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열매가 아직 익지 않았거나 스스로 떨어지는 것을 줍는 것은 불과 열흘 차이인데, 그러나 어렵고 쉬운 것과 그리고 맛이 있고 없는 차이가 아주 많습니다."(p25/103) - P25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는 굶주리면 사람에 의지하지만, 매양 폭풍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늘을 능멸할 만한 뜻을 품고 있으니, 바로 의당 그를 새장에 가두어야 하는데 어찌 풀어서 멋대로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두십니까!"(p26/103) - P26

참군인 태원(太原, 산서성 태원시) 사람 조겸(趙謙)이 모용농에게 말하였다. "석월의 갑옷과 무기는 비록 정예하나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쉽게 격파됩니다. 의당히 급히 그를 공격하여야 합니다."
모용농이 말하였다. "저들의 갑옷은 바깥에 있고, 우리들의 갑옷은 마음속에 있으니, 낮에 싸우면 병사들이 그 겉모양만을 보고 그들을 두려워할 것이므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공격하여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p37/103)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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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8-06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는 듯합니다. 특히 세 번째가요.

겨울호랑이 2021-08-06 15:48   좋아요 0 | URL
자치통감은 비록 기전체로 씌여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끊어짐없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 여겨집니다. 저자 사마천이 강조하고 싶어 하는 부분은 사기열전처럼 보다 자세히 서술하는데, 여기에 사마천이 생각하는 역사의 교훈이 실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젠더 허물기 우리 시대의 고전 2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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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 철학의 전통은 욕망을 인정과 연결하면서, 욕망은 언제나 인정을 향한 욕망이고 우리 모두가 사회적으로 존속 가능한 존재로 구성되는 것은 오로지 인정받는 경험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은 매력적이며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놓치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 관점은 사회적으로 표명된 것이고, 변화할 수도 있다. 또 어떤 때는 한 개인에게 '인간됨 humanness'을 부여한 바로 그 관점이 다른 개인에게서는 똑같은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박탈하기도 한다. 인간과 덜된 인간 less-than-human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1


  <젠더 허물기 Undoing Gender>에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의 '욕망'과 뒤를 이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욕망 - 인정' 도식으로부터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젠더란 무엇인가' 부터 시작해보자.

 

 이미 전작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이야기 되었듯, 버틀러에게 '젠더는 수행적'이다. 반복적이며 의례적인 행위를 뜻하는 수행성이 젠더의 특징이라면, 젠더의 원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고, 젠더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얽힌 관계 속에서 우리는 '원인-결과' 또는 '최초의 관념'을 구분해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치 스피노자의 용어처럼 '자신이 원인이 되는 존재 causa sui'처럼 우리는 '젠더'를 인식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causa sui'는 신(神)의 속성이다. 


 젠더가 수행적이라면 그것은 젠더의 실제 자체가 그 수행의 결과로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무엇이 실제적인지 아닌지, 무엇이 인식 가능한지 인식 불가능한지를 지배하는 규범이 있지만, 수행성이 인용 행위를 시작하는 순간 그 규범은 의문시되고 반복된다. 우리는 분명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인용하는 것이지만, 이런 규범은 인용을 통해 상당히 탈영토화될 수 있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43


 만약, '젠더'가 규범이라면 규범으로서 '젠더'는 중세 '신' 중심의 문화가 중세인을 만들었듯 권위를 갖고 사람들을 만들고, 스스로도 변화될 것이다. A -> A' -> A'' -> A'''... 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드백(feedback) 속에서 점점 사람들에게 '젠더'는 어떤 인식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없었던 어떤 인식의 '경계'이 만들어진다.


 규범성이 이중성을 가진다는 점에 대해 숙고해보자. 규범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인도하는 목적과 열망을,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거나 말하게 되어 있는 수칙을, 또 우리가 지향하게 되어 있고 우리 행동에 방향성을 주는 일상적 전제를 지칭한다. 다른 한편 규범성은 규범화 과정을, 특정한 규범과 사상과 이상이 체현된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상적 '남자'와 '여자'라는 강제적 기준을 제공하는 방식을 지칭하기도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25


 젠더가 어떤 규범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이 다가가고자 하는 어떤 모델 같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젠더는 주체가 인식될 수 있는 장을 생산하는 사회 권력의 형식이고 젠더 이분법이 제도화되는 장치이다. 젠더에 지배되는 실천들과 무관해 보이는 규범으로서 젠더의 이상성 ideality은, 바로 그런 실천들이 다시 제도화한 결과물이다. 이 말은 실천과 그 아래서 실천이 작동 중인 이상화의 관계는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상화 자체도 어쩌면 잠정적인 것으로 탈이상화나 권위 박탈을 겪으면서 문제와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3


