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만난 동생의 서재에서 몇 권의 책을 발견하고 챙겨 돌아왔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인데, 1권이 2011년에 나왔으니 벌써 10년 전에 나온 책이다. 그 사이 읽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던 시기라 선뜻 읽을 새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시작했던 때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워지면서, 이제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버린 듯하다. 가장 큰 문제는 영웅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작가의 역사관이라 여겨지지만, 작가의 다른 장점은 허구와 실제 사건의 경계를 허무는 명쾌한 서술은 무더운 여름날 부담없이 읽힐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빌려와 읽었고 간략을 정리해본다.
























 <십자군 이야기>는 시대적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소설 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와 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 , <로도스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의 사이에 위치한 작품으로,  제4차 십자군 전쟁과 관련하여 <바다의 도시 이야기>와도 깊은 관련을 갖는다.


 전체 3권으로 구성된 <십자군 이야기>는 제1권에서 성지 탈환이라는 관점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원정인 제1차 십자군 전쟁의 막전막후를 다룬다. 제2권은 제3권 사자심왕 리처드와 라이벌 살라딘의 대결을 위한 사전 포석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제3권에서 두 인물의 역사적 대결애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이후  제7차 십자군 원정까지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이러한 구성은 과거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중 무려 2권에 해당하는 분량을 카이사르에게 할당한 것을 연상시키는데, <로마인 이야기>의 중심이 카이사르에게 있는 것처럼, <십자군 이야기>에서 중심은 리처드 VS 살라딘이다. 또한, <십자군 이야기>에서 대부분 내용이 <로마인 이야기>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제2권 <포에니 전쟁>에서처럼 전사(戰史) 위주로 서술되기에 흥미롭고 빠르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은 <로마인 이야기>는 전체 15권 중 무게중심이 앞에 있어 뒷부분은 늘어진다는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십자군 이야기>가 독자들을 끝까지 끌어들이는 원동력이 된다.(물론, 3권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도 흡입력에 한 몫한다.)













 다만, 이러한 구성 덕분에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의미와 배경등에 대한 설명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십자군 이야기>에는 유럽의 많은 귀족 자제들이(차남 이하의 아들들) 십자군전쟁에 참여해서 열정적으로 전투에 임한 장면에 엄중함을 더해 참여귀족들의 가문 문장까지 소개하며 웅장하게 서술한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제후와 왕 중심의 내용 전개에는 제1차 십자군 당시의 민중 십자군 운동이나, 십자군 운동 후반기의 소년 십자군 운동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저자는 <십자군 이야기>의 여러 곳에서 일본사를 끌어다가 설명한다. 주로 쇼군(將軍)과 다이묘(大名) 중심의 전국시대 역사관의 연장선상에서 제후들과 왕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이는 흥미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온전하게 바라보는 것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렇다면, <십자군 이야기>를 보다 깊이있게 보기 위해 어떤 책들을 곁들어 읽으면 좋을까. 생각나는 자료 몇 편을 올려본다.


 먼저, 움베르트 에코의 <중세> 시리즈가 다소 방대하지만, 읽을 수 있다면 중세 시대 배경을 이해하는데 훌륭한 조력자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여력이 된다면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서양의 장원제>까지 읽을 수 있다면, 십자군 전쟁 뿐 아니라 중세 전반을 이해하는데 충분하다 생각된다. 봉건사회와 경제적 기반이 되는 장원제에 성립과 발전, 붕괴 등 전반에 대한 이해는 당시 중세 기사들뿐 아니라 많은 소작인, 부랑인들이 성지탈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중세인들이 결코 '종교'적인 인간들이 아니었음도 알게 된다.



























 여기에 더해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십자군 이야기>는 서구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물론, 저자 나름의 노력으로 2권은 이슬람에 조금 더 비중을 두었으나, 이는 살라딘이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한 밑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 쪽 시선은 거의 반영되지 않은 한계를 보완할 필요가 생기는데,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이슬람 진영의 대 십자군 전쟁>, <성찰의 서>등은 새로운 시각을 갖는데 도움을 주는 책으로 여겨진다. 



