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자유주의의 역동성은 19세기를 지난 후까지 지속되지 못하였다. 자유주의의 사상과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급진적 시각조정을 통해 부활시키려던 시도는 실패하였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자유주의는 방어적이고 보수적으로 변하였다. 당시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운동과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운동에 보통 적대적이었다. 그리고 흔히, 비록 지적으로 정교하고 세련되긴 하였지만, 사실상 반공주의와 동의어였다. _ 앤서니 아블라스터,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 p658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 The Rise and Decline of Western Liberalism>의 저자 앤서니 아블라스터(Anthony Arblaster)는 자유주의의 역사를 밝히면서, 18 ~ 19세기 초에 절정기를 맞이한 자유주의가 20세기 중반 냉전 자유주의로 변질되었음을 밝힌다.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대표되는 냉전 자유주의는 파시즘(Fascism) 붕괴 이후 공산주의(Communism)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1945년 이후 일종의 부활을 한 자유주의의 지배적 특질은 반공산주의였으므로 '냉전 자유주의'라는 말은 적절하다. 냉전 자유주의의 지배(dominance)는 두드러졌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이고 권위주의라고 하면,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고 또 항상 그래 왔다. 냉전시기에는 이 하나의 태도가 너무도 강하게 자유주의의 전체적 성격을 형성하여서, 자유주의의 더 근본적 원리들이 희생되거나 잊혀졌다. 언론의 자유, 관용과 다양성은 느닷없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원리들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비자유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체제라도 반공산주의라면 눈감았다. 냉전 자유주의는 전혀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며 자유주의를 배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로크, 몽테스키외, 토크빌, 밀의 전통을 이어받고 인용하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행하고 승인한 배반이었다. _ 앤서니 아블라스터,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 p590


 '반(反)공산주의'를 강조하는 이념으로서 냉전 자유주의는 '반공'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결과 냉전 자유주의는 이전 시대 나타난 어떤 형태의 자유주의와도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전체주의 이론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른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남은 단 하나의 가치. 그것은 '반공(反共)'이다. 


 냉전 자유주의는 논쟁적이고, 시사문제와 관련 있고, 개입적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반공산주의 정치에의 개입이다. 냉전 자유주의자들은, 특정 문제와 위기에 대한 반응을 넘어서, 그들의 입장에 대한 강고하고 포괄적인 방어를 구축하였다. 이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거대하고 정교한 '전체주의' 이론이란 형태로, 그리고 전체주의의 이른바 역사적 지적 뿌리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_ 앤서니 아블라스터,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 p602


 아블라스터는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에서 자유주의의 핵심을 세계와 인간본성에 대한 존재론적 전제, 낙관과 긍정으로 해석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냉전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이름을 차용한 전체주의의 변용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아블라스터는 냉전 자유주의를 로크, 몽테스키외, 토크빌, 밀의 전통을 배반한 이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아마도 냉전 자유주의자들은 강하게 부정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며, 보수주의자라고 강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보수주의자들 중의 보수주의자라고 할 만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의 눈으로 봤을 때도 이들은 신이 마련한 국가를 부정하는 폭도에 불과하다.


 "우주를 창조한 지고한 신에게 지상에서 가장 흡족한 것은 국가라고 하는 인간들의 질서 있는 집합체다." 머리와 가슴을 향한 이 교훈을 인간의 공통적 본성과 공통적 관계에서 배운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조회하여 행해져야 한다는 점을 믿고, 또 모든 것을 마땅한 기준에 조회하면서, 가슴의 성소에 참여하는 개인으로서나 그러한 개인의 자격으로 단체를 이루면서 스스로 그들의 고귀한 기원과 위치에 대한 기억을 되새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단체로서, 공공 사회의 설립자이며 창조자이며 보호자에게 국민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공공 사회 없이는, 인간은 그 본성상 가능한 완성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으며, 멀리 떨어진 미미한 접근조차도 이룰 수 없다. 그들은 우리 본성이 우리 덕성에 의해 완성되도록 마련한 신이 그 완성을 위한 필요한 수단도 마련했다고, 그리하여 신이 국가를 마련했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신이 국가가 모든 완성의 근원이자 원초적 모범과 결합하기를 바란다고 인식한다. _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p174


[사진] 2020년 8월 15일 광화문 집회(출처 : 경향신문)


 2020년 8월 15일 아직 코로나 19 위기가 채 끝나지 않은 시점에 강행된 전광훈 목사가 주도한 대규모 집회는 신천지 사태 이후 확진자가 급속히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다시 경제활동은 둔화될 것이고, 개학이 연기되는 등 우리 공동체가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반공과 빨갱이만 외치면서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는 저들 극우 집단의 모습을 보며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변질된 오늘날의 현실을 확인한다.


