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과 순수성 -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30
프라센지트 두아라 지음, 한석정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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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1 독립운동 이후 식민체제 내 여러 집단들은 기존의 식민정부를 개편할 필요를 지적했다... 그러나 실험은 계속되지 않았고, 아이디어와 에너지는 만주국으로 이월되었다. 만주국이 일본 식민주의의 궤적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아시아주의적 동맹, 엔 블록(yen bloc), 발전과 동원의 새 전략을 포함하는 자급자족권의 실현에서 시작이요, 첫 단계를 나타냈다.(p429)

만주국은 일본 제국의 성질에서 근본적 변화들의 신호탄이 된다. 조선과 타이완의 본격 산업화 단계와 발전은 1931년 이후에 도래하는데, 만주국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적 자급자족체 계획의 한 부분으로 등장했다.(p430)

만주국은 제국주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외래인들에 의한 직접 통치와 노골적 착취로부터 간접 통치, 지방 엘리트들과의 협력 장치, 자치, 유사 독립성, 그리고 여타 수단들과 같은 대안으로 이행한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지구적 제국주의와 일치했다.(p432)

만주국은 어떤 점에서 내가 ‘동아시아적 근대‘라 부르는 것의 예시가 되었는가... 역사적 자원들은 국가 만들기와 통치성의 목적으로 국가의 주도권에 도덕적 힘을 불어넣고, 민간사회와 가족을 복속시키기 위해 동원되었다. 신생활 유교운동과 ˝도덕적 교화˝가 국가가 관리하는 대중조직을 통한 동원을 허용하고, 중심부의 전통을 변방에 확장시킴으로써 변방의 문화적 투자가 내면화되었다. 이런 식으로, 만주국의 경험은 한국, 중국, 일본의 것과 일치했다.(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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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1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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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1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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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내는 삶의 무의미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너머에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선하고 접근하기 힘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게 불가능한 보다 견고한 현실인 <페드르>와 '라 베르마가 말하는 방식'이 있었으니까.(p7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cote de Guermantes> 에서 주인공 '나'는 아버지가 준 오페라 입장권을 가지고 공연장에 간다. 오페라 극장에서 '나'는 <페드르 Phedre> 와 라 베르마의 연기를 통해 예술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 부분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1> 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오페라 공연 후 주인공은 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림] Phedre by Jean Racine(출처 : https://ticklemebrahms.wordpress.com/2013/06/01/phedre-by-jean-racine/)


 우리는 한 세계에서 느끼고 다른 세계에서는 생각하고 명명하며, 그리하여 이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일치점을 설정할 수 있지만, 그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했던 거리감이자 균열이었다... 한 인간 또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과 아름다움의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는, 그 인간이나 작품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과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을 알아보지 못한다.(p8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주인공이 느낀 거리감과 균열.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었을까.

 

 배역 자체에는 문학적 가치가 없었지만, 라 베르마는 이 배역에서도 페드르 역 못지않게 숭고했다. 나는 비극 배우에게서 작가의 작품이란 탁월한 연기 창조를 위해 그 자체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저 하나의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84)... 하나의 운(韻)을 듣고, 다시 말해 앞의 운과 비슷하면서 다른 뭔가가 앞의 운에 의해 유발되어 새로운 관념의 변주를 끼워 넣을 때, 우리는 사상과 운율이라는 두 체계가 포개지는 걸 느끼는데, 바로 이것이 이미 조직화된 복잡성, 아름다움의 첫 요소가 아닐까?(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주인공 '나'는 라 베르마의 연기를 통해 오페라에서 배우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라신(Jean Baptiste Racine, 1639 ~ 1699)의 비극 <페드르>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비극이지만, 관객은 배우의 해석과 표현에 따라 감동(感動)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인공이 오페라를 통해 느꼈던 감정, 그것은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1874 ~ 1940)의 <연극에 대해 О театре>에서 '연극 - 이것은 배우 예술이다.'에서 말한 '관객의 수동적 경험' 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다르다.