  규범은 바로 그 규범의 결과로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조건 설정을 통해 현실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규범에 가능한 최대치의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규범은 그것이 적용된 장 외부에 있지 않다. 마슈레에 따르면 규범은 그 적용의 장 생산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적용의 장을 생산하면서 스스로를 생산하기도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89


 인식들은 '경계'를 만든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짓는 경계가 생겼다는 것은 기존의 이분법적 구조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버틀러는 <젠더 허물기>에서 남녀의 이분법 구조 안에서 '누가 누구를 억압하는 구조' 이전에 '억압의 대상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계 바깥의 존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며, '여성'의 문제가 아닌 '성소수자'의 문제가 본격화된다.


 이런 경계들은 불편해져서 때로 서로 마찰을 빚는 접촉면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계들은 오래 머물 수 있는 딱히 어떤 장소도 아니고, 누군가 차지하기로 택할 만한 주체의 위치도 아니다. 이곳은 무심코 자신이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비-장소 nonplace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5


 만일 욕망이 바라는 게 인정을 받는 것이라면, 젠더도 욕망으로 인해 작동되는 한 인정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인정 도식이 인정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허물거나 undo' 아니면 인정을 거두어서 그 사람을 '허무는' 도식이라면, 인정은 인간을 차별적으로 생산하는 권력의 장이 된다. 이는 욕망이 사회적 규범에 개입되어 있는 만큼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고, 또 누가 인정받을 만한 인간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의 자격을 정하는 문제와도 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2


 억압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특정 부류의 주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주인 주체에 대해 가시적 타자, 억압된 타자로서, 어떤 가능하거나 잠재적인 주체로서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억압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인식부터 가능해야 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54


 버틀러에게 허물어져야 할 '젠더'가 이분법적 구조라면, 이를 대신해서 새롭게 '젠더'를 존재 be시키기 위한 행위 doing 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평적 관점을 갖는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행위다. 기존의 관념의 틀에서 경계 너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면, 비평적 활동을 통해 '경계'를 살피고, '문화 번역'을 통해 경계 양 편을 모두 '수행적'으로 변화시키며 결국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버틀러가 제기한 '(기존)젠더 허물기'의 해법이다. 동시에 새로운 인식의 탄생이기도 하다.


 내가 행위 doing 없이는 존재 be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행위의 조건은 부분적으로 내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다. 나의 행위가 내게 행해진 행위에 달려 있다면, 아니 그보다도 규범이 내게 작동한 방식에 달려 있다면 내가 '나'로서 지속될 가능성은 내게 행해진 것과 밀접히 관련될 수 있는 나의 존재 my being에 달려있다... 지금의 '나'는 규범에 의해 구성되는 동시에 규범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규범에 비판적이어서 규범에 변화를 주는 관계로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3


 우리가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과정을 따른다면, 존재론의 기본 범주, 즉 인간이 되는 것, 어떤 젠더가 되는 것, 성적으로 인식 가능해지는 것의 기본 범주를 재표명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 번역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를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는 다시 말해 가능한 에피스테메 episteme의 경계선, 즉 알 수 없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의 경계를 마주할 때 이 범주들이 어떻게 왜 부서져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다... 문화 번역은 경계가 분명하고 뚜렷하며 통일된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이 아니다. 그보다 번역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양쪽 언어 각각을 변화시킬 것이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67


 비평적 관점이 없다면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동 영역이 시작되는 힘의 관계의 미지성에, 또한 탈정치화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평성 critiality이란, 이미 경계가 정해전 영역에 있을 만한 딱히 어떤 위치도, 어떤 장소나 자리도 아니다. 비평적 활동의 하나는 경계 설정 행위 자체를 꼼꼼히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실험이나 에포케 epoche 혹은 어떤 의지 행위를 통해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토대 자체의 열개 dehiscence와 파열을 겪어야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74


 동전에는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이쪽이나 저쪽 편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염두에 두는 비평적 실천을 개발하려 한다. 합법화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즉, 인식 가능성과 인정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189