 물론, 더 좋은 책들이 분명 많겠지만 아는 한도내에서 정리해 본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서구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긴 하지만, 당대 유럽인의 관점에서 성지 탈환의 의미를 찾는다면, <해방된 예루살렘>이라는 작품이 좋을 듯하다. 다만, 밀턴의 <실락원>에 등장하는 신과 사탄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이는 구도로 전개되는 내용은 뚜렷한 선(善) - 악(惡) 구도를 갖추고 있으며, 신의 대리전이라는 양상은 <일리아드>의 재판이라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관심있다면 좋은 책이다.


이제는 좀 더 생생한 현장에 대해 이해를 도울만한 책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십자군 이야기>의 대부분 사건이 전쟁과 전투와 관련한 내용이다. 그래서,당대 무기와 전쟁에 대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흥미롭게 읽힌다. 예를 들면, 회전(會戰)과 공성전(攻城戰)에 쓰이는 무기와 전술은 다르고, 유럽의 중무장 기병 중심 전술과 이슬람의 경무장 궁병을 중심으로 한 전술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정리해 둔다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은 1187년 하틴(Hattin)전투 이래 예루살렘 공방전까지의 양상을 실감나게 보여주기에 책을 읽기 전 미리 감상하면 책을 보다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십자군 이야기> 2권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야기를 영화화했는데, 실제 역사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당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좋은 영화라 여겨진다. <전쟁의 역사>와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는 십자군 원정의 주요 전투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이 담겨있다.


 이미 10년 전에 나온 책을 뒷북으로 읽고서 요란하게 떠든 감이 없진 않지만, <십자군 이야기>만으로 십자군 역사 전반을 읽었다고 보기엔 깊이가 떨어지는 것 같아 페이퍼를 작성해 본다. 이제 <십자군 이야기> 각권을 간략하게나마 리뷰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자...


PS.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도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 이 작품은 십자군 역사를 조명했다기 보다, 미국과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작품으로 느껴졌다. 이후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나, 읽질 않아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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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10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카넷에서 나온 <해방된 예루살렘>도
절판되기 전에 사야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시오노 씨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로마인
이야기>는 정말 죽어라고 읽었었는데
말이죠.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는 정
말 오래 전에 인터넷 연재로 만나게
되었는데, 역사서술 보다는 지적해
주신 대로 새로운 십자군 전쟁에 대한
비판이 주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8-10 15:30   좋아요 1 | URL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사야할 책도 많지만, 능력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절판이나 품절되기 전에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출판 즉시 산다면 금방 예산이 거덜나고...ㅜㅜ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책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후에는 아무래도 작가의 세계관이 공감받기 힘들기 때문이겠지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당시에는 날카로운 시대비판이 인상적이었지만, 시대가 지난 지금에는 그렇게까지 와닿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작품은 강렬하지만 짧은 생명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님 비가 다시 많이 오네요.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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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가메쉬, 내가 너에게 숨겨진 사실을 말해주리라. 신들의 비밀을 네게 말해주리라! 너도 분명히 알고 있는 슈루파크라는 도시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있었지. 정말로 오래된 도시였고, 그곳에서 신들이 살고 있었다네. 위대한 신들이 사람에게 홍수로 벌을 주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그들의 아버지 아누가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했지. 용감한 엘릴은 그들의 고문관이었으며, 닌우르타는 그들의 의전관이었고, 엔누기는 그들의 운화감독관이었는데, 지혜의 왕자 에아가 그들과 함께 맹세했네." _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p293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 Epic of Gilgamesh>에는 대홍수(大洪水)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노아의 홍수'의 원전으로도 널리 알려진 <길가메쉬 서사시>이지만, 사실 세계 여러 지역에는 서로 다른 전승의 대홍수 신화가 전해진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수메르 문명에 전승되는 이야기라면, 중국 문명에는 우왕(禹王) 이야기가 있다. 이들 지역의 대홍수 신화를 문명(文明)사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개 농업과 중앙권력이 핵심어가 될 듯하다. 수로(水路)를 활용한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구 밀집과 이 과정에서 탄생한 거대 권력(종교적, 정치적)에의 복종이 이들 신화 안에 담긴 메세지는 아닐까.