 관객은 오직 무대 곁에서 인지하고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배우들과 관객 사이는 한쪽은 단지 행동하고 한쪽은 단지 받아들이는, 서로에게 낯선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버리는 경계가 나타난 것이다.(p87) <연극에 대해> 中


 메이예르홀트가 말한 간극은 '배우 - 관객'의 다른 역할에서 온다. 때문에, 배우의 세계와 관객의 세계가 다르다는 주장을 한다. 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나'는 연극에서 '배우 -> 관객'의 일방적 관계안에서 라 베르마의 연기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와 '배우의 세계'가 다르다는 생각 대신, '배우의 세계'와 '작가의 세계'가 다르다는 다른 간극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아가 '작품 = 질료(質料, hyle)'이며, '배우 = 형상(形相, eidos)'의 도식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찾는 것은 밑감(질료)의 원인이며, [이것은 꼴(형상)이다.] 이것 때문에 밑감은 어떤 (특정한) 것이 되고, 그리고 이것은 (그 사물의) 실체다. <형이상학 Metaphysica> (제7권, 1041b 8 ~ 10)(p35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322)는 <형이상학>을 통해 세계는 위계질서로 모습을 드러내며,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것들은 비물질적인 실체들인 반면, 현실태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형상안에 많은 질료가 복합되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W.D 로스)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로 돌아와 주인공에 따르면, '작품'은 '질료'가 되고, 배우는 '형상'이 된다.  연극(오페라)에서  작품은 배우를 통해 관객들에게 나타나기에 질료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론과 주인공의 깨달음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의 깨달음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미묘하게 다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에서 찾아야 한다. 사실, <페드르>와 같은 비극(悲劇)관련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시학 Peri poietike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을 철저하게 '모방(Mimesis)'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해당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제로 연기하기 때문에, 첫째로 볼거리가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는 노래와 조사(措辭)가 필요하다. 이 둘이 모방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바로 운율의 배열을 의미하며, 노래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하는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의 측면에서 특정한 성질을 지니기 마련이다.(6장 1449b 30 ~ 38)(p362)...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갖기 마련이며, 이 여섯 요소에 의해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 성격, 조사, 사상, 볼거리, 노래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둘은 모방 수단이고, 하나는 모방 양식이며, 셋은 모방 대상이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6장 1450a 8 ~ 11)(p363) <시학>  中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짜임새(플롯 plot)이며, 이는 비극이 인간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공 '나'에게 중요한 요소는 형상으로 나타난 '배우'이며, 배우의 발성(發聲)과 음운(音韻)에서 감동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주인공 '나'에게 큰 감동을 준 라 베르마의 연기는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의 견해는 이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겨진다. 짜임새가 결국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조직된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라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감동의 근원은 작가일 것이다. 그리고, '모방'을 제목으로 한 <미메시스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의 저자 에리히 아우어바흐 (Erich Auerbach, 1892 ~ 1957) 역시 <페드르>가 주는 감동의 근원을 작가 라신에게서 찾고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이 대상으로 한 소수 계층의 성격을 통하여 특히 그 사회적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바로크의 고양된 형식과 그것이 어떻게 예술 취미의 이성적인 개념과 결합되었던가를 이해하고 또는 적어도 그것을 공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비극의 인물을 치켜올려 보는 바로크 형식이 그 대표적 예가 되는 바, 비극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극단적인 분리를 설명할 수 있다.(p524)... 라신의 비극에 그려 있는 사랑의 정열은 관객을 압도한다. 결과가 비극적이라고 해도 비극에 그려 있는 거대하고 장엄한 운명을 찬양하고 모방하라고 관객을 유도한다. 이것은 특히 <페드르>의 경우에 그렇다. 페드르는 신의 은총을 거부했을 뿐 기독교적인 면을 가진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영향은 전혀 기독교적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p525) <미메시스> 中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에서 주인공 '나'는 '분리된 세계'의 간극 측면에서는 메이예르홀트와 의견을 달리 하며, '감동의 근원' 측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우어바흐의 입장과는 다르기에 독창적인 예술관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에서 주인공의 예술관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이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는 두 세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반의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들렌 과자 등의 어떤 기제(機制)를 통해서 현재와 구별되는 인식되지 않는 '잃어버린 시간'의 이야기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배우로 표현되는 '기억된 이미지'인지, 아니면, 나타나지 않은 숨겨진 '실체의 이미지'인지. 작품 전체를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할 지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안의 <페드르> 공연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전체의 축소판으로 생각된다.