 전반적으로,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간 느낌을 준다. <젠더 트러블>이 '젠더'라는 범주에 대해 버틀러의 생각을 밝히고 새로운 개념을 정립했다면, <젠더 허물기>는 <젠더 트러블>의 '젠더'를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해야할까. 거칠게 요약해서 '젠더는 만들어진다' 는 수행성을 전편에서 강조했다면 '만들어진 젠더는 경계를 고려치 않는다'는 새로운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강조되는 수행성이 연극적 수행성이라면, <젠더 허물기>에서의 수행성은 언어적 수행성이 상대적으로 강조된다. 이와 같은 여러 형태의 수행성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선순환(善循環) 속에서 사회는 조금씩 달라진다는 말을 저자는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이라는 범주는 자기 안에 인종 간 권력 격차 작용을 자신의 역사성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범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은 결코 파악될 수가 없다. 인간 범주가 시간 속에 만들어지며 또 광범위한 소수자들을 배제해야만 작동된다는 말은, 그런 범주에서 배제된 자들이 그 범주에 대해, 그 범주에서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 범주에 대한 새로운 표명이 시작할 것임을 의미한다. 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29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젠더 허물기>은 여러 주제들을 다룬다. 성전환 문제, 게이 결혼 문제, 근친애 문제, 타자의 문제 등등. 얼핏 보면 각각 별개의 문제로 보이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경계를 넘어서는 가로지르기'의 주제로 수렴될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주제에서는 경계가 이분법구조, 국가, 상징계로 모습을 다르게 하여 나타나지만, 이들이 갖는 문제는 수행성을 통해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듯하다. <젠더 허물기> 안의 현실 주제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을 아는 즐거움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기로 하고, 이번 리뷰에서는 <젠더 허물기>의 전체적인 얼개를 살피는 정도로 마무리한다...

라캉은 이폴리트의 공식을 재해석하면서 다의성을 만들기 위해 소유격을 이용한다. 즉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사실 욕망하는 욕망이 욕망되는 욕망과 다른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은 최소한 동어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를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욕망은 자신의 쇄신을 모색하지만 자신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복제해야 하고, 그에 따라 과거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욕망은 단일한 욕망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형상을 취하면서 자신에게 타자가 된다. 욕망이 또한 원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이고, 여기서 대타자는 욕망의 주체로 생각된다. - P221

이 논쟁(게이 결혼)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또한 국가의 위상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성적 결합의 형식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국가 권력에 관심이 있다. - P179

여성의 구조적 지배를 다른 모든 젠더 분석이 나아가야 할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틀은, 젠더가 특정 집합의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정치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여러 방식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페미니즘 자체의 존속 가능성도 위험에 빠뜨린다... 페미니즘이 항상 여성에 대한 성적/비성적 폭력에 대항해왔다는 점은 다른 운동들과 연합할 기반으로 작용해야 한다. 몸에 대한 공포증적 phobic 폭력은 반-동성애공포증, 반-인종차별, 페미니즘, 트랜스 및 인터섹스 행동주의와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 P22

말하기가 행하기의 한 형식이라면 그리고 행해진 부분이 자기라면 대화는 뭔가를 함꼐 행하는 양식이고 다른 것이 되어가는 양식이다. 이런 교환 과정 중에 뭔가가 성취되겠지만 그게 다 완성될 때까지는 무엇이 혹은 누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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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표지(王彪之)가 말하였다.
"무릇 천하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된 사람은 마땅히 나라를 보호하고 집안을 편안하게 하며, 다스리는 일은 환히 빛내야 하는데 마침내 궁실과 가옥을 수리하는 것을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p33/122) - P33

"무릇 공이 있음에도 상을 내리지 않고 죄가 있음에도 주살하지 않으면 비록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라도 다스릴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인 경우에야! "(p50/122) - P50

《서경(書經)》에서 말하였습니다. ‘위엄(威嚴)이 아끼는 것을 누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지만 아끼는 것이 위엄을 누르면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또 《시경(詩經)》에서 말하였습니다. ‘속이거나 교활한 사람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삼가 망극하게 하며, 노략질하고 포학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데, 그에게 간특한 짓을 못하게 하라.’ 지금 부견이 이러한 말들을 어겼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p51/122)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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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이런 사람을 얻는 것은 쉽지 않고 이를 지키는 것 또한 어려운데, 진실로 그에 걸맞지 않은 사람에게 맡기면 걱정거리가 생기고 염려할 것이 드러나면 어찌 홀로 짐(朕)만의 걱정이겠소? (p33/112) - P33

왕맹은 강직하고 밝고 맑고 정숙하여 선하고 악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시소(尸素)를 쫓아내고 그윽하게 묶여 있는 사람을 드러내 발탁하며,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부과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관리는 반드시 재능만큼 일을 담당하고, 형벌은 반드시 죄만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서 나라는 부유해지고 군사는 강하게 되었으며, 싸우면 이기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진(秦)은 크게 잘 다스려졌다. (p44/112) - P44

