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은 또 고구려(高句驪) 병사를 발동하여 흉노를 공격하려는데, 고구려에서 가려고 하지 아니 하니 군(郡, 요서군)에서 억지로 압박하자 모두 도망하여 요새를 나가고 이어서 법을 범하면서 침구(侵寇)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인 전담(田譚)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그 허물을 고구려후(高句驪候) 추(騶)에게 돌렸는데, 엄무(嚴尤)가 상주하였다. "맥인(貊人)이 범법하는 것은 추(騶)를 좇은 것이 아니어서 바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마땅히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또 그들을 안위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큰 죄가 두텁게 덮어씌운다면 아마 그들은 끝내 배반할까 걱정이고, 부여(夫餘)족속들에게는 반드시 화합함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입니다." 왕망이 안위하지 아니하자 예맥(濊貊)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엄우(嚴尤)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고, 오자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驪)라고 이름을 고쳤다._사마광, <자치통감 37> 中


 아침마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 資治通鑑>를 읽는다. 전국시대로부터 오대십국 시대를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 겨우 왕망(王莽, BC45~AD23)의 신(新)나라 부분을 읽고 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는 전체 294권 중에서 37권에 해당한다.)  중국의 역사를 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주변국과의 관계도 역사의 일부분이기에 우리나라 역사도 다루어진다. 그리고, 당연히 그 부분을 더 주의 깊게 읽게 된다. 마침 오늘은 왕망이 부하장수를 시켜 흉노(匈奴) 원정을 거부하는 고구려를 침략하는 부분이 서술된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왕이 죽음을 당했다는 부분에 눈이 멎는다. 고구려왕 중 외적에게 죽임을 당한 왕이 고국원왕 외에 또 있었을까. 동천왕 시기 아버지 미천왕의 시체가 중국쪽으로 끌려갔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그런 기억은 언뜻 나지 않아 같은 시기를 다룬 <삼국사기>도 함께 펼쳐본다. 기록에<자치통감>에서 죽임을 당한 고구려 왕은 추(騶)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발음에 따라 '추모(鄒牟)'로 불리는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BC 58~BC 19)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삼국사기 三國史記>를 따라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BC38~AD18)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여겨진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죽음을 당한 인물의 기록이 충돌한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리왕 31년(서기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莾)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무(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로하여 안심시켜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驪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37년(서기18) 겨울 10월에 왕이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쪽 들판에서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_김부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p323


  전반적인 상황은 비슷하지만, <자치통감>에서 고구려에서 죽임을 당한 이는 왕으로 , <삼국사기>에서는 부하장수로 기록되어 있어 이들의 기록이 서로 충돌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기록을 참고해야 하겠지만, 우리 고대사의 경우 많은 기록이 중국 쪽 자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중국쪽의 기록이 정설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기록의 양이 워낙 차이가 나니 이러한 현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 기록의 객관성이다.  중국의 기록들이 모두 객관적으로 남아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중국의 기록 역시 공자(孔子, BC551~BC479)의 <춘추 春秋>이래 중국/유교 중심의 포폄(褒貶)사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자료의 많은 부분을 중국의 <자치통감>에 의존한 <삼국사기>에서도 이 부분의 기록은 다르게 나타난 것을 보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라 여겨진다.


 두 개의 내용을 보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몇 군데 글자를 바꾸거나 추가했을 뿐이다.... 이것들을 검토하여 보건대 의도적으로 고쳤다고 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필사과정에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로 적은 것이거나,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자치통감>과 <삼국사기>가 그 이후 내려오면서 착간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부분도 <신,구당서>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필법(筆法)에 대한 철저한 고려를 하지 않은 것 같고, <자치통감>에서 필법이 엄정하여 글자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신주하게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김수식은 <자치통감>을 자료로 본 것이고, 필법은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만큼 역사학 이론에서 아직은 <자치통감>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_권중달, <자치통감전> 中


 한 예(例)지만, 우리나라 고대사의 경전인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와 다른 중국 사서들 간의 서로 충돌하는 파편의 기억들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를 넘어서 지역적으로 떨어진 ,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시간의 흐름을 오늘날 세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 관점이라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을 안고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역사>을 시작한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역사'는 이미 경험된 것과 아직도 경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는 개념 ein regulativer Begriff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단순항 이야기나 역사학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다.(p12)...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Geschichte an und fur sich' 개념 속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의미의 결이 유입되었다. 근대적 역사 개념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전의 의미 영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서 결합하였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13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역사‘는 이미 경험된 것과 아직도 경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는 개념 ein regulativer Begriff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단순항 이야기나 역사학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다.(p12)...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Geschichte an und fur sich‘ 개념 속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의미의 결이 유입되었다. 근대적 역사 개념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전의 의미 영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서 결합하였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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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1-06-10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있는 사기에 불신만 가졌었는데, 당대의 중국 역사관을 함께 보는 것도 방법이 되겠네요. 양적으로 방대하나... 객관성이 문제. 그 역시 공감합니다.
짧게 짧게 올려주신 덕에 재밌게 읽고 갑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1 07:03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역사‘는 과거의 사건 중에서 일부에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학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객관적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면에서 역사가의 방대한 해석보다는 짧은 사실의 나열이 후대 역사가들에게는 오히려 도움되는 면이 있을 듯 합니다. 갱지님, 감사합니다 ^^:)
 
도형이 쉬워지는 인도 베다 수학 - 기적의 연산법 인도 베다 수학
마키노 다케후미 지음, 고선윤 옮김, 노마치 미네코, 비바우 칸트 우파데아에 감수 / 보누스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빠르게 풀기가 아닌 생각하며 풀기를 설명한 수학책.