 보수주의자인 버크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사상이 버크의 반대자인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에게 지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페인이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것은 혁명이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을 부정한 혁명이었기 때문이지, 왕정복고를 꿈꾸는 반동체제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다.  


 프랑스 국민이 혁명을 일으킨 것은 루이 16세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전제적 국가원리에 반해서였다. 그 기원은 루이 16세가 아니라, 수세기 전의 근원적 제도에 있었다.  그것은 뽑아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나 깊이 뿌리박혔고, 기생충과 도둑들로 가득 찬 아우게이어스 왕의 외양간처럼 치우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독하게 더러웠기 때문에 완벽하고 철저한 혁명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었다._토머스 페인 , <상식, 인권>, p104 


 개인적으로 이들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파시즘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적대감과 파괴를 위한 의지 그리고 급진화. 로버트 O. 팩스턴(Robert O. Paxton)의 <파시즘 The Anatomy of Fascism>의 정의보다 이들의 성격을 더 잘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우리가 파시스트들의 부활을 맞은 이유는 때문일까?


 파시즘 정권들은 마치 하나의 분자구조물과도 같았다. 다시 말해, 파시즘 세력과 보수적 질서라는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물질이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 적으로 규정한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라는 두 가지 공통점을 매개로 하여 결합하여 탄생한 합성물이 바로 파시즘 정권이었던 것이다. _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p333


 급진화 단계는 파시즘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어떤 정권도 급진화될 수는 있지만, 자기 파괴에 이를 정도로 격렬한 폭력을 분출하는 파시즘적 충동의 깊이와 위력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급진화의 핵심은 팽창주의 전쟁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체제의 적들, 다음으로는 파시즘의 보수파 동맹 세력, 마침내는 독일 국민들까지 상대로 하여 이성을 잃고 완전 몰살을 기도하며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p384)... 나아가 급진화는 파시즘의 핵심으로 간주되었던 민족과 국가마저 거부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최종적 분석에 따르면 파시즘은 타고난 성격 자체가 불안정하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면 파시즘은 겁에 질린 보수파나 자유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참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_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p386


그리고, 이들을 파시스트 집단으로 정의했을 때, 우리는 스핑크스(sphinx)에게 선동(propaganda)당한 파시즘의 계급전사의 모습을 광화문 집회 참여자들로부터 발견하게 된다. 이보다 더 파시즘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다. 이러한 비극이 우리에게 아직도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이 찬양하는 강인함, 비밀 엄수, 무자비함이라는 덕목이 실제로는 군인의 덕목이라기보다는 검증된 계급 투쟁 전사의 덕목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전쟁의 용병의 가면 아래 양성되었던 것은 실제로 믿음직한 파시즘의 계급전사들이다. 그리고 저자들이 민족 Nation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계급전사 신분에 의지하는 지배자계급인데, 이 지배계급이 누구에 대해서도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가파른 절벽 위 왕좌에 올라앉아 있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가 내놓은 상품의 유일한 소비자가 될 것을 약속하는 생산자의 스핑크스적 용모를 띤다... 자연과 국가라는 두 힘이 여기서 만들어내는 평행사변형 안에서, 대각선은 전쟁이다._발터 벤야민, <독일 파시즘의 이론들>,p317


 결국,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어느 쪽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냉전 자유주의가 이 땅에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까지 우리가 냉전 최후의 유산인 판문점 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Billy Joel의 노래 중 <We Didn't Start the Fire>라는 곡이 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역사적 키워드를 담은 노래인데, 여기에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키워드(North Korea, South Korea, panmunjom)이 등장한다. 가사에 담긴 다른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죽거나 흘러갔음에도, 가사의 키워드가 아직도 유독 우리에게 진행형이라는 것.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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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0-08-19 0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겨울호랑이 2020-08-19 05:17   좋아요 0 | URL
짜라투스트라님 감사합니다^^:)
 