 추억은, 내가 불완전하게만 소유하는 추억은 이따금 내게서 빠져나갔다.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처럼 내 마음속에 몇 시간 떠돌다가, 그 이미지가 나타나기 전에 품었던 낭만적인 관념과 더불어 점차 하나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연상 작용으로 발전했으며, 따라서 추억이 가장 잘 떠오르는 바로 이런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 추억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추억이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p98)... 추억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추억을 간직하는 행운을 가졌던 이런 짧은 시간 동안 추억은 정말로 매혹적이었으리라. 그러다 점점 이 관념이 추억을 보다 결정적인 형태로 고정하면서 추억은 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추억 자체는 보다 흐릿해졋다. 나는 더 이상 추억을 되찾을 수 없었다.(p9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우리는 한 존재에 대한 감정에, 그 존재가 일깨우지만 그 존재와는 무관한, 이미 예전에 다른 여인에 대해 느꼈던 많은 감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특별한 감정을 뭔가 우리 마음속에서 보다 일반적인 진리에 이르게 하려고 애쓰며, 다시 말해 인류 전체에 공통된 보편적 감정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 보편적 감정과 더불어 개인과 개인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아픔은 과거의 우리와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p19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그리고, 이러한 배경 위에서 주인공의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사랑, 독백 등의 의미가 작가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읽은 페이지가 이제는 제법 많아졌지만, 그 이상으로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짙은 어둠 속을 헤매는 마음을 뒤로 하고 일단 다음 권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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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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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1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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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 이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루트비히 폰 미제스 외 지음, 전용덕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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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화폐의 절대량이 감소한다면 화폐 수요가 줄어들 것이고, 가격들은 하락할 것이 틀림없으며, 심각한 공황이 올 것이라는 것이 진실이다.(p50)

은행의 예금 축소는 경제 상황을 뒤집고 축소와 버스트가 붐을 뒤따른다. 은행들이 신용을 줄이면서 재계는 빚을 상환하고 신용을 줄이라는 압박이 더해짐에 따라 어려움에 처한다. 은행화폐의 공급이 줄어들면서 그다음에는 재화들의 가격이 일반적으로 떨어진다. 화폐 공급과 소득이 떨어지고 국내 재화들의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재화는 외국 제품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이게 되고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면서 국제수지가 적자에서 흑자로 바뀐다. 금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증가하고 있는 금 베이스 위에 있는 은행화폐는 줄어들면서 은행의 상태가 훨씬 더 건전해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경기변동에서 공황 단계라는 뜻이다.(p85)

미제스는 경기변동의 원인으로 정부와 중앙은행의 간섭에 의해 추진된 인플레이션적 은행 신용창조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한다.(p96)... 따라서 미제스의 공황 분석에 따르면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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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8-05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제스의 인플레이션 분석에 핵심 주체가 빠진 것 같습니다. ‘기업’... 정부와 중앙은행이 그런 일을 하는 궁극적 주체 말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5 19:13   좋아요 1 | URL
오스트리아 학파 사상이 학자별로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모든 화폐정책은 완벽하게 무력하고 통화공급은 일플레이션만 불러올 뿐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의견이 하나로 모이는 것 같습니다. 미제스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학파가 정부의 무개입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시장의 자율조정을 강조하는 만큼, 굳이 ‘기업‘을 내세울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미제스 때부터 이미 ‘기업‘을 ‘그림자 정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5 19:48   좋아요 1 | URL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가 아닌 ‘기업 때문에 정부는 하지 않을 수 없다’로 미제스는 글을 썼어야 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5 19:54   좋아요 1 | URL
만약 그렇게 했다면, 신자유주의가 아마도 이토록 세를 불리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15 14:22   좋아요 1 | URL
아, 제가 마제스 이론을 잘못 알았네요. 미제스의 타겟은 정부지 결코 기업이 아니었네요. 미제스 이론에서 어찌보면 기업도 피해자네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8-15 18:07   좋아요 0 | URL
미제스가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미제스의 이론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권정생은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등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권정생의 낯선 사랑법> 中