 

 초기 수메르 도시국가들의 핵심 경제활동은 관개와 농업이었다. 도시국가들마다 수백 명의 농부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들의 이름으로 소유하거나 임대하거나 물려받은 광대한 땅에서 일했다... 관개시설과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격렬하고 예측하기 힘든 홍수는 도처에서 맞닥뜨리는 가공할 위험이었다. 메소포타피아 신화에 나타나는 반쯤 신적인 왕의 지위와 국가의 정치적 정당성은 신들이 대홍수를 일으켜서 인간세계가 모두 파괴되고 물에 덮인 카오스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데서 비롯했다. 이 지역의 홍수 신화는 유일하게 사전 경고를 받은 가문이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_스티븐 솔로몬, <물의 세계사>, p59


 전통적으로 중국 황허 문명의 선조는 우왕(禹王)으로 알려져 있다. '치수(治水) 기술자'인 우왕은 역사 기록 이전 시대에 황허 강 유역 거준민들을 괴롭히던 홍수를 잘 다스린 공로로 권력을 잡았다. "물을 다스려서 대수로 속으로 흘러가도록 만들어서" 이 세상을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에 대한 답례로 부족 연합은 그에게 지휘권을 양도했다... 치수는 인간의 수기(修己)와 자연 질서와의 관계의 올바른 원칙에 대한 철학적 논쟁의 틀이 되었다. _스티븐 솔로몬, <물의 세계사>, p128


 다만, 이들 신화에서 차이점이 있다면,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노여움으로 발생한 대홍수를 피하지만, <산해경> 속에서는 적극적으로 둑을 쌓아 막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점이 아닐까. 이를 소극적 대처에서 적극적 대처로의 전환, 문명화(文明化)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권력층을 제사장 계층으로, 황하 문명의 권력층을 기술관료 계층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부분으로 여겨진다. 


 먼 옛날 우트 - 나트슈팀이 슈루파그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을 때, 인구를 줄이려고 애쓰던 신들은 지구에 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엔키 신은 그 계획을 인류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갈대집 벽에 대고 말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계획을 폭로했다. "갈대집아, 갈대집아! 벽아, 벽아! 잘 들어라. 갈대집아! 귀를 기울여라. 벽아."...  지시는 그대로 실행되었다. 우트 - 나피슈팀의 방주는 둘레가 엄청나고, 내부가 6층으로 되어 있는 정육면체였다. 마침맞게 배가 완성되어 우트 - 나피슈팀의 일가친척과 모든 생물의 씨가 배에 실렸다.... 바다도 고요해지고, 호수도 잔잔해졌다. 인간은 모두 진흙으로 돌아갔다. _<초창기 문명의 서사시 : 메소포타피아 신화>, p88

 

 그때 갑자기 기주의 동도(東都)에서 큰 물난리가 나서 곤이 쌓았던 둑이 대부분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하여 넘쳐난 물 탓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요임금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애통해하며 순에게 말했다. "짐이 직접 순수를 해야 할 일이나 나이가 들어 위험하니 어쩔 수가 없소. 지금 그대에게 명하노니 대사농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상황을 살피고, 정말로 곤이 처리를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천재지변에 의한 것인지를 명백하게 밝히도록 힘쓰시오."(p396)... 요임금 때 홍수가 하늘까지 차고 넘쳤다. 곤은 요임금의 식양(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곡물과 채소, 과일이 자라나는 흙)을 훔쳐 둑을 쌓아 홍수를 막고 요임금의 명을 듣지 않았다. 훗날 우가 요임금의 명을 받들어 최종적으로 영토를 구주로 나누고는 물난리를 가라앉혔다._예태일/전발평, <산해경>, p428


  자연재해를 신에 의탁하거나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막으려는 노력은 중앙집권 고대왕국으로 성장한 문명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안데스 문명에서도 이러한 대홍수 신화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재난이 일부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지구적 재난 속에서 많은 이가 희생당한 사건들은 인류 문명에 치명상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은 약 2억 5천만년 전 페름기 - 트라이아스 기 사이의 대량절멸(Permian?Triassic extinction event)을 떠올리게 된다. 


