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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국가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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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개정 증보판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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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드로스
플라톤 지음, 김주일 옮김 / 이제이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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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5- 테아이테토스 / 필레보스 / 티마이오스 / 크리티아스 /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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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를 마치고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티마이오스 TImaios>에 대한 강의를 청강하고 왔습니다. 플라톤의 우주론(Cosmology)가 담긴 <티마이오스>를 읽었지만, 상당히 어려운 대화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강의를 듣고 나니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강의 자료와 함께 개인적인 내용정리도 함께 올려 봅니다.(이하 반말)


 <티마이오스>는 화자인 티마이오스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다른 대화편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 역시 티마이오스의 입을 빌려 설명되는데, 우주론은 크게 다음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1. 존재와 생성/소멸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사유'와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 반면, '생성'되는 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감각'과 '의견'에 의해 파악된다. 그렇다면, 생성된 것이 분명한 우주는 소멸되는 것이며,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그렇지만, 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필멸의 존재)


 그러니까 제 판단으로는 먼저 다음 것들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to on aei)'이되 생성(genesis)을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것(to gignomennon ari)'이되 결코 존재(실재)하지는 않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입니다. 분명히 앞엣것은 '합리적 설명(logos)'과 함께하는 지성에 의한 앎(이해)(noesis meta logou)'에 의해 포착되는 것으로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aei kata tauta on) 것'인 반면에 뒤엣것은 '비이성적인 감각(aisthesis alogos)'과 함께 하는 의견(판단 doxa)의 대상으로 되는 것으로, 생성/소멸되는 것이요,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데,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 없이는 생성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7d - 28a) <티마이오스> 中


 그렇지만, 데미우르고스는 완벽한 존재를 모상으로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주는 생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주는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무질서에서 질서가 있는 상태로 이끌리게 된다. 정리하면, 우주는 생성된 필멸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형상'의 모상이기 때문에, 카오스(Chaos)에서 코스모스(Cosmos)로의 변화된다. 그리고, 이 우주는 몸통과 혼을 가진 존재이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에 이어진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匠人, demiourgos)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면 이런 걸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드는 것이 그 형태(모습 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됩니다.(28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Kosmos)가 과연 아름답고 이를 만든 이(demiourgos) 또한 훌륭하다면, 그가 영원한 것(to aidion)을 바라보고서 그랬을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우주는 바로 그렇게 해서 생겨났기에, 그것은 합리적 설명(logos)와 지혜(phronesis)에 의해 포착되며 '똑같은 상태로 있는 것'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점들이 이러할진대, 이 우주가 어떤 것의 모상(模像 : eikon)일 것임이 또한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29b) <티마이오스> 中


 이 우주를 구성한 이(ho synistas)는 훌륭한(선한 : agathos) 이였으니, 훌륭한 이에게는 어떤 것과 관련해서도 그 어떤 질투심이든 이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그는 질투심에서 벗어나 있어서, 모든 것이 최대한으로 자기 자신과 비슷한 상태에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질서 상태(ataxia)에서 질서 있는 상태(taxis)로 이끌었습니다. 질서 있는 상태가 무질서한 상태보다는 모든 면에서 더 좋다고 생각해서였죠.(29e -30a) <티마이오스> 中


 2. 우주의 몸통


 우주는 물체적인 것으로 시각적인 '불'과 촉각적인 '흙'을 재료로 한다. 그렇지만, 이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비례'라는 질서가, 중간재료로 '물'과 '공기'를 필요로 한다. 결국, 불, 흙, 물, 공기의 비례적 관계에 의해 우주의 몸통이 구성되는 것이다.


 생성된 것은 물체적인 것이며 볼 수도 있고 접촉할 수도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불 없이는 어떤 것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될 수 없고, 단단한 어떤 것 없이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될 수도 없지만, 흙이 없고서는 단단한 것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신은 불과 흙으로 우주의 몸통을 구성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셋째 것 없이 이들 둘 만으로는 훌륭하게 결합될 수가 없습니다. 양쪽 중간에서 결합해 주는 어떤 끈(desmos)이 생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끈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은 자신도 묶여진 것들도 최대한 하나로 만드는 것이겠는데, 이 일은 등비 비례(analogia)가 그 성질상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31b)... <티마이오스> 中