 오늘 성당 주보에 실린 글을 읽다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집에 돌아와 아이책 중 <강아지똥>을 모처럼 꺼내어 다시 읽어본다.

 

 "뭐야! 내가 똥이라고? 더럽다고?"

 강아지똥은 화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어요.(p2)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강아지똥은 쓸쓸하게 혼자서 중얼거렸어요.(p8) 


 "네가 거름이 돼 줘야 한단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p10)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p13) <강아지 똥> 中


 <강아지똥>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지만, 몇 번을 읽어도 마음에 잔잔함을 퍼뜨린다.  말 그대로 강아지 똥이, 시간이 흘러 새로운 생명 민들레 싹을 틔워내는 이야기안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담겨있을까. 얼핏 <강아지똥>의 이야기는 다른 동화, 특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 1875)의 전래 동화와 많은 닮은 듯하다.  

 

 오리 새끼는 물 위로 날아가서는, 아름다운 백조들 쪽으로 헤엄쳤다. 백조들이 오리 새끼를 발견하더니 날개를 펼치고 그를 만나러 달려왔다. "좋아. 나를 죽여, 죽여봐"하며 불쌍한 새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죽음을 기다리듯이 머리를 물 쪽으로 숙였다. 그런데 맑은 물 표면에서 오리 새끼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오리 새끼는 자신이 더 이상 꼴사나운 새가 아니며, 못생기고 불쾌한 얼굴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 자신이 바로 한 마리 백조였다!(p382) <주석달린 고전동화집, 미운 오리 새끼> 中


  "한 인간이 너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너를 더 소중히 여긴다면, 또한 그가 가슴과 영혼으로 너를 사랑하고 성직자 앞에서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너에게 충실하고 진실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너의 손에 그의 오른손을 올려놓으면, 그의 영혼이 너에게로 미끄러지듯 들어오게 될 것이고, 너도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몫을 얻게 될지도 모르지.(p401)... 왕자님과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p403) <주석달린 고전동화집, 어린 인어 공주> 中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주인공이 새롭게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미운 오리 새끼>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면에서는 <작은 인어 공주>유사점이 있는듯하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 보다 깊게 들어가면이들 안데르센 동화와 <강아지 똥>은 크게 2가지 면에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오리 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하는 이 고전동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자신감 부족과 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으로 읽혀왔다.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초라한 상황을 벗어난다. 오리 새끼는 때가 될 때까지 그저 묵묵히 굴욕과 궁핌 그리고 위험 요소들을 참아냈을 뿐이다.(p366)... 안데르센은 미운 오리 새끼의 타고난 우수성이 다른 혈통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오리들과는 다르게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알에서 부화된 것이다.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왕과 귀좃가회를 아름다음과 연관시키는 문화적 편견을 영속화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 속에서 미덕을 찾는 경향, 즉 고통의 숭배를 조장한다.(p367) <주석달린 고전동화집, 미운 오리 새끼 註> 中


 어린 인어공주에게는 조용한 인내심을 넘어서는 세속적인 야망이 있다.(p384)... 어린 인어는 처음에는 바다 마녀가 줄 수 있는 것에 유혹되어 마녀의 처소를 방문하는 데 따른 여러 위험에 용감하게 맞선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왕자를 찌를 칼을 바닷속으로 던져버림으로써, 바다 마녀의 검은 마술을 버리고 불멸의 삶을 얻을 기회를 얻는다.(p385)<주석달린 고전동화집, 어린 인어 공주 註> 中