쉬운 사칙연산을 주제로 수식의 의미를 찾아들어간다. 전통적인 마방진의 숫자로부터 무한수열을, 무한수열의 숫자들의 질서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면서 마치 어린 시절 만화경을 보는 느낌을 선물한다.

책에서는 곱셈법을 유형별로 구분 제시하고 있지만, 크게 도형을 이용한 풀이법을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본문에서는 47*43을 그림으로 설명하여 직관적으로 이해를 돕는다. 개인적으로는 아래처럼 계산하지만, 이는 크게 학교에서 배우는 방식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래 수식이 ‘추상☞추상‘으로의 전환이라면, 인도 수학은 대수학과 기하학이 결합된 ‘추상+구체‘라는 느낌을 받는다.

47*43=(50-3)*(50-7)=50*(50-7-3)+(3*7)=2000+21=2021

책을 읽으며 인도가 수학 강국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풀이 방식은 분명 더 빠르다. 그렇지만, 그만큼 관념적인 수학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대신, 인도 수학의 방식을 통해서는 직관적으로 관념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보다 장점이 있다.

19단을 외우는 인도. 19단표에서 보여지는 보다 넓어진 시야만큼 현실에 적용하는 인도 수학. 이것이 인도가 IT 강국인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겸해서 수학책을 들여다 보면서 예전 학창시절에는 채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잠시나마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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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29 1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도는 우리같은 구구단이 아닌 두자릿수 19단을 외운다던데요.
그런 면에서도 솔깃해요ㅋㅋ그런데 저자는 의외로 일본인이네요?

겨울호랑이 2021-04-29 19:43   좋아요 2 | URL
책에는 구구단을 손가락으로 외우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아마 19단도 그런 방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도대사관 공인 수학책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미미님 말씀대로 저자는 일본인이더군요. 일본 번역 문화가 발달되어서인지 다양한 분야에 여러 수준의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사 개념이 성립된 이후 그 속에 담겨있는 근본적인 양가성은 일상적인 정치 언어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다. 감점에 휩싸이기 쉽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되기 쉬운 특성이 이미 집합단수의 조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험적 범주로서 이 역사 die Geschichte라는 집합단수의 조어는 역사서술 Historie 과 수많은 역사들 Geschichten을 동시에 포함하면서, 가능한 수많은 경험들, 즉 행동반경과 과정, 진보와 발전, 의미 부여와 숙명, 사건Ereignis과 행동 Tat을 서술하는 일종의 여러 눈금으로 표시된 Skala 을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라는 오래된 의미는 뒷전으로 밀려나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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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선주의 강령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과 함께 가장 좋았던 시절의 미국을실현하겠다고 제안한다. 자유지선주의자들은 이제 다행히도 한물간 지난 시대 유의 군주정 전통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보다도 더욱 공고하게 미국을 건국한 위대한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 전통은 우리에게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미국의 전통과 평화로운 외교정책, 최소 정부와 자유시장 경제를 물려줬다. 우리는 보수주의자들보다도 더 진정으로 전통적이고 더 뿌리 깊게 미국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급진주의자보다도 더욱 급진적이다. -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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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1-04-29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론에 동의하긴 아무래도 힘들지만, 이런 아무 거리낌없는 자유지상주의의 논리 전개는 분명 매력적이긴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4-29 15:30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는 어떤 이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저자의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상과의 조화, 사회상황 등에 대한 고려 없이 절대 법칙처럼 통용되는 논리 전개 안에서 다분히 폭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들의 사고를 잘 드러낸다는 점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여겨지네요...^^:)

Comandante 2021-04-29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로스바드류의 시장신봉적인 자유지상주의보다는 노직의 견해가 더 학문적 품위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말씀대로 이 책은시장지상주의자의 사고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가치도 있군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1-04-29 17:09   좋아요 1 | URL
네, 모든 책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여겨집니다^^:)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의 7 번째 주제는 '자유주의 Liberalismus'다. 자유주의의 의미 변천은 다른 개념어들의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왔다. 처음부터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진보', '개혁', '해방' 등의 단어와는 달리 '자유'라는 단어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상태이며, 단어가 주는 여유롭고 긍정적인 이미지는 이 단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도록 막아왔다.다만, 그 안에 정치용어로서의 싹은 분명히 자라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자유주의'는 급격한 의미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분화에 결정적 역할은 한 이들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다.


