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란 생명을 이루게 하는 것이요, 부부의 근원은 생명을 탄생하게 하고 그 생명을 이루게 함이니 미세한 벌레도 생명을 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곳에 알을 까고 초목도 열매를 맺기 위하여 꽃을 피우며 나비를 부를 뿐만 이니라 땅속의 진기를 숨가쁘게 빨아올려 열매를 이루게 함이니 만물의 생사는  더불어 있는 것, 더불어 있다 함은 정으로 엮어졌다. 정이 물(物)을 다스리고 정이 물로 향할 때 무에도 생명을 부여할 수 있으나 물이 정을 침범하고 다스리려  적에는 생명이 깨어져, 만물의 특성이 깨어지고 인성도 깨어지고 더불어있을 수도 없거니와 천지만물은 서로 떠나서 나도 없게 되고 천지만물도 없게 되는 것,  좁게 보고 좁게 생각지 마시오. (p508/762) - P508

우리가 말하는 한에는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한이 된다, 한이 맺혔다, 할 때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빼앗겼든 당초 주어지지 않았는지  간에 결핍을 뜻하고, 한을 풀었다,  할 때는  채워  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해서 결핍은 존재할 수 없는  방향으로, 채워졌음은 존재하는 방향으로, 그렇다면  그것은 생명 자체에  관한 것이에요. 한은 생명과 더불어 왔다 할 수 있겠어요. 한의 근원은 생명에 있다 할 수도 있겠어요.(p572/762)
- P5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토대 위에 ‘양(Quantity) ‘을 수힉적으로 측정하며 운동을 예측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과학. 유도원•주전원 가설에 기초한 「알마게스트」는 하늘을, 「지리학」은 땅을 설명하는 확고한 고대 과학의 정점을 이루며, 중세 천문학을 ‘알마게스트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전락시킨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대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떻게 중세 유럽과 이슬람 과학계를 지배했는가. 이를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 1」에서 다룬다.

앞으로 요시타카의 3부작 리뷰를 통해 과학사를 정리하고, 서구의 근대화를 이끈 첫번 째 요인인 ‘자본주의‘에 이은 두번 째 요인인 ‘과학‘의 역사를 정리할 계획이다...


고대 천문학이 도달한 지점으로 오로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비단 이 저작의 수준이 높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이게바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그의 저작은 고대의 수학적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천문학의 성과를 사실상 전부 포함하며, 『알마게스트』 에 의거해보는 한 그리스나 오리엔트에서 알마게스트 보다 선행했으면서 이후에도 살아남은 전혀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알마게스트』가 그 후 수백 년에 걸쳐 수학적 천문학에서 기술과 계산의 기본 형식 paradigm을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P59

이 책은 15세기 중기부터 17세기의 30년전쟁까지, 북방의 인문주의 운동과 종교개혁을 배경으로 하여 중부 유럽을 무대로 한세기 반에 걸쳐 전개된 천문학과 지리학, 조금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세계 인식의 부활과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전작 「16세기 문화혁명」을 보완하는 의미로, 16세기 문화혁명과 나란히진행됐던 천문학 개혁의 전말을 추적하는 것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서구 근대에서 과학이 탄생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탐색은, 「과학의 탄생: 자력과 중력의 발견」, 「16세기 문화혁명」과 함께 3부작을 이루는 이 책으로 일단 완결되는 셈이다.
- P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의 핵심은 행성 운동의 제1의 부등성과 제2의 부등성을 각각 이심원•등화점 메커니즘과 유도원•주전원 메커니즘으로 설명하고, 관측 데이터에서 도출된 유도원과 주전원 반경의 비, 그리고 그 회전주기로 행성궤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각 파라미터를 결정하는 데 적합하도록 각 행성의 특별한 배치를 신중히 선정하고, 그렇게 선정된 배치에서 관측하여 얻은 최소한의 데이터를 사용한다.  - P90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제창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지구중심의 세계상에서 태양 중심의 세계상으로 전환되었다는 것뿐만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관측과 기술을 위한 좌표계를 변환했을 뿐으로,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점은 지구를 행성 대열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 P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구지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길상은 생각에 빠져서 자신이 달구지를 타고 있다는 것을, 읍에 심부름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거의 잊었다. 꾸불꾸불 밀려오는 물굽이가 바닷가의 방죽을 치고 또 치는 것처럼 잇닿아 밀려오는 공상은 그에게 다시없이 감미로운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수많은 생각들은 마치 만화경같이 찬란하고 다양했다. 갖가지 빛깔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과거에서 미래까지 추억과 꿈은 마음대로 끝도 시작도 없이 그의 생각 속 넓은 공간을 비상하는 것이다. 추억의 창문에서는 어느 길모퉁이에서 들었던 소슬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장님이 불고 가던 피리 소리가 들려왔고 범패(梵唄)소리, 새벽 산사에 울리던 장엄한 인경 소리가 들려왔고 강물을 건너오는 뱃사공의 노랫소리, 추억의 창문에서 명주 수건으로 감싼 월선아지매의 얼굴이 보였다. 월선아지매의 모습은 별당아씨의 뒷모습으로 변해갔고 산을 바라보던 슬픈 그 구천이의 옆얼굴이 나타났다. (p114/518) _ 박경리, <토지 3>