하나일 수 없는 역사 - 르몽드 역사 교과서 비평
고광식 외 옮김, 김육훈 해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여러 국가의 역사 교과서 발췌문을 살펴보면, 전 세계 모든 주민이 한목소리로 읽을 수 있는 보편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아무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날짜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 체결 날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해도, 문제는 그다음이다. 미국이 전쟁에서 이미 이긴 셈이나 다름없었는데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것은 단지 일본을 겁주기 위해서였을까?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을 때 폴란드의 절반을 빼앗고자 했던 것일까, 아니면 1년 전 뮌헨에서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를 넘겼던 프랑스와 영국에 보복하려 했던 것일까?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지도자들 중 그 누구도 도덕적으로 세심하게 고민한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역사관(歷史觀)에 대한 이야기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 집단에게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사건의 이해당사자 또는 호불호의 감정을 가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봄을 의미할 것이다. '사건'이 역사가 아니라, '사건 + 해석'이 역사이기에, 역사가 하나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세계사를 바라봐야 하는가? <하나일 수 없는 역사>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차이나는 여러 관점을 보여줄 뿐이다. 얼마나 폭넓게 사건을 바라보는가 또는 얼마나 깊게 사건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사건의 의미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에게 넌지시 던져줄 뿐이다. 그렇지만, 이 물음은 생각하기에 따라 한없이 깊어질 수도 있다.


 주로 세 가지 문제가 쟁점이 됐다. 정복당한 국가에 도로와 학교, 행정조직을 제공한 식민지 지배를 융통성 없게 비난해야만 하는가? 식민지 정복과 지배는 정말로 폭력적이었는가? 독립 후 정권을 쟁취한 새로운 지배층에 의한 자국민 수탈은 없었는가?... 식민지 경영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는 '열등한 민족'이 존재하며 이들을 문명화할 '우월한 민족'이 존재한다는 인간 존재의 불평등성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p118)... (우리는) 정치적 독립이 곧바로 경제적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약속된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독립국에 독재체제가 들어섰다. 해당 지역의 일부 엘리트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그러다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조직화된 저항에 부딪혔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의 끝은 해방을 향한 여정의 첫걸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드시 내디뎌야만 하는 걸음이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119


  위에 나온 내용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논쟁 중 하나인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논쟁으로 보이지만 아니다. <하나일 수 없는 역사> 중 프랑스 역사 교육 과정에 대한 내용 비판 일부를 옮긴 것으로, 이는 식민지 근대화와 관련된 논쟁이 우리나라에한정된 것이 아닌, 제국주의의 잔재가 남은 지역에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임을  알려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논거 하나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은 복잡하고 지루한 과정이다. 단지 정치적인 차원만이 아닌,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까지도 아울러야 한다... 1970년대에 이르러 거의 대부분 독립을 이룬 아프리카 국가들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싹틔웠다. 그러나 유럽에 의해 그어진 문제투성이의 국경선 그대로 식민 통치에서 제각각 벗어난 아프리카는 종종 포악한 독재자의 통치를 받으며 허약하고 분할된 상태로 남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렵게 되찾은 자유를 누리지도 못한 채 외국의 간섭과 쿠데타, 내전, 사회적 갈등이 증폭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125


 과거 제국주의 지배의 폐해와 독립 후 이어지는 식민지의 정치적, 경제적 종속 상태보편적 사태다.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 론에 대해 비판할 때, 많은 경우 자본주의의 맹아(萌芽)가 조선시대부터 있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런 통시적 관점의 접근도 의미가 있겠지만, 공간적으로도 시야를 넓혀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사를 국사의 관점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새롭게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고조선의 멸망 원인의 경우도 국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한(漢)의 침략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유라시아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흉노 - 한'이라는 유목제국과 농경제국의  대립이라는 거대한 역사 흐름 속에서 고조선이 멸망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의 지평을 넓혀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함께 제공한다. 여기서 더 깊어지면, 브로델과 같이 구조사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세계사의 관점에서 역사의 법칙을 찾아내고, 이로부터 우리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우리가 갈 길을 정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배우는 길이고, 역사가 하나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역사의 흐름이라는 물리 현상에 보다 의미있는 것에 대한 선택이 바로 살아 있다는 표현이기에, 역사는 하나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3세계 국가들은 원자재에 대한 공정한 가격 책정과 선진국과 후진국 간 호혜적 교역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국제 경제질서' 확립을 요구했으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과도한 부채를 져야 했으며, 결과적으로 선진국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세계은행, 서방 선진국과 은행 등에서 대출 형태로 제공된 '개발 원조 자금'은 종종 선진국의 완제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데 선진국의 완제품 가격은 꾸준히 상승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위해 후진국 경제는 농업 수출과 광물 채굴을 강화하고 원자재 가격 상승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135