 에콰도르의 안데스 지역에 사는 카나리족 인디오들에 따르면, 마법의 산이 개입한 덕분에 인류가 절멸을 면했다고 한다. 대홍수가 땅을 휩쓸자 두 형제는 서둘러 식량을 모아 저지대를 탈출하여 우아카이난 산봉우리로 피난했다... 물이 올라오면 우아카이난 산이 그보다 더 높아져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p34)... 페루의 해안평야와 칠레 북부에 사는 치무족 인디오들의 신화에서는 한 줌밖에 안 되는 남녀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았다. 그들은 가축을 데리고 식량을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산꼭대기 바로 밑에 있는 춥고 눅눅한 동굴 속에 숨었다. _토니 앨런 외, <사라진 황금왕국 : 잉카 신화>, p36


 지구상에 존재했던 종(種)의 80 ~ 95%가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페름기 말의 대멸종. 마이클 J. 벤턴 (Micheal J. Benton)의 <대멸종 When Life Nearly Died: The Greatest Mass Extinction of All Time>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으로 시베리아 트랩 분출 설을 채택한다. 이 설(說)에 따르면시베리아 트랩 분출과 이로 인한 이산화탄소 증가가 가져온 지구온난화가 이 참상의 직적접인 원인이 된다. 이산화탄소 증가와 지구온난화. 오늘날 우리 문명에서 사용되는 화석 연료의 부정적 효과와 페름기 말 대멸종의 원인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한층 심각하게 다가온다.

 

 폴 위그널은 중심이 되는 위기를 시베리아 트랩 분출인 것으로 보았다. 세계적인 파괴현상은 시베리아 트랩 분출 동안에 발생한 각기 다른 기체들 때문이었다. 분출이 지속된 전체 기간 동안 이 기체들은 산발적으로 대기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없이 분출이 거듭되면서, 물리적 세계와 생명 사이의 모든 정상적인 상호작용이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참담한 사태로 이어졌을 것이다. 시베리아 트랩 분출 때 뿜어져 나온 네 가지 기체가 주범일 것이다. 이산화탄소 증가효과는 장기간에 걸쳐서 미쳤다. 곧,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서 곧바로 지구온난화와 무산소화로 이어졌고, 이것이 수십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 매번 분출 때마다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유입되었을 테고, 결국 어떤 정상적인 되먹임 체계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기체수화물의 배출은 그 참상에 기름을 부었을 것이다. 이산화황도 배출되었다._마이클 J. 벤턴, <대멸종>, p384


 2020년 여름. 유난히 계속되는 여름 장마철로 8월 무더위도 거의 경험하지 않고 입추(入秋)를 맞이했지만, 대신 심각한 물난리를 겪고 있다. 며칠 사이 수백 mm씩 기록되는 폭우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내리면서 저절로 과거 대홍수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대홍수의 역사 속에서도 인류 문명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렇지만,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빚어진 기후변화로부터 대홍수가 시작된다면, 우리 역시 페름기 말의 대멸종과 같은 사태를 피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페름기 말 대멸종 이후에도 살아남은 종들은 꾸준히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트리아스 기 이후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들이 계속 번성했다는 사실을 통해 기후변화가 발생해서 현세 이후 대멸종이 일어나도 지구상에 다른 생명체가 다시 번성할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다만, 인류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 가이아(Gaia)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차별하지 않을까. 한 달 가까이 이어지는 비를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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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08-09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후 변화 기후 변화 말만 들었지 정작 한반도에서 이렇게 직격탄을 맞고 보니 무섭단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이런 집중호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의 핵심은 자동차, 비행기 매연보다도 거의 대부분은 가축 , 특히 소의 방귀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육식을 줄이는 것이 기후 변화를 지연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겨울호랑이 2020-08-09 22:40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몇 년 전 겨울에 영하 십 도 아래의 추운 날이 며칠씩 이어지거나, 봄/가을이 짧아지는 변화를 직접 체감할 정도로 변화된 것을 보면, 환경오염이 주범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곰곰발님 말씀처럼 우리 생활의 변화, 그 중에서도 식습관의 변화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70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육식으로 살아간다면, 균형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울 지경이니 말입니다...