부견이 불러서 만나보고 기뻐하였고, 잘 다스리는 근본을 물었다. 대답하였다. "잘 다스리는 것의 근본은 사람을 얻는데 있으며, 사람을 얻는 것이란 살펴서 뽑는데 있고, 살펴 뽑는 것은 진실한데 있으니, 관직에서 그에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국가는 잘 다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말은 간단한데 이치는 넓다고 말할 수 있소."(p46/112) - P46

무릇 잘 만든 사람이 반드시 잘 완성하는 것은 아니며, 처음을 잘 시작한 사람이 반드시 끝을 잘 마치는 것은 아니니, 이리하여서 옛날의 훌륭하신 왕들은 공업(功業)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마치 깊은 골짜기 앞에 간 것처럼 하였습니다. 폐하께 엎드려 생각하건데 앞에 가신 성인들의 발자취를 뒤쫓으신다면 천하가 아주 다행이겠습니다."(p62/112)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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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진왕(秦王) 부견이 그를 예로 대하여 연인(燕人)들의 희망을 거둬들이고, 그를 가까이하여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다하게 하였으며, 그를 총애하여 연의 무리들을 기울게 하고, 그를 믿어서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맺도록 하였으니 아직은 허물을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왕맹이 어찌하여 모용수를 죽이는데 급급하여 마침내 시장에서 죽 파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 마치 그의 총애를 질투하여 그를 참소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었겠습니까?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9/92


 조금씩 읽던 사마광(司馬光, 1019 ~ 1086)의 <자치통감 資治通鑑>도 100권을 넘어섰다. 매권이 얇긴 해도 100권이면 적지 않은 분량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전체 책이 294권이니 전체 분량의 30% 정도에 불과하여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읽고 있는 시대는 오호 십육국시기로(五胡 十六國時代, 304 ~ 439)의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337 ~ 385)의 치세로,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 ~ 384) 때 불교를 전파한 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부견은 재상 왕맹(王猛, 325 ~ 375)의 보좌를 받아 전진을 강국으로 만들었는데 독자들은 후한말부터 이어지던 극심한 혼란기에 태평성세의 빛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 이 시기를 읽던 중 저자 사마광의 논평에 시선을 멈추게 된다. 그의 말에 끌려서가 아니라 그의 논지에 반(反)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평이 나온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왕맹은 자신이 멸망시킨 전연의 잔당인 모용수(慕容垂, 326 ~ 396) 일족을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지만,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왕맹은 모용수의 숨겨진 실력과 야심을 알아보고 진언을 하지만, 부견은 천자란 모든 이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를 거절한다.


 관중(關中)의 병사와 백성들은 평소 모용수 부자(父子)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흠모하였다. 왕맹이 부견에게 말하였다.  "모용수 부자는 비유하자면 용과 호랑이 같은데,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만약에 바람과 구름이 끼는 기회를 빌게 된다면 장차 다시는 제압할 수 없을 것이어서 일찍 그를 제거함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영웅을 거둬들여서 사해를 깨끗이 하고자 하는데 어찌 그를 죽인단 말이오? 또한 그가 처음 왔을 때 내가 이미 정성으로 그를 받아들였으니, 필부(匹夫)라도 오히려 자기가 한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닌데, 마물며 만승(萬乘)의 경우에야?"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0/92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왕맹의 조언이 뛰어난 모용수에 대한 질투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깎아내리면서, 부견의 행동이야말로 군주(君主)의 도(道)에 맞는다며 그를 두둔한다. 그렇지만,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전투였던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전진이 패배한 후 모용수는 자신의 일족을 거느리고 멀리 떠나 후연(後燕)을 건국하며 왕맹의 통찰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결국, 역사는 사마광이나 부견이 강조한 인(仁)이 송양지인(宋襄之仁)임에 불과했음을 말없이 보여준다.


