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이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간단하게 보여 주겠다. 너에게 너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너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너는 네가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어떤 것, 운명의 여신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p70) <철학의 위안> 中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Torquatus Sererinus Boethius, AD 480 ~ AD 524)는<철학의 위안 The Consilation of Philosopy>에서 완전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찾아간다. 보에티우스가 스콜라(Scholar) 철학 선구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론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위안>을 읽을 때 느낀 즐거움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철학의 위안>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용 안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려 한다.
<철학의 위안>은 여러 가지 의문들 - 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정말 그가 기독교였다면 투옥과 죽음에 임박한 시간에 마땅히 그의 가장 큰 위안이 되었어야 할 신앙에 대한 언급이 어찌하여 <철학의 위안> 속에 전혀 없는가? -로 둘러싸여 있다.(p14) <철학의 위안> 서문 中
<철학의 위안> 속에서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요소들을 차례로 제시하며, 이들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플로티노스(Plotinus, AD 203 ~ AD 270)의 <엔네아데스 The Enneads>의 철학을 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 逆說)이며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것은 행운보다 불운이 인간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행운은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소로 너희를 속인다. 반면에 불운은 변화함으로써 그 참된 모습인 변덕스러움을 드러내기 때문에 항상 진실하다. 행운은 인간을 속이지만 불운은 인간을 깨우쳐 준다(p91) <철학의 위안> 中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런(고통스러운) 것들이 그때마다 그들의 경우와 똑같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 그러면 고통이란 어쩌면 우리 영혼의 나약함과 관련된 것이리라.(Enn, I 4, 8)
<철학의 위안>에서는 불운이 행운보다 유익할 뿐 아니라, 재물과 권력은 '결핍'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들로 인한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위안>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일단 손에 넣게 되면 바랄 나위 없는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좋은 모든 것들의 완성이며 자신의 좋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뭔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행복일 수 없다. 거기에 내포되어 있지 않고 뭔가가 부족하다면 여전히 그것을 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모든 좋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상태이며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애쓰는 목표임이 분명하다.(p98) <철학의 위안> 中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베르길리우스' 나 플라톤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역할을 <철학의 위안>에서는 의인화된 '철학'이 수행한다. 그리고, 여신 '철학'은 화자인 보에티우스를 산파술을 통해 행복의 정의로 끌고 나간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神)은 선(善)하다는 것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신보다 더 선한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선은 그 어느 것보다도 우월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신의 선함이 완벽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이성(理性)은 신이 그토록 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준다.(p133) <철학의 위안> 中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 self sufficient)인 인간, 강한 인간, 존경 받기에 합당한 인간, 영예롭고 유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행복입니다... 자족, 강함, 존경, 영예, 유쾌는 모두 같은 것이므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저는 조금의 의혹도 없이 알고 있습니다.(p129)... 만물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초석(礎石)이 놓이지 않을 것입니다.(p130) <철학의 위안> 中
<철학의 위안>에서는 결핍이 없는 진정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진정한 선은 바로 신(God)에서 찾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결국, <철학의 위안>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신(神)=선(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결론의 뿌리를 <엔네아데스> 이전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7)의 <향연 Symposion>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의 위안>과 고대 그리스 철학을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영혼을 신(神)과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게끔 이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Enn, I 6, 6)... 참된 지혜가 존재요, 참된 존재가 지혜인 셈이다... 이때 지혜는 [많은] 이론적인 것들로부터 종합해 낸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하나이다.(Enn, V 8, 5)
우리는 이미 신과 행복이 하나이며 동일한 것임을 증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神)은 선(善) 그 자체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p138) <철학의 위안> 中
그는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거죠.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인간에게 삶이 살 가치가 있는 건 만일 어딘가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삶에서일 겁니다.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바라보면서 살 때 말입니다.... 순수하고 정결하고 섞이지 않은 아름다운 것 자체를 보는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난다면, 즉 인간의 살이나 피부나 다른 가시적인 허접스레기에 물든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단일 형상인, 신적인 아름다운 것 자체를 그가 직관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떠하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까?(211 d ~ 212 a) <향연> 中
다음으로 <철학의 위안>은 중세철학의 어느 부분과 맞닿아 있을까? 우리는 이를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 ~ 1109)의 <모놀로기온 Monologion>의 신 존재 증명 앞 단계에서 하나의 선(신)을 가정하는 논증과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 ~ 1471)의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遵主聖範 De Imitatione Christi>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육체의 감각으로 체험하고 정신의 이성으로 분별할 수 있는 엄청나게 다양한 무수히 많은 선(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 다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하나의 선한 것 unum aliquid, per quod unum sint bona quaecumque bona sunt 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각 사물들마다 다른 선이 존재하는가? <모놀로기온 Op.p.14(p17)>
<하나>에게는 [자기 바깥에 달리] 선(善)이 없으니, 그 밖의 어떤 것을 원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하나>는 초-선(超-善)으로서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선이니, 물론 다른 모든 것들이 <그>에게 참여할 능력을 갖고 있는 의미에서 선이다.(Enn, VI 9, 6)
모든 조성된 선한 것을 네가 다 가졌다 할지라도 다행하고 복될 수가 없고, 오직 모든 것을 조성하신 하느님 안에 너의 모든 복이 있고 모든 낙이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미련한 자들이 무엇이라 하고 어떻다고 찬미한다고 그것이 행복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착한 신자들이 희망하는 그것, 천상적 생활을 하는, 마음이 조촐하고 경건한 영혼들이 어떤 때에 맛보는 것, 그것이 참된 행복이다... 주 예수여,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나와 함께 하소서. 인간의 모든 위로를 즐겨 사양하는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준주성범 제3권 16장> 中
이처럼 <철학의 위안>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함께 중세철학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 본다면, 보에티우스와 그의 저서 <철학의 위안>을 둘러싼 여러 논란(보에티우스는 기독교도였는가? 왜 <철학의 위안>에는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충분히 긴 시간 간격을 두고 볼 때, 지질학은 종(種)이 모두 변화해온 것을 뚜렷이 밝혀 주며 더욱이 종은 나의 이론이 요구하는 방법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변화해 왔음을 명백하게 선언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연속되는 지층에서 나오는 화석유물이 서로 시간적으로 매우 떨어져 있는 지층에서 나온 화석보다 훨씬 더 서로 밀접한 유연관계를 갖는 것에 의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p457) <종의 기원> 中
<철학의 위안>을 통해 '플라톤주의 - 신플라톤주의 - 중세 신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철학의 위안>이 '잃어버린 고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다만, 이대로 마치면 철학이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아래의 문장을 옮겨본다. 아마도 아래의 문장이 그나마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어느 면에서든 현재 상태에 불만이 전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불안과 근심으로 가득 찬 것이 인간사(人間事)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사는 결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지는 않는 법이며 또한 항상 변함없이 머물러 있는 일도 없다.(p68)... 운명의 여신이 내려준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누구에게 있어서나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으며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 있다.(p69) <철학의 위안>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