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일 수 없는 역사 - 르몽드 역사 교과서 비평
고광식 외 옮김, 김육훈 해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여러 국가의 역사 교과서 발췌문을 살펴보면, 전 세계 모든 주민이 한목소리로 읽을 수 있는 보편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아무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날짜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 체결 날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해도, 문제는 그다음이다. 미국이 전쟁에서 이미 이긴 셈이나 다름없었는데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것은 단지 일본을 겁주기 위해서였을까?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을 때 폴란드의 절반을 빼앗고자 했던 것일까, 아니면 1년 전 뮌헨에서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를 넘겼던 프랑스와 영국에 보복하려 했던 것일까?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지도자들 중 그 누구도 도덕적으로 세심하게 고민한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하나일 수 없는 역사>는 역사관(歷史觀)에 대한 이야기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 집단에게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사건의 이해당사자 또는 호불호의 감정을 가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봄을 의미할 것이다. '사건'이 역사가 아니라, '사건 + 해석'이 역사이기에, 역사가 하나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세계사를 바라봐야 하는가? <하나일 수 없는 역사>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차이나는 여러 관점을 보여줄 뿐이다. 얼마나 폭넓게 사건을 바라보는가 또는 얼마나 깊게 사건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사건의 의미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에게 넌지시 던져줄 뿐이다. 그렇지만, 이 물음은 생각하기에 따라 한없이 깊어질 수도 있다.


 주로 세 가지 문제가 쟁점이 됐다. 정복당한 국가에 도로와 학교, 행정조직을 제공한 식민지 지배를 융통성 없게 비난해야만 하는가? 식민지 정복과 지배는 정말로 폭력적이었는가? 독립 후 정권을 쟁취한 새로운 지배층에 의한 자국민 수탈은 없었는가?... 식민지 경영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는 '열등한 민족'이 존재하며 이들을 문명화할 '우월한 민족'이 존재한다는 인간 존재의 불평등성이라는 관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p118)... (우리는) 정치적 독립이 곧바로 경제적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약속된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독립국에 독재체제가 들어섰다. 해당 지역의 일부 엘리트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그러다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조직화된 저항에 부딪혔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의 끝은 해방을 향한 여정의 첫걸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드시 내디뎌야만 하는 걸음이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119


  위에 나온 내용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논쟁 중 하나인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논쟁으로 보이지만 아니다. <하나일 수 없는 역사> 중 프랑스 역사 교육 과정에 대한 내용 비판 일부를 옮긴 것으로, 이는 식민지 근대화와 관련된 논쟁이 우리나라에한정된 것이 아닌, 제국주의의 잔재가 남은 지역에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임을  알려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논거 하나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은 복잡하고 지루한 과정이다. 단지 정치적인 차원만이 아닌,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까지도 아울러야 한다... 1970년대에 이르러 거의 대부분 독립을 이룬 아프리카 국가들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싹틔웠다. 그러나 유럽에 의해 그어진 문제투성이의 국경선 그대로 식민 통치에서 제각각 벗어난 아프리카는 종종 포악한 독재자의 통치를 받으며 허약하고 분할된 상태로 남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어렵게 되찾은 자유를 누리지도 못한 채 외국의 간섭과 쿠데타, 내전, 사회적 갈등이 증폭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125


 과거 제국주의 지배의 폐해와 독립 후 이어지는 식민지의 정치적, 경제적 종속 상태보편적 사태다.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 론에 대해 비판할 때, 많은 경우 자본주의의 맹아(萌芽)가 조선시대부터 있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런 통시적 관점의 접근도 의미가 있겠지만, 공간적으로도 시야를 넓혀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사를 국사의 관점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새롭게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고조선의 멸망 원인의 경우도 국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한(漢)의 침략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유라시아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흉노 - 한'이라는 유목제국과 농경제국의  대립이라는 거대한 역사 흐름 속에서 고조선이 멸망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의 지평을 넓혀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함께 제공한다. 여기서 더 깊어지면, 브로델과 같이 구조사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지만... 


 세계사의 관점에서 역사의 법칙을 찾아내고, 이로부터 우리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우리가 갈 길을 정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배우는 길이고, 역사가 하나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역사의 흐름이라는 물리 현상에 보다 의미있는 것에 대한 선택이 바로 살아 있다는 표현이기에, 역사는 하나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3세계 국가들은 원자재에 대한 공정한 가격 책정과 선진국과 후진국 간 호혜적 교역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국제 경제질서' 확립을 요구했으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과도한 부채를 져야 했으며, 결과적으로 선진국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세계은행, 서방 선진국과 은행 등에서 대출 형태로 제공된 '개발 원조 자금'은 종종 선진국의 완제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데 선진국의 완제품 가격은 꾸준히 상승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위해 후진국 경제는 농업 수출과 광물 채굴을 강화하고 원자재 가격 상승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하나일 수 없는 역사>, p135


  구체적으로 그런 관점에서 조금 더 깊게 바라본다면, 아프리카의 빈곤 문제가 단순히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연장선상에서 '한강의 기적' 문제가 우리 민족의 성실함만으로 된 것도 아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깊게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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