 <미운 오리 새끼>와 <어린 인어 공주>는 모두 태생적으로 고귀한 존재들이다. 오리 새끼는 '백조'의 혈통을, <어린 인어 공주>는 말 그대로 공주다. 이들은 각각 시련을 겪기는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그들안에 내재(內在)한다. 특히, 미운 오리 새끼에서 그런 면이 두드러지지만, 인어 공주에서도 고귀함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크게 같은 부류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성령(聖靈)이 육화(肉化)'된 것처럼 보통 이하의 존재로 하강한 후 시간의 흐름 또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승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플라톤(Platon, BC 427 ~ BC 348) 의 동굴의 비유 또는 기독교의 메시아(Messiah)의 모습이 동화 안에 구현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림] 무염시태 immaculata conceptio beatae virginis mariae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Feast_of_the_Immaculate_Conception) 


 그렇지만, 강아지똥은 그냥 똥이다... 안데르센 동화의 두 이야기가 금수저의 유학생활을 다룬 이야기라면, <강아지똥>은 흙수저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평범한 이가 발견하는 삶의 의미. 이것이 첫 번째 차이라 생각된다.


 두 번째 차이는 두 이야기에서 고난을 겪고 얻어낸 성취가 '개인' 수준을 넘지 않는데 반해, <강아지 똥>에서는 자신을 넘어섰다는 점에 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오리 새끼는 '아름다운 미모'를 얻었고, <어린 인어 공주>는 다른 방식의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자신들이 열망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변은 이들로 인해 바뀌지 않는다.

 

 단순한 즐거움이나 고통이든 아니면 이들의 변형된 형태든, 사람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관념들 거의 대부분을 우리는 자기 보존과 사회라는 두 가지 항목 아래 분류할 수 있다(p83)... 개인의 보존과 관련된 감정들은 주로 고통이나 위험이 있을 때 생겨나며 모든 감정들 중에서 가장 강한 감정이다.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나 위험의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강한 감정인 숭고의 원천이다.(p84)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中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 1729 ~ 1797)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에서 숭고(崇高)의 기원 중 하나를 자기 보존에서 찾고 있다.    

 버크의 관점을 따른다면,  미운 오리 새끼, 어린 인어 공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숭고미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강아지똥에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않고, 민들레라는 타자(他者)에 의해 발견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키워낸다는 점에서 이들의 숭고를 넘어선 다른 의미에서 거대함(greatness)이 있지 않을까. ('거대함'은 버크가 <탐구>에서 논하는 숭고함의 필수적 요소이다.) 


 만약, 우리가 <강아지 똥>에서 숭고미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했을 때, 그 숭고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숭고미의 근원을 우리 문화와 작가에서 찾을 수 있다 생각한다. 먼저,  우리 신화(神話) 안에 담긴 숭고미를 살펴보자. 전국 여러 곳에서 폭넓게 이야기로 전해오는 <당금애기> 속에서 우리는 자기 희생의 신성(神性)을 발견할 수 있다.

 

 (당금애기에서) 운명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실현되는 무엇이 아니다. 거기 대면하여 감당하기를 시작할 때 비로소 그것은 나의 삶이 되어서 의미를 발하게 된다. 이 신화에서 당금애기는 무척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형태로 운명에 휘둘리는 존재로 보이지만, 되짚어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방문 밖으로 나가서 시준님을 대면했고, 그를 방 안에서 들여서 자게 했으며, 그와의 만남을 운명으로 여겨 결연을 받아들였다. 뱃속에 버거운 생명이 자라났지만 마침내 그로부터 도피하지 않았다. 깜깜한 돌함 속에 홀로 갇혀서도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세상의 조롱과 박해를 무릅쓰고서 그 아이들을 키워냈다. 누군가 하면 세상의 신령한 구원자로.(p92)...  당금애기는 이렇게 한 명의 딸로부터 여자가 되고 또 어머니가 된다. 키워지던 존재에서 홀로 선 존재가 되고 타인을 키우는 존재가 된다. 요컨대 당금애기는 자신의 운명과 대면하여 그것을 감당함으로써 존재를 실현한 자였다. 일컬어, 신(神)!(p93) <살아있는 한국 신화> 中 