 우주의 몸통은 실상 입체적인 형태로 되는 것이 적절하거니와, 입체적인 것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은 결코 하나의 중항(mesotes)이 아니라, 언제나 두 개의 중항입니다. 바로 그래서 신(神)은 물과 공기를 불과 흙 사이의 중간에 놓고서, 이것들을 가능한 한, 그것들이 서로에 대해 같은 비례 관계를 갖게 하여... 천구(ouranos)를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리고 수에 있어서 이와 같은 네 가지인 것들에서 우주의 몸통이 그 비례 관계로 인해 조화를 이룸으로써 생겨났으니..(32c) <티마이오스> 中


3. 우주의 혼(魂)


그렇다면, 우주의 혼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우주의 혼은 동일성과 타자성, 그리고 기본적 존재(ousia)의 결합을 통해 혼(魂)으로 결합된다. 그리고, 데미우르고스는 이들을 잘라내어 운동을 만들어 내는데, 이들 중 '타자성 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행성의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그(우주를 구성하는 이)는 불가분적이고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존재(ousia)와 물체들에 있어서 생성되고 기본적인 존재, 이들 양자에서 그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존재를 혼합해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동일성(he tautou physis) 및 타자성(he tou heterou physis)과 관련해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것들의 불가분적인 것과 물체들에 있어서 가분적인 것의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것들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셋인 이것들을 갖고서 이 모두를 하나의 형태(idea)로 혼합했는데, 동일성과 섞이기 힘든 타자성은 억지로 조화를 이루게 결합했죠. 그리고는 [이것들을] 존재와 함께 섞어서, 셋으로 하나를 만들고, 다시 이 전체를 그가 적절한 부분들만큼 나누었지만, 나뉜 각 부분은 동일성(tauton), 타자성(thateron) 그리고 존재(ousia)로 혼합된 것입니다.(35a -35b <티마이오스> 中


 그는 혼합된 것, 즉 거기에서 그가 이것들을 잘라 냈던 그것을 이렇게 해서 어느새 마저 마저 써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그가 이 전체 구조(systasis)를 길이로 둘로 가르고서, 그 둘을 'X' 모양으로 중점이 서로 교차하도록 한 다음, 그 각각이 원형으로 하나를 이루게 구부렸습니다. 이것들이 [처음의] 그 교차점과는 반대편에서 또 한 만나게 한 거죠. 그리고선 그것들을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회전하는 운동으로써 에워싸서는 이들 원(kyklos) 가운데 하나는 바깥쪽 것으로, 다른 하나는 안쪽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바깥쪽 운동을 '동일성의 운동(phora tes tautou physeos)'이라 부르고, 안쪽 운동은 '타자성의 운동(phora tes thaterou physeos)라 불렀습니다. 그는 동일성의 운동은 평면으로 오른쪽으로 돌게 하되, 타자성의 운동은 대각선으로 왼쪽으로 돌게 하지만, 주도권은 동일성과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회전[운동](periphora)에 주었습니다.(36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타자성과 동일성의 궤도(출처 : <티마이오스>)


 4. 시간


 본래 형상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생성된 존재는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만들어내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필멸의 존재들은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 때문에,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인식시키기 위한 수단을 추가적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별(star)'이다. 


 본(paradeigma)이 살아 있는 영원한 것이듯이, 그는 이 우주도 그처럼 가능한 한 그런 것이도록 만들어 내려고 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것의 본성은 영원한 것이어서, 이를 생성된 것에 완전히 부여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는 어떤 영원(aion)의 모상(eikon)을 만들 생각을 하고서, 천구에 질서를 잡아 줌과 동시에, 단일성(hen) 속에 머물러 있는 영원의 [모상], 수에 따라 진행되는 영구적인 모상(aionion eikon)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chronos)이라 이름지은 것입니다.(37c) <티마이오스> 中


[사진] 행성의 운동(출처 : <티마이오스>)


 본이 영원토록 있는 것인 반면에, 천구는 그것대로 일체 시간에 걸쳐 언제나 '있어 왔고' '있으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한 시간의 창조(genesis)와 관련되는 신의 이러한 숙고와 의도로 해서 태양과 달 그리고, 떠돌이별들(행성들 astra planeta)이라는 이름을 갖는 그 밖의 다섯 별(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이 시간의 수치들의 구별과 수호를 위해 생겨났습니다.(38b) <티마이오스> 中