  구체적으로 그런 관점에서 조금 더 깊게 바라본다면, 아프리카의 빈곤 문제가 단순히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연장선상에서 '한강의 기적' 문제가 우리 민족의 성실함만으로 된 것도 아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깊게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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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일 수 없는 역사- 르몽드 역사 교과서 비평
고광식 외 옮김, 김육훈 해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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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 3- 팍스 아메리카나의 후퇴와 약진하는 신흥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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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 2- 세계 질서의 재편과 아프리카의 도전
이주영.최서연 옮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 휴머니스트 / 2010년 7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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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 지구적 이슈와 쟁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음, 권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1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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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 3 - 팍스 아메리카나의 후퇴와 약진하는 신흥 세계 르몽드 세계사 3
김계영 옮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 휴머니스트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이번 세 번째 책에서는 일극 체제를 이어온 팍스 아메리카나의 후퇴 이후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신흥 국가의 부상과 전 세계 민중의 자각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p6)

<르몽드 세계사 3>이 프랑스에서 출판된 것은 2012년이니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책에서는 208년 경제 위기로 인한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 쇠퇴와 다극화된 시대의 도래를 예상했지만, 시간이 흘러 2020년의 관점에서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조용하게 퇴장하는 대신,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움직임 속에서 2010년대 신흥대국들인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또한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 대립하고 있으며, 인도는 미국의 환태평양방위전략에 협력하면서 최근 중국과 군사충돌까지 빚고 있다. 브라질은 최근 중국과 경제갈등 관계에 있었으나, 다시 우호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모양새다. 또한, 아프리카의 맹주를 꿈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아프리카에 뿌리내리고 있는 중국과 협력 - 갈등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돌아보면, 2020년대는 쇠퇴하는 미국 패권이 다극화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중국과 군사적,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으로 시작되는듯하다. 이 역시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19세기 후반 영국 -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연상시키는 미 - 중의 군사적 대립과 긴밀한 경제 관계가 <르몽드 3>이후의 세계사 흐름으로 보인다. 아직은 다극화(多極化)이전의 시대임을 느끼게 된다.

여러 면에서 <르몽드 세계사 3>에서 말한 국제질서의 내용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책에서 지적한 근본적인 문제(소득 불균형, 마약 문제, 국제 금융 문제 등)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오늘날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르몽드 세계사 3>에서 지적한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며, 책에서 보여주는 통찰은 지금도 값지다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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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75주년 광복절 기념식 중 광복회장의 친일인사에 대한 발언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특히,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안익태(安益泰, 1906 ~ 1965) 와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광복회장의 발언이 국민통합에 저해되고, 편협한 정치적 발언이라는 거센 비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익태가 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는지 이번 페이퍼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안익태 : 양악작곡가, 자휘자, 제국음악원 회원


 1906년 12월 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에 유학할 때는 안 에키타이(?あんえきたい),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1938년부터는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활동했다...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 Etnlaku, Phantasie fur Ochester>를 발표했다. <에텐라쿠>로 알려진 이 작품은 1959년 <강천성악 降天聲樂>으로 개작되었다. 안익태가 작곡한 <에텐라쿠>는 일본 아악곡인 <에텐라쿠>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차용한 관현악 작품으로, 코노에 히데마로(近衛秀?)가 작곡해 국제적으로 알려진 관현악 작품 <에텐라쿠(1031)>와 미야기 미치오(宮城道雄)의 <에텐라쿠 변주곡>(1928)에 대비되는 작품이다.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된 것으로, 1878년 이후부터 근대 일본창가로서 <남조 오충신 南朝 五忠臣>이나 <충효 忠孝> 등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일본정신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_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p448


 1938년 유럽으로 건너간 안익태는 같은 해 2월 <교향적 환상곡 '조선' Sinfonie Fantastique 'Korea'>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후에 <한국환상곡>으로 알려진다. 같은 해 작곡된 다른 곡이 대표작 중 하나인 <에텐라쿠>다. 일왕의 즉위식 연주곡을 차용한 작품으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연 안익태는 해방 이후에도 독재권력의 어용(御用)활동을 위해 귀국하는 행보를 이어간다.