나와같다면 2020-08-10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은 사회에 대한 촉수가 예민하신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님 글에서는 예민함과 섬세함 그리고 타자에 대한 sympathy 그리고 더 좋은 공동체에 대한 깊은 믿음이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0-08-11 06:45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님. 딸아이가 있어서인지,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주고 싶고, 부족하나마 그쪽으로 힘을 보태는 것이 제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모자란 글이 나와같다면님께 그처럼 다가갔다면 참 다행입니다. 오늘 하루 잘 마무리 지으세요!
 
당신의 선택은? 기업 윤리 Taking Sides 시리즈 1
리사 H. 뉴턴 외 엮음, 권루시안 옮김 / 양철북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당신의 선택은? 기업윤리>는 경영윤리와 관련한 20 이슈 사항을 정리한 책으로, 현대 기업들이 당면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노동, 생명공학, 마케팅, 환경 등 여러 이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과 논거를 소개한다. 상관없어 보이는 각 주제들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면 큰 흐름이 눈에 띈다. 기업(企業)은 사회적 존재일까, 아니면 개인들의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따라 다음 문제들이 잇따른다. 만약, 기업을 사회적 존재로 본다면 사회적 책임 문제가 뒤이어 제기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자유롭게 운영되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기할 경우에는 법(法) 등을 활용한 규제가 이뤄져야 하며, 다음으로 어디까지 규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떠오른다. 규제의 한계에 대해 서양 전통의 가치인 재산권과 사생활 보호라는 측면에서 현실과제인 노동자, 생명윤리, 마케팅 등에 대한 여러 논쟁들이 소개된다.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경우에도 논쟁은 이어진다. 공익(公益)의 이익 침해가 그것이다. 주주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닥쳐 수많은 기업이 도산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시장자율에 맡겨야 하는가. 만약, 그 위험을 기업들이 초래한 경우에도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등. 주로 시장의 자율조정이 파괴될 경우,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이루어지는 이 주제는 다시 사회적 책임문제로 연결된다. '고위험 고수익 High Risk, High Return'이 아닌 '저위험 고수익 Low Risk, High Return'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내보내는 것에 대한 경계와 전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간의 조율이 이와 관련한 주된 주제일 것이다.

결국, 기업윤리의 문제는 공익(公益)과 주주의 사익(私益)의 충돌 문제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치열한 논쟁이 있는 이유는 서구 사회의 오랜 논쟁 주제인 재산권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택은? 기업윤리> 안의 주제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 사회의 많은 제도가 서구의 방식으로 제정되고 운영되고 있음에도 아직 우리 의식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 <당신의 선택은? 기업윤리> 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기에 이들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수많은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모든 주제들로부터 해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관점의 차이 속에서 어렵지만, 자신의 관점을 정리하고 근거를 정리하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라 여겨진다...

책 안의 20가지 논점들 -

1. 자본주의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2. 위험은 자본주의를 위한 최선의 이론일까?
3. 이익 증대가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일까?
4. 개인의 도덕성이 기업의 압력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5. 윤리 강령으로 "진정한" 기업 윤리를 세울 수 있을까?
6. 2008년 경제 붕괴의 책임은 금융 산업에게 있을까?
7. 정부는 경제 파탄을 피하기 위해 책임지고 금융 기관을 구제해야 할까?
8. 파생상품의 위험은 관리 가능할까?
9. 폭리를 규제해야 할까?
10. 내부자 고발은 회사에 대한 충성을 어기는 것일까?
11. 고용주가 종업원의 소셜 미디어를 감시하는 행위는 정당할까?
12. "임의 고용"은 사회적으로 좋은 정책일까?
13. 실적이 CEO 보상의 명분이 될까?
14. 어린이를 겨냥하는 광고를 규제해야 할까?
15. 주택 소유자는 담보 대출에 대해 전략적 채무불이행을 실행해도 될까?
16. 유전자 변형 식품에 표시를 요구해야 할까?
17. 다국적 기업에게는 도덕적 의무가 면제될까?
18. 노동 착취 작업장은 비인도적인 기업 행위일까?
19. 유전자 특허를 비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할까?
20. 세계는 앞으로도 계속 주요 에너지원으로 석유에 의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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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09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질문에서부터 턱 막히네요.