 결국 <티마이오스>의 창세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데미우르고스는 '영원한 존재인 형상의 모상'으로서 '우주'를 만들었기에 우주는 생성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생성된 것으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질료는 4원소(불, 흙, 공기, 물)이며, 우주의 혼은 동일성, 타자성과 기본적 존재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회전 운동으로 구성된다. 다만, 이러한 우주의 혼과 몸통은 유한한 것(그렇지만, 매우 긴)이기 때문에, 우주는 '과가-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을 알기 위해 별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다소 황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티마이오스>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강의에서 말했다.) 그것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이 말하는 바가 '인간이 우주와 같이 혼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면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티마이오스> 강의에서는 여기까지 강의되었지만, 이에 대해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파이드로스 Phaedrus>라는 연결 고리를 가지고 조금 더 생각해보자.

 

 <티마이오스>의 대화는 <국가 The Republic>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최선의 정체(政體)가 무엇인가?'를 묻는 <국가> 다음에 '우주(宇宙)'론이 나오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이 될 것이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 <파이드로스>의 내용을 중간에 넣는다면, 이 관계는 더 명확해진다. 우주의 혼은 질서있는 회전 운동을 한다.(티마이오스) - 인간도 혼이 있으며, 이 혼은 불멸한다.(파이드로스) - 인간들이 모여서 질서있고 조화롭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생성되었지만, 영원한 형상의 존재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치 우주처럼(국가).  이것이 강의에서 말하는 도식이었다고 정리해본다.


그렇다면, 과연 <티마이오스>를 정치철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전에 먼저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과연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만의 고유한 사상일까 부터 살펴보자. 발터 부르케르트(Walter Burkert, 1931 ~ 2015)의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Babylon, Memphis, Persepolis>에 따르면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오리엔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카드 문헌에서도 생성 혹은 창조(바누), 파괴(훌루쿠), 존재(바슈)의 세 개념이 만물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체계 속에 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에누마 엘리시>는 신이 파괴나 생을 명할 수만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파르메니데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그리스어로 변형된 옛 천지창조론은 새로운 토대를 이루었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을 넘어 합리적인 논증으로 드러나는 '존재'의토대이다. 훗날 플라톤은 이 논증에 아프리오리 개념이라는 수학적 기초를 놓았다.(p94)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中


 그리스의 창조론이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천문학 역시 오리엔트 영향을 받았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고, 천문학의 목적 역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천문학 역시 지배층들의 지배수단이었다고 바라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문명화의 길로 접어들던 한 종족이 시대적으로 틀림없이 농사를 지었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곳에 우리 스스로를 놓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대부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언제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고 풀을 베어내는지'를 꿰뚫은 사람들만 진정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처음에 그런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은 천체를 관측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p17) <천문학의 새벽> 中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읽고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은 정치 행위였다는 사실은 이집트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수양할 것과 천리를 알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면 동양에서도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정치수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孟子曰 盡其心者는 知其性也니 知其性則知天矣니라

存其心하여 養其性은 所以事天也요

天壽에 不貳하여 修身以俟之는 所以立命也니라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마음을 지극히 하는 사람은 그 본성 本性을 알게 되니 그 본성을 아는 사람은 그 천리 天理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을 수양 修養하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사 夭死하는 것과 장수 長壽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서 몸을 수양하여 천명 天命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잘 수양하여 기다리는 것이다." <맹자 진심장구 상 孟子 盡心長句 上> 中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국가>라는 정치철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은 무리한 설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는 별도로 플라톤과 비슷한 시기에 맹자(孔子, BC 372 ~ BC 289)가 멀리 떨어진 동양에서 '천명 天命'을 강조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라 여겨진다. 또, 멀리 플라톤과 맹자 시기까지 거슬러갈 것도 없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 철학의 지향점이 정치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철학이 철학의 종착점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글이 매우 길어졌기에, <티마이오스>와 여기에서 파생된 여러 이야기가 담긴 이번 페이퍼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PS. 창조신인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 그리고 분신인 '크리슈나'가 등장하는 <마하바라따>를 생각하면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인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는 다음 기회로 일단 넘기자... 이렇게 곁가지로 새니 책 한 권 제대로 읽기가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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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7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모자 2019-02-17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은 박홍규에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추천해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19-02-17 15:5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플라톤의 대가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황금모자님의 추천을 받게 되니 반드시 읽어봐야겠습니다. 황금모자님 감사합니다!^^:)