  '리버랄리태드', 즉 탁월하며 신중하고, 편견이 없으며 관대한 사람의 태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적, 도덕적 규범 체계와 가치 체계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 자유로운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는 '리버랄리태트'는 계속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소통적 덕성이었다. 이 덕성은 일정한 교육 수준과 물질적 조건을 전제로 삼는다. 그것은 독립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버랄리태트는 또한 당파성의 반대말로서 언제나 정치적 자유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반계몽주의적이고 반혁명론적인 생각과 주장의 맥락 속에서는 이 덕성의 효과들이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31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눈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과 연계하면서,  '자유주의'는 급속하게 정치 사상 용어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마르크스 이전의 '자유'가 유한의 육체에 대한 무한한 정신 상태로 구속받지 않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졌다면, 마르크스 이후의 '자유'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가진 자들의 여유'로 의미가 세속화되었다.


 1840년대 중반에 마르크스 Marx와 엥겔스 Engels는 정치적 자유주의, 곧 "리버럴한 운동"을 전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귀속시켰다. 그들이 특히 영국과 프랑스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리버럴한 부르주아'라는 개념은 어떤 정치적 지향을 대변하는 자들의 계급적 상태를 표현했으며, 사회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입장의 결합을 이데올로기 비판적으로 밝히려는 것이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91


 1852년판 <마이어 백과사전> 속의 자유주의에 대한 글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드러난다. "고대인의 리버럴한 정신"은 "자유로운 사람 그 자체의 표식"이었다. 이와는 다르게 "현대의 자유주의"는 "오늘날의 국가 생활 속에서 억압받는 자유롭지 못한 시민에 의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약받지 않는 그들의 지배자에 대해" 수행된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08


 이러한 의미 분화 속에서 '자유주의'는 좌,우 양 극단과 결합된다. 어떻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위치한 두 사상과 자유주의가 결합되었다는 사실이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자유주의 안에 담고 있는 두 핵심요소가 다른 방향으로 자란 결과물임을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확인할 수 있다.


 "우파"리버럴, 곧 민족적 리버럴들이 19세기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에 보수주의 세력들과 가까워진 반면에, 20세기 초에 일부 "좌파" 리버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정치적 협력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을 개방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24


 자유주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자유주의가 "뻔하고 단순하게 두 개의 분명하면서도 단순한 원칙들, 첫째로 정신의 세속화, 즉 정신의 비종교성과 천박함을 북돋는 것, 둘째로 정당한 소유자의 손에서 부당한 소유자의 손으로 재산을 이동시키는 것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62


 우리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에서 그려낸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 안에 담겨진 모순된 의미가 큰 충돌없이 사용되어왔으나,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해 계급용어로 정의되면서 뜻이 갈라지고,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사용되면서 오늘날에는 다른 단어 못지 않은 강력한 정치용어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것이 세속화와 사회적 원자화의 부수적 현상이며, 물질주의와 상업 정신의 정치적 표현이고, 민주주의와 대중의 전제적 지배로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하여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났는데, '리버랄'이라는 말이 한편으로는 종종 비성찰적으로, 비정치적으로, 특정 정당과 무관하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행동 양식과 목표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결단력 없고, 소속감 없으며, 경솔하고 이기적인 정치적 태도를 비방하는 표현으로서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3 


 오늘날의 정치사상 중 '자유주의'사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사상이 '자유지선주의 Libertarianism'다. 대표적인 자유지선주의 사상가 머리 로스바드 (Murray N. Rothbard, 1926~1995)의 <자유지선주의선언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은 자유지선주의의 관점에서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책이다. 현대 자유주의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 책의 리뷰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이번 페이퍼에서는 자유지선주의 강령의 개략적인 성격을 소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하자...  

 

 자유지선주의 강령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과 함께 가장 좋았던 시절의 미국을 실현하겠다고 제안한다. 자유지선주의자들은 이제 다행히도 한물간 지난 시대 유럽의 군주정 전통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보다도 더욱 공고하게 미국을 건국한 위대한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 전통은 우리에게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미국의 전통과 평화로운 외교정책, 최소 정부와 자유시장 경제를 물려줬다. 우리는 보수주의자들보다도 더 진정으로 전통적이고 더 뿌리 깊게 미국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급진주의자보다도 더욱 급진적이다._머리 N.로스바드,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 자유지선주의선언>, p510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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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4-28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점이 좋은 거 같습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핵심을 다르게 보는 것 같습니다. ㅎㅎ
제가 이 책을 읽을 때 자유 개념이 바뀐 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아니라 ‘소유’에 대한 자유를 인정한 시기라고 보았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4-28 22:25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저는 미처 생각치 못했는데,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지점을 다시 짚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28 21:34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제가 잘 못 읽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미쳐 몰랐던 말씀이라서 드린 얘기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4-28 21:59   좋아요 0 | URL
역사의 흐름을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관점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중요한 것임에도 놓치는 부분이 없지 않음을 느낍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는게 제 자신의 한계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관점에서 말씀해 주시는 부분은 큰 도움이 됩니다. 제 생각 안에 갖혀 있는 것은 마치 아침에 면도할 때 한 방향으로만 깎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다른 방향에서 면도를 하면 훨씬 깔끔해진다는 면에서 감사드립니다.(물론, 7중날 면도기를 사면 제일 좋겠지만, 제 지식은 그 정도가 되지 못하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