 이러한 전통 문화의 바탕 위에 고된 삶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작가의 맑은 정신이 <강아지똥>안에 담겨 있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 것은 아닐까. 마침 오늘 미사 주보에 실린 짧은 에세이 중 작가 권정생(權正生, 1937 ~ 2007)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 본다.


 권정생은 살아있는 모든 목숨이 애틋했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과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게 아닌가, 연민을 느꼈다. 그에겐 위아래가 따로 없었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으로 위아래를 나누는 나누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했다. 약탈과 실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제국주의도 전쟁도 빈부도 독재도 분단도 미워했다. <권정생의 낯선 사랑법> 中


  <강아지똥>안에서 <당금애기>에서와 같은 숭고를 넘어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넘어선 타인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강아지똥>안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전통의 아름다움 위에 작가 권정생의 아름다운 정신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아지똥>의 이야기는 순박하고 정겹다. 그리고, 이러한 숭고미가 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캘리번과 마녀 Caliban and the Witch>>의 저자 실비아 페더리치(Silvia Federici)가 말한 자본주의가 살해한 여신(女神)의 모습 안에는 위와 같은 숭고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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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8-05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서양의 차이만 보기보다 작가의 세계관(물론 사회 인식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차가 크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어렸을 때 자신의 부모가 사실은 가짜이고 진짜 부모는 대단한 사람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단계가 있잖아요. 그런 게 이야기에 반영된 게 더 크다고 저는 생각되네요^^;
그럼에도 권정생 선생의 아름다운 정신은 존경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8-05 08:28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작가 역시 사회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기 때문에, 이들을 구별하는 것이 사실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러한 작가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cyrus 2019-08-05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크가 말한 숭고는 거대한 자연(바다,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 산)을 마주할 때 두려워서 아찔함을 느끼는 감정 상태라고 정의한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버크의 책을 더 읽어보고 난 후에 제 의견을 밝혀야겠지만, 어떤 존재의 자기희생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버크의 숭고와 연관 짓는 겨울호랑이님의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버크가 숭고의 개념을 말할 때 언급한 ‘거대함’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8-05 18:46   좋아요 1 | URL
cyrus님께서 말씀하신 버크의 숭고와 관련된 부분을 옮겨보겠습니다.

‘자기 보존과 관련된 감정들은 고통이나 위험에서 생겨난다. 그 원인이 직접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경우 그러한 감정들은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으면서 고통이나 위험을 느낄 경우 그러한 감정들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이러한 안도감은 고통에서 생겨나며 실질적인 즐거움과 다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숭고하다고 부른다. 자기 보존과 관련된 이러한 감정들은 모든 감정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들이다.(p98)‘<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中

저는 위의 책에서 버크가 말한 ‘숭고‘의 개념을 절박한 위험이나, 두려움, 고통에서 벗어난 직후 경외감, 두려움 등이 짙게 배인 평온함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버크가 말한 ‘숭고의 원천‘ 중 자기 보존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은 cyrus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욕구가 가장 감정의 욕구라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이는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과도 통한다 생각합니다... 잠시 엇나갔습니다만, 그렇게 본다면 버크의 ‘숭고‘는 ‘평안함을 주는 가장 강한 감정이 상태‘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안전‘을 뛰어넘은 ‘자기의 희생‘은 더 숭고하다 생각됩니다. 자신의 안전이 ‘better‘라면 자기 희생은 ‘the best‘가 아닐까 생각해서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설명의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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