AgalmA 2019-02-17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목적론적 지향, 즉 인과적 사고가 사실상 우리 사고의 브레이크 혹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하라리도 지적하듯이 농경생활은 그 지역에서 그 작물이 재배된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 인간이 농경을 위해 그 작물을 재배한 것이 원인은 아니었죠. 물론 후대에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많은 걸 벌이고 있긴 하지만요. 그러나 정작 처음의 목적과는 다른 경로의 발전도 많죠.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이라든지, 실험 중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들이 다른 문제에 도움이 되는 경우(탈모 문제를 연구하다 만들어진 비아그라 같은ㅎㅎ;;)도 많고.
인간은 인과적 사고를 하는 특성이 있어 원인 결과를 따질 수밖엔 없긴 하지만, 그런 식의 사고 때문에 이해하기 너무 큰 것에 ‘이것은 신이 만든 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식도 나온 것이라 참...

요즘 마르쿠스 가브리엘 <나는 뇌가 아니다> 읽으면서도 한숨을 계속 쉬었는데요. 그는 신경과학이 인간을 뇌로 설명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설명을 한계로만 치부하며 철학적 관점을 고수하려는 확증 편향 아닌가 싶은 대목이 참 많아요. 인간은 뇌의 어느 부부만 잘못되어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교란을 많이 받잖습니까. 여기서 ‘진짜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상적인(?) 본질적인(?)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모든 게 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성적‘, ‘주관/객관‘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사고 모형일 뿐입니다. 합리적 설명을 위해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고 톺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사고가 불완전하다는 걸 누구나 아는 만큼.

겨울호랑이 2019-02-17 18:40   좋아요 3 | URL
^^:) AgalmA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에 생겨난 이유가 있다는 말은 우리 삶을 부품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로 기억됩니다만, 인간은 ‘뇌‘가 아닌 ‘위‘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살 수 없다는 그의 말 속에 현실이 잘 녹아있다 여겨집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요. 우리 안의 유전자도 그걸 원할 거라 넘겨짚어봅니다 ^^:)

2019-02-18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8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는 잠을 자고 마침내 깨어 고요한 겨울 아침을 맞게 된다. 창문틀에는 눈이 솜이나 솜털처럼 따듯하게 쌓여 있고 넓어진 창틀과 성에가 낀 유리창은 은밀한 빛을 받아들여 실내에 포근한 기운을 더한다. 아침의 고요는 무척 인상적이다. 들판 너머 확 트인 곳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려고 창 쪽으로 갈 때면 발아래에서 마루가 삐걱거린다. 쌓인 눈을 무겁게 지고 있는 지붕도 보인다. 처마와 담당에는 눈 종유석(鍾乳石)이 달려 있고 뜰에는 숨겨진 나무 고객이를 덮으며 석순이 서 있다. 나무와 관목들은 하얀 팔을 하늘 곳곳으로 치켜들고 담장과 벽이 있던 곳에는 어둑한 풍경 위로 마구 장난을 친 것처럼 환상적인 형태들이 펼쳐져 있는데, 자연이 사람들에게 예술의 본을 보여주려고 밤사이에 새로운 도안을 뿌려놓은 것 같다.(p76)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中


 어제 아침부터 띄엄띄엄 내린 눈이 밤 사이에 제법 쌓였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올려 봅니다.



 입춘(立春)도 지나 봄의 문턱에서 내리는 눈이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눈없는 겨울을 보내기에는 아쉬웠는데, 밤사이 쌓인 눈에 아쉬운 마음도 함께 묻힙니다. 저는 겨울의 풍경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쳤지만,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는 그 안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나는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어떤 시기와 환경에서든 앞날에 대한 걱정없이 자라는 나무의 모습을 보며 감탄한다. 사실 나무가 사람처럼 시기를 기다리는 법은 없지만, 지금이야말로 묘목이 자라기에는 황금 같은 시기다. 토양, 공기, 햇빛과 비가 아주 적절하니 태초의 환경도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다. 나무들에게는 "그들의 불만스러운 겨울 winter of their discontent"이란 결코 오지 않는다. 잎이 하나도 없는 자생 포플러 가지 위에서 서리에도 아랑곳 않고 기운차게 돋은 눈을 보라.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p37)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中