 어느새 토지 독서챌린지에서 <토지 3>를 읽고 있다. 아버지 치수의 죽음과 조준구 일가의 등장으로 긴장감이 서서히 생기는 도중에 달구지를 타고 가는 길상의 상상에 눈이 멎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시각(視覺), 청각(聽覺)의 이미지. 절에서 자란 길상의 과거와 현재 최참판 댁 몰락의 전조인 별당아씨와 구천의 도피까지 현재에 이르는 이미지들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쪽으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u cote de chez Swann>의 유명한 마들렌 과자를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은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_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p54/226


 마들렌 과자의 미각(味覺)이 불러온 수많은 추억과 이미지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이 장면을 '기호'로 받아들인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호'안에 숨겨진 의미(진리)를 찾는 과정으로 인식하는데, 미래를 향한 '찾기'의 과정에서 이러한 기호들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 장면들은 아름다운 몽환적 이미지의 표현이 아닌 작품 전체에 대한 과제 부여의 성격이 강하다.


 세번 째 세계는 인상 혹은 감각적 성질 qualites sensibles의 세계이다. 어떤 감각적 성질은 우리에게 야릇한 기쁨을 주는 동시에 일종의 <명령>을 전해 준다. 이런 식으로 체험된 성질은 더 이상 그 성질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대상의 속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해독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 <완전히 다른> 대상의 기호로 나타난다.(p34)... 우리는 이 성질, 이 감각적 인상을 마치 물 속에 넣으면 열려져서 갇혀 있던 형태가 드러나는 일본 종이처럼 펼쳐 낸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특별한 기쁨이 찾아오고, 그 결과 이 기호들은 그 직접적인 효과로 인해 이전 상태[기쁨을 주기 이전의 사물들'과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유 작업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숨겨진 대상을 건네주면서 기호의 의미가 나타난다 (마들렌이 콩브레를, 종탑들이 소녀들을, 포석들이 베니스를 건네 주는 식으로 말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6


 그렇지만, 이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작품 끝에 <되찾은 시간> 전까지 미뤄진다. 그 전까지 독자들은 마들렌 과자로부터 시작된 기호들의 의미를 '사교계', '사랑의 그룹', '기호의 세계' 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이라는 다른 시간선들의 교차에서 끊임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여행의 끝은 '되찾은 시간'에서 비로소 풀려나간다.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가 마지막의 현시를 미리 암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추억의 문을 열어준다는 장점, 그리고 콩브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되찾은 시간>의 첫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되찾은 시간>을 모르고 이 작품을 읽어가는 독자의 눈에는, 콩브레 이야기로 옮겨가는  것은, 인위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가장 단순한 서술적 관례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독서에 이르러 내용을 보다 잘 알게 되면, 서재에서의 사색이 마침내 깨닫게 된 소명을 검증하는 시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주는 것처럼,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는 유년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의 이러한 균형은 작품 구성을 주도하는 원칙임이 드러난다. _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2>, p284 