 1955년 3월 '이승만 대통령 탄신 제80회 기념음악회'를 지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고, 4월에 제1호 문화포장을 받았다... 1962년 1월 한국을 방문하면서 박정희 의장을 예방해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의 대내외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고 '혁명'을 경축하기 위한 대한민국 국제 음악제 개최를 협의했다._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p450


 1940년대 들어서는 제국의 음악가로서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세계의 음악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명성을 이어가는데, 이 시기에 나온 음악이 <만주환상곡>으로, 이 곡은 안익태의 또 다른 대표곡이다. 그렇다면, 안익태가 정성들여 만든 곡을 헌정한 '만주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1941년부터 독일 베를린으로 진출해 나치 제국의 제국 음악원(Reicnsmesil kamer) 총재이자 협력자였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와 독/일 협회 후원으로 관현악단 지휘와 작품 발표를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국제적인 음악인으로 부각되었다.(p448)... 1942년에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의뢰받아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 Symphonische Phantasie 'Mandschoukuo'>을 완성했다. 


 우리에게 만주국(滿州國 Manchukuo, 1932 ~ 1945)는 마지막 황제 푸이(愛新覺羅溥儀, 1906 ~ 1967)의 나라, 일본제국의 괴뢰국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생각외로 만주국이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깊다. 프라센지트 두아라 (Prasenjit Duara)의 <주권과 순수성 Sovereignty and Authenticity: Manchukuo and the East Asian Modern>의 옮긴이 해제는 일본제국의 기반으로서 만주와 한국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잘 설명한다. 


 만주국은 일본의 1930년대의 경제기적에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일본은 이곳으로부터 원자재 상당량을 얻게 되고, 중화학단지를 건설하여 후일 서양과 대결하는 가공할 만한 경제적 자립체(엔블록 혹은 대동아공영권)의 바탕을 마련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군대와 관료들을 위한 훈련장뿐 아니라, 총력전 체제, 통제경제, 건축, 도시계획, 박물관 경영 등에서 일본 근대의 시험장이었다... 한국에게 만주국은 착잡한 무대이다. 박정희를 포함한 만주 인맥은 건국 이래 한국 군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만주국이 한국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발건국가 모델이다. 지난 박정희 정부에서 4차례나 추진된 경제개발계획의 모형은 사회주의를 방불케하는 만주국의 계획경제였다. 많은 분야에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실험실 만주국이 있었다._프래신짓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p452 해제 中


 얼마 전 백선엽(白善燁, 1920 ~ 2020)의 현충원 안정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있었는데, 그 역시 대표적인 만주군 출신 군인이었다. 이처럼 제국을 뒷받침하는 세 다리인 일본, 한국, 만주. 일본에서 교육받은 한국 출신 음악가 안익태가 만주국을 위한 곡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홍보를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되었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곡의 내용 구성은 만주와 조선이 하나임을 분명히 표상한다. 


 제1악장은 서주(序奏)로서 축복받은 대지의 모습과 폭정으로 짓밟힌 옛 만주가 구원자인 일본에 의해 평화를 되찾은 모습을, 제2장은 목가(牧歌)로서 만주국 대평원의 평화를, 제3악장은 만주국이 열강들과 협력해 세계 신질서를 확립하는 모습을, 그리고 제4악장은 피날레로서 만주국이 건국 10주년을 맞는 환희를 그렸다. 마지막 악장 피날레에서 합창 부분의 가사는 에하라 고이치가 직접 만들었다. 안익태는 피날레 악장을 두개의 주요 합창작품으로 구성해 극적으로 장식했는데, 이 작품들은 나중에 <한국환상곡>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 개의 합창곡 중 '애국가'를 제외한 두 개의 합창곡에 똑같이 옯겨졌다.(p449)...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공식 지정했다. 1949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코리아환상곡>을 지휘했다_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p450



 일왕을 위한 <엔텐라쿠>와 같은 해 만들어진 형제곡 <한국환상곡>. 그리고, <한국환상곡>과 일정 테마를 공유하는 <만주환상곡>. 그리고 <한국환상곡> 안의 <애국가>. 이처럼 그의 작품 세계 자체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국가(國歌)로서 <애국가>의 문제점에 대해 침묵해야 할까. 물론, 국가를 변경하는 문제는 국민들의 합의가 필요한 부분임은 분명하지만, 분명 짚고 넘어가야할 사안임은 분명하다. '공산주의'는 안되지만, '친일'에는 너그러운 이중잣대가 이제는 우리사회에서 치워져야 하지 않을까.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음악가 안익태와 그의 음악세계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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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8-16 1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75주년 광복절에 많은것을 생각하게 해주십니다! 공산주의는 안되는데, 친일에는 너그러운 사회라는 말씀이 뼈를 때리네요!
즐거운 휴일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0-08-16 13:4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 모처럼 날이 맑네요. 덥지만 건강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