 이러한 소로의 말을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역(周易)의 '지뢰복(地雷復)' 괘(卦)가 떠오릅니다. 땅 밑에 우뢰가 있으니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생명력을 나타내는 이 괘와 겨울 나무를 바라보는 소로의 시선은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동양사상에도 관심 많았던 소로이니 만큼, 아마 주역을 알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소로 보다 200여년 앞선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가 주역을 읽고 주석까지 달았던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라 여겨집니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여러 음이 양을 박식(剝蝕)하여 박락(剝洛)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되살아나게 됩니다...'복(復)'괘는 바로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되살아나는 형상으로 '복'은 본원으로 돌아와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返本回復)'는 뜻입니다... 이는 동지(冬至) 즈음 음기(陰氣)가 극성하고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 오히려 한 가닥 양기가 회생하여 광활한 대지에 봄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이때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 발랄한 생명력은 어떻게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니, '형통'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p357) <주역 周易> 中


 아침에 내린 눈을 누구나 반갑게 맞이하지만, 오후에 먼지를 먹은 검은 눈은 천덕꾸러기가 되겠지요. 사람의 마음에 간사한 면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저만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생각해보면 눈(雪)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육아(育兒)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 태어났을 때는 그렇게 예쁘더니 '고난의 행군 100일'을 지나고 나면, 그 좋았던 마음도  많이 약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아이'와 '눈'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연의에게 조금 더 잘 해야겠습니다.


 고양이는 봄가을에 털갈이해 여름철 더위와 겨울철 추위에 대비합니다. 이른 봄부터 점차 털이 빠져 한여름 즈음에 말쑥하게 털이 정리되고, 가을부터는 보온 기능이 뛰어난 겨울털이 빽빽하게 자라나지요. 털갈이 시기에는 평소보다 털이 많이 빠지므로 훨씬 세심하게 브러싱하세요.(p64)  <달콤살벌 고양이 수업> 中


창밖에 쌓인 불구하고, 봄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2월이면 꽃대가 올라오는 긴기아난(Kingianum)과 군자란(Clivia miniata)과 함께 겨울이 끝난 다음 '고양이 털파카'를 만들어도 될 만큼 털갈이를 해대는 귀요미 녀석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은 녀석이 고양이가 아니라 누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말 모처럼 씻기고 쉬고 있는 녀석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인사드립니다.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되세요!



 쌓인 눈은 우리를 가두지만 집이 제공하는 편안한 느낌을 더해주기 때문에 가장 추운 날에도 우리는 난로 위에 앉아 굴뚝 꼭대기를 통해 하늘 보는 것을 즐거워한다. 굴뚝 주변 따뜻한 구석에서 누릴 수 있는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즐기거나 길거리에서 소들이 우는 소리나 긴 오후 내내 멀리 떨어진 곳간에서 도리깨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맥박을 재면서 말이다.(p97)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中


PS. 그렇지만, 역할 놀이는 정말 적응이... 어려서도 안하던 것을 딸 때문에 하려니 마치 '밀린 숙제'를 해야하는 심정입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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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2-16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로의 일기>에도 자연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소로를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로 꼽습니다.
고양이가 졸린 듯 보입니다. 잠자는 모습은 더 귀엽겠지요.

겨울호랑이 2019-02-16 23:54   좋아요 0 | URL
페크님께서 말씀하신 <소로의 일기>는 <소로의 야생화 일기>를 말씀하신 듯 합니다. 혹 제가 잘 모르는 다른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페크님 말씀처럼 소로는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모습을 <월든>을 비롯한 그의 여러 책에서 아낌없이 보여준다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로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었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양이는 낮에 졸고 밤에 돌아다녀서 지금은 아주 생생하게 뛰어나니네요. 아까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놀아달라고 보채니 귀찮아 집니다.ㅋ 페크님께서도 편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2019-02-17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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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04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완전한 행복이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간단하게 보여 주겠다. 너에게 너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너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너는 네가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어떤 것, 운명의 여신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p70) <철학의 위안> 中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Torquatus Sererinus Boethius, AD 480 ~ AD 524)는<철학의 위안 The Consilation of Philosopy>에서 완전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찾아간다. 보에티우스가 스콜라(Scholar) 철학 선구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론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위안>을 읽을 때 느낀 즐거움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철학의 위안>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용 안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려 한다.