  모용수는 은밀히 연(燕)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연의 복록(福祿)을 회복시키려는 모의를 하는데, 때마침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병사를 일으켜 진(秦)을 배반하여 예주목(豫州牧)인 평원공(平原公) 부휘(符暉)가 있는 낙양(落陽)을 공격하려고 모의하자 진왕(秦王) 부견이 역참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 모용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p29)... 모용수가 형양에 이르자 많은 부하들이 굳게 존호에 오를 것을 청하자 모용수는 마침내 진(晉)의 중종(中宗) 고사에 의거하여 대장군, 대도독, 연왕(燕王)이라고 칭하고 승제(承制)하여 업무를 시행하고 이를 통부(統府)라고 하였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34/103


 이해 11월 겨울, 송양공이 초성왕과 홍수에서 교전했다. 초나라 군사가 미처 강을 다 건너지 못했을 때 목이가 건의했다. "초나라는 병사가 많고 우리는 병사가 적으니 이들이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기회를 이용해 먼저 공격을 해야만 합니다." 송양공이 듣지 않았다... 송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송나라 백성 모두 송양공을 원망했다. 송양공이 변명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을 하지 않는 법이다." 목이가 말했다. "전쟁을 하면 승리를 얻는 것이 공적입니다. 어찌 실제와 동떨어진 말만 늘어놓는 것입니까? 군주의 말씀대로라면 노비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지, 어찌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_ 사마천, <사기 세가> <송미자세가>, p234


 진(秦)의 군사가 비수(肥水)에 가까이 가서 진을 치자 진(晉)나라 군사는 건널 수가 없었다... 진(秦)의 제장들이 모두 말하였다. "우리들은 많고 저들은 적어서 그들을 막아 그들이 올라올 수 없게 하여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다만 군사를 이끌고 조금 물러나게 해서 그들에게 절반 쯤 건너게 한 다음 우리들의 철기(鐵驥)로 그들을 쫓아 죽이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1/103


 잠시 이야기가 엇나가지만, 전진의 부견을 보면서 송양공의 모습을 계속 연상하게 된다. 송양공이 자신의 신하 목이의 조언을 거절하며 분수에 넘치는 자비를 베풀다가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나, 부견이 왕맹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나라가 분열하게 되는 모습은 기시감(旣視感)을 안긴다. 여기에 곁들여, 두 군주 모두 강을 두고 벌일 싸움에서 패배한 점, 각각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다 실리를 놓친 점도 그러하다. 다만, 이에 대해서 사마광은 별다른 평을 하지 않는다. 사실, 송나라 시대를 살았던 사마광이 부견이 모용수를 놓아준 일이 어떤 보답으로 돌아왔는가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그런 평을 <자치통감>에 남겼을까.


 권익(權翼)이 간하였다. "모용수의 용맹과 지략이 보통사람을 능가하고 대대로 동하(東夏)의 호족으로 잠시 화를 피해 왔으나 그 마음이 어찌 관군(冠軍)의 장군 노릇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는 굶주리면 사람에 의지하지만, 매양 폭풍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늘을 능멸할 만한 뜻을 품고 있으니, 바로 의당 그를 새장에 가두어야 하는데 어찌 풀어서 멋대로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 두십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이미 그에게 허락하였으니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거늘 하물며 만승(萬乘)인 경우에야! 만약 천명(天命)이 폐하고 흥함을 갖고 있다면 진실로 지혜와 힘으로써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폐하는 사소한 신용을 중히 여기시고 사직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이 보건대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관동의 혼란은 이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6/103


 그것은 <자치통감>이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서를 통해 정치 라이벌 왕안석(王安石, 1021 ~ 1086)을 경계하려는 사마광의 의중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법(新法)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왕안석과 이를 막으려는(捍) 사마광.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사마광은 <대학 大學>에서 '격물(格物)'을 '막는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사마광은 왕맹의 모습 속에서 라이벌 왕안석의 모습을 발견하고 왕맹에 대한 직접 비판을 통해 왕안석을 우회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자치통감>의 사마광 평을 보면서 <자치통감>에 자리한 역사관을 깊이 느끼게 된다...


 왕안석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사마광이 자기의 의견을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신종은 사마광에게 <자치통감>의 편찬 작업을 하게 하고, 한 시대가 끝나면 바로 올리게 하고, 또 경연에서 이를 진강하게 했으며, 이를 통해 사마광은 자기의 정치철학을 신종에게 말할 수 있었다.(p89)...  사마광이 왕안석의 정책을 '장사꾼이 마지막 이익을 강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서는 왕안석이 새로 만든 기구인 삼사조례사로 와서 근무할 것을 요구하자 돈과 곡식에 관해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했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과 유서의 생각이 유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눈앞의 이익보다는 도(道)를 추구하여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162/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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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3 23: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심으로 겨울호랑이님의 읽기가 부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03 23:39   좋아요 5 | URL
아닙니다... 진득한 면이 부족해서 마음가는대로 읽는 제 멋대로 독서인걸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