아무래도 자본주의와 인본주의는
잘 들어 맞는 궁합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허구헌날 자유민주주의
플러스 자본주의 타령을 하는 걸
보면 또 그만큼의 파워가 있는 듯
하기도 하구요... 미스터리네요.

겨울호랑이 2020-08-09 19:33   좋아요 0 | URL
아, 사실 책에서 첫 번째 주제의 논쟁자들이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로 전체 논쟁자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도 높고, 에이스들의 논쟁이라 할 만 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철학적인 주제이면서 근원적인 물음이니만큼 우리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저로서는 이 주제가 기업윤리로 들어오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고양이 언어학 -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양이의 속마음
주잔네 쇠츠 지음, 강영옥 옮김 / 책세상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가끔 집 테라스 바깥쪽을 지나는 동네 고양이와 집 안에서 이뤄지는 귀요미의 대화가 들리곤 한다. 다른 나라 언어도 많이 모르는 처지에 고양이 말까지 알기에는 역량이 모자라지만, 그들 사이에 이뤄진 대화가 결코 우호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우리 고양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귀요미가 처음 왔을 때는 했었지만, 요즘은 모르는게 약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녀석 말을 많이 알아들어서 좋아하는 브랜드의 츄르를 요구한다던지 하면, 모셔야 할 공주님이 한 명 더 늘어날 테니 말이다. 집사에서 하인으로 강등되는 장면을 생각하면 고양이 언어를 알아듣는 것은 별로 좋은 시나리오는 아닌 듯하다. 그렇게 <고양이 언어학>을 펼쳐들었다.

나를 제외한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이들(아내와 딸을 포함한)에게 <고양이 언어학>은 유용한 정보를 담은 책이라 생각된다. 음성학자가 자신의 전문성에 애정을 담아내어 만든 책이니, 고양이와의 소통을 원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책이 될 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음성 파일도 제공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내용 구성도 장점이다.

이 책에서 나는 묄크의 분류에 초점을 맞추고, 묄크가 정의한 음성 샘플의 대부분을 다루었다. 물론 다른 논문에 등장하는 소리들도 참고했다. 카테고리(음성 패턴)는 음성학적 특징에 따라 분류했다... 대부분의 음성패턴은 내가 직접 녹음했고 음성학적 방법으로 분석했다._주잔네 쇠츠, <고양이 언어학>, p41

저자 제공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Z6AKtQlPU9s&t=13s

책에 제공하는 정보는 유용한 정보이고, 여러 에피소드도 함께 곁들여 재밌게 읽힐 수 있는 책이다. 그런 면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동시에,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고양이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 여러 면에서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양이 말을 잘 알아듣는다는 것이 반려동물과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또한 분명아니다. 사람도,고양이도 비언어적인 소통을 많이 하기 때문에 언어 이전에 기본적인 관심과 사랑이 먼저 아닐까. 그리고, 사실 사랑이 있다면 굳이 언어가 필요할까.

하지만 나는 고양이와 언어로만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고양이들은 인간의 언어를 아주 잘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보다 더 확실하고, 빠르고, 단순하게 고양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_주잔네 쇠츠, <고양이 언어학>, p224

많은 고양이들이 주로 혼자 살고 주변에 친구를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들여진 고양이들은 대부분 인간과 함께 산다. 이런 의미에서 고양이는 사회적 존재다. 고양이는 같은 고양이들끼리는 물론이고 인간과 향기(후각), 신체 언어(시각), 스킨십(촉각), 소리(청각)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을 한다._주잔네 쇠츠, <고양이 언어학>, p59

그러기 위해서 평소 고양이 이름을 불러주고, 자주 눈을 맞추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등을 알 수 있다면 굳이 언어학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지만. 의사소통에 아쉬움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고양이 언어학>은 아마도 재미와 작은 위안을 주는 책이라 생각된다.

PS.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암만 구박해도 반려동물들은 자신에게 먹을 것 주고, 응아 치워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생각난 김에, 응아통에 치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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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08-0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요미 많이 컸네요. 더 크겠지만 그래도요.
겨울호랑이님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0-08-08 16:00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벌써 2살이라 더 커지면, 삵이 될 듯 합니다.ㅋ 서니데이님께서도 궂은 날 건강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