 <철학의 위안>은 여러 가지 의문들 - 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정말 그가 기독교였다면 투옥과 죽음에 임박한 시간에 마땅히 그의 가장 큰 위안이 되었어야 할 신앙에 대한 언급이 어찌하여 <철학의 위안> 속에 전혀 없는가? -로 둘러싸여 있다.(p14) <철학의 위안> 서문 中


 <철학의 위안> 속에서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요소들을 차례로 제시하며, 이들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플로티노스(Plotinus, AD 203 ~ AD 270)의 <엔네아데스 The Enneads>의 철학을 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 逆說)이며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행운보다 불운이 인간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행운은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소로 너희를 속인다. 반면에 불운은 변화함으로써 그 참된 모습인 변덕스러움을 드러내기 때문에 항상 진실하다. 행운은 인간을 속이지만 불운은 인간을 깨우쳐 준다(p91) <철학의 위안> 中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런(고통스러운) 것들이 그때마다 그들의 경우와 똑같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 그러면 고통이란 어쩌면 우리 영혼의 나약함과 관련된 것이리라.(Enn, I 4, 8)


 <철학의 위안>에서는 불운이 행운보다 유익할 뿐 아니라, 재물과 권력은 '결핍'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들로 인한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위안>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일단 손에 넣게 되면 바랄 나위 없는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좋은 모든 것들의 완성이며 자신의 좋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뭔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행복일 수 없다. 거기에 내포되어 있지 않고 뭔가가 부족하다면 여전히 그것을 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모든 좋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상태이며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애쓰는 목표임이 분명하다.(p98) <철학의 위안> 中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베르길리우스' 나 플라톤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역할을 <철학의 위안>에서는 의인화된 '철학'이 수행한다. 그리고, 여신 '철학'은 화자인 보에티우스를 산파술을 통해 행복의 정의로 끌고 나간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神)은 선(善)하다는 것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신보다 더 선한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선은 그 어느 것보다도 우월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신의 선함이 완벽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이성(理性)은 신이 그토록 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준다.(p133) <철학의 위안> 中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 self sufficient)인 인간, 강한 인간, 존경 받기에 합당한 인간, 영예롭고 유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행복입니다... 자족, 강함, 존경, 영예, 유쾌는 모두 같은 것이므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저는 조금의 의혹도 없이 알고 있습니다.(p129)... 만물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초석(礎石)이 놓이지 않을 것입니다.(p130) <철학의 위안> 中


  <철학의 위안>에서는 결핍이 없는 진정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진정한 선은 바로 신(God)에서 찾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결국, <철학의 위안>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신(神)=선(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결론의 뿌리를 <엔네아데스> 이전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향연 Symposion>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의 위안>과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영혼을 신(神)과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게끔 이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Enn, I 6, 6)...  참된 지혜가 존재요, 참된 존재가 지혜인 셈이다... 이때 지혜는 [많은] 이론적인 것들로부터 종합해 낸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하나이다.(Enn, V 8, 5)


 우리는 이미 신과 행복이 하나이며 동일한 것임을 증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神)은 선(善) 그 자체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p138) <철학의 위안> 中


  그는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거죠.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인간에게 삶이 살 가치가 있는 건 만일 어딘가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삶에서일 겁니다.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바라보면서 살 때 말입니다.... 순수하고 정결하고 섞이지 않은 아름다운 것 자체를 보는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난다면, 즉 인간의 살이나 피부나 다른 가시적인 허접스레기에 물든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단일 형상인, 신적인 아름다운 것 자체를 그가 직관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떠하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까?(211 d ~ 212 a) <향연> 中


 다음으로 <철학의 위안>은 중세철학의 어느 부분과 맞닿아 있을까? 우리는 이를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모놀로기온 Monologion>의 신 존재 증명 앞 단계에서 하나의 선(신)을 가정하는 논증과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 ~ 1471)의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遵主聖範 De Imitatione Christi>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육체의 감각으로 체험하고 정신의 이성으로 분별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무수히 많은 선(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 다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하나의 선한 것 unum aliquid, per quod unum sint bona quaecumque bona sunt 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각 사물들마다 다른 선이 존재하는가? <모놀로기온 Op.p.14(p17)>


 <하나>에게는 [자기 바깥에 달리] 선(善)이 없으니, 그 밖의 어떤 것을 원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하나>는 초-선(超-善)으로서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선이니, 물론 다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참여할 능력을 갖고 있는 의미에서 선이다.(Enn, VI 9, 6)


