은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두 가지 태도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다. 하나는 아무리 이상하고 직관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모든 아이디어를 회의적으로, 그리고 아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잡고 나서야 비로소 터무니없는 헛소리로부터 심오한 진리를 구별해 낼 수 있다. 창의적인 사고와 회의적인 사고의 합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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