 모든 조성된 선한 것을 네가 다 가졌다 할지라도 다행하고 복될 수가 없고, 오직 모든 것을 조성하신 하느님 안에 너의 모든 복이 있고 모든 낙이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미련한 자들이 무엇이라 하고 어떻다고 찬미한다고 그것이 행복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착한 신자들이 희망하는 그것, 천상적 생활을 하는, 마음이 조촐하고 경건한 영혼들이 어떤 때에 맛보는 것, 그것이 참된 행복이다... 주 예수여,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나와 함께 하소서. 인간의 모든 위로를 즐겨 사양하는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준주성범 제3권 16장> 中


 이처럼 <철학의 위안>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함께 중세철학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 본다면, 보에티우스와 그의 저서 <철학의 위안>을 둘러싼 여러 논란(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왜 <철학의 위안>에는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충분히 긴 시간 간격을 두고 볼 때, 지질학은 종(種)이 모두 변화해온 것을 뚜렷이 밝혀 주며 더욱이 종은 나의 이론이 요구하는 방법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변화해 왔음을 명백하게 선언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연속되는 지층에서 나오는 화석유물이 서로 시간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는 지층에서 나온 화석보다 훨씬 더 서로 밀접한 유연관계를 갖는 것에 의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p457) <종의 기원> 中


 <철학의 위안>을 통해 '플라톤주의 - 신플라톤주의 - 중세 신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철학의 위안>이 '잃어버린 고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다만, 이대로 마치면 철학이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아래의 문장을 옮겨본다. 아마도 아래의 문장이 그나마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어느 면에서든 현재 상태에 불만이 전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불안과 근심으로 가득 찬 것이 인간사(人間事)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사는 결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지는 않는 법이며 또한 항상 변함없이 머물러 있는 일도 없다.(p68)... 운명의 여신이 내려준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누구에게 있어서나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으며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 있다.(p69) <철학의 위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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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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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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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2-17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불안, 두려움, 공포도 우리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 감정이죠. 나침반이 동서남북이 다 있어야 지금의 위치를 알 수 있듯이. 부정적인 것을 적대시하며 ‘선‘을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싶긴 합니다. 선-악을 나누는 종교적 관점과 사고의 결합이 ‘선‘의 위치를 이리 격상시킨 것도 같고.... 심리적으로도 이익적으로도 ‘선‘이 더 좋게 받아들여지는 건 이해가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일찍부터 음양의 조화를 말해온 동양철학은 참 깊은 혜안이죠.

겨울호랑이 2019-02-17 21:07   좋아요 1 | URL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최고선‘이 있다고 가정하고 모든 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양철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최고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수‘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최고선‘ 이 있다고 하기보다 ‘더 나은‘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2019-03-04 17: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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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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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천재 엉덩이 탐정」시리즈는 요즘 유치원 원아들과 저학년 아이들에게 인기 좋은 책입니다. 저희 집 아이도 많이 좋아하네요. 도서관에서는 항상 대출중이고, 아내 말에 따르면 학교 도서관에서도 서로 보려고 다툴 정도이니 그 인기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연의가 책을 보자고 많이 졸라 설 연휴에 1권부터 5권까지 사서 같이 읽었습니다. 책 주인공인 엉덩이 탐정이 조수인 브라운과 함께 사건을 풀어가는 포맷으로 구성된 책 안에서 여러 추리 소설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탐정과 조수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기본 구조는 ‘셜록 홈즈‘에서 가져왔지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책의 특성상 엉덩이 탐정은 조금은 더 인간적인 ‘에르큘 포와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매회마다 극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이러한 부분은 ‘명탐정 코난‘에서 축구공으로 범인을 잡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여러 탐정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친숙함을 주고, 잔인한 살인 사건 대신 가벼운 사건을 배경으로 하기에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이런 설정이 아이들에게 다가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이야기 전개 도중 미로찾기, 다른 그림 찾기 등 추리적 요소가 아이들 흥미를 가져와 책이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책을 읽어주면서 부모와 아이가 함께 찾기 게임을 즐길 수 읽기에, 부모들 입장에서도 한숨 돌릴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만, 추리물과 게임물의 경우 흥미가 다른 책에 비해 크게 반감될 수 있다는 점은 부모입장에서는 감안해야 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만, 아이들이 한 번이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면 좋은 책이겠지요? ^^:) 연의 입장에서 평점을 매기고 이만 리뷰를 마칩니다. 즐거운 독서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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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0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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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0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12: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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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1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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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1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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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8: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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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8: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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