 해석자는 마들렌이나 종탑의 경우에서 자신의 이해가 미치지 못했었던 것에 대해 "찾기"의 끝 부분에 와서 비로소 이해한다. 즉 물질적 의미는 그것이 구현하는 관념적 본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7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토지 3>의 길상의 생각 장면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실, 별 관련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시켰으니 조금 더 나가보자.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길상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과거 절에 있었던 시기를 생각하면서 부처님도 자신을 공포로부터 구원하지 못했음을 두려워하며 달구지 위에서 잠을 깨어난다.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영상을 내버려두고 길상의 생각은 별안간 달음박질쳐서 엉뚱한 곳으로 간다. 어느 한낮에 꾼 꿈으로 날아갔다. 다시 뛰어서 우뚝 멈춘 곳은 숲 속이며 개울가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물맴이가 도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 길상은 자신이 달구지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p115/518) _ 박경리, <토지 3>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길상은 평사리가 아닌 간도에서 자신의 생각 속에서 스쳐갔던 인물 김환(구천)을 다시 만난다. 그 전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구천 출생의 비밀과 서희와의 관계가 이 만남을 통해 밝혀지게 되고, 이를 통해 과거 구천에 대한 경외(敬畏)감이 재생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진리 찾기'와 '되찾은 시간'이 완성되었다고 본다면 무리가 있을까. 구천은 달구지 위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통해 '별당아씨 - 구천'의 관계라는 '기호'를 무의식 중에 부여받았다면, 객줏집에서 만남을 통해 '되찾은 시간' 속에서 출생의 비밀이라는 진리와 '기호'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십 년 세월만 무서운가? 이 무서운 인연들. 목구멍으로 술이 타고 내려가는데, 뜨거운 빼주가 넘어가는데 머릿속이 차츰 맑아온다. 선명하게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지난 일들이 새롭게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소년 길상이는 구천이를 두려워했다. 쥐어박히며 탱화 그리기를 가르치는 혜관보다 남몰래 손짓하여 데려가서는 글을 가르쳐주던, 말이 적고 엄격해 보이던 사람.(p447)...  "별당아씨가 어떤 여자던고? 어떤 여자였던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었던, 현세와 하늘에 순명할 수 없었던 사람, 땅을 끊을 수 없었던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그 굴원은 돌을 안고 멱라(汨羅)에 빠졌건만, 그 기나긴 방류(放流)도 끝이 났건만 어찌 나는 살아 있는가."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다.(p360/518)... 꿈도 멀어져갔다. 빛깔과 빛깔이 난무했다. 우관스님이 거기 서 있는 듯했으나 그 모습도 사라졌다. 길상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객줏집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_ 박경리, <토지 8>, p457/656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기호'의 의미로부터 해방된 길상의 모습은 이후 길서상회를 정리하고 간도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서희와의 이별 장면에서 잘 표현된다.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별당아씨 - 구천'의 사랑을 인정하는 길상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서희. 서희는 남편 길상과 함께 돌아가려 하지만, 길상은 이런 서희 곁을 떠나고 만다. 마치, <갇힌 여인>의 알베르틴이 화자의 곁을 떠나듯. 상처입은 아름다운 나비 서희의 여행은 그래서 <토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 별당의 그 여자를 유인해 갔다 그 말씀이시오?" 목에 잠겨 몸부림치듯 서희는 말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서희는 절을 향해 갈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길상은 떠났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용정촌에는 풍문이 돌았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모시옷의 최서희,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처입은 나비같이, 그래도 그는 아름다웠다._ 박경리, <토지 8>, p618/656


 사실 갇힌 사람은 알베르틴이 아니라, 자신의 질투와 의혹에 갇힌 화자이다. "질투는 상상력의 실패이며(......) 질투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은 사랑의 아픔에 맞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라는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어쩌면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은 그 미친 듯한 욕망인 질투를 통해,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지극히 내밀한 몸짓과 시선이라 할지라도 끝도 한계도 없는 탐색 작업을 통해 그 미세한 내면의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려는 고통스러운 여행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p279/336 작품 해설 中


ps.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 전개가 상당히 무리하고 관련없는 두 작품을 끌어다가 페이퍼를 작성한 듯 하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재미로라도 두 대작(大作)과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8-07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토지>와 <일.시.찾>의 콜라보라닛~ 생각도 못한 조합에 그저 입이 쩍벌어집니다.
아니 내가 떠올랐음 그런거죠~ 논리 따윈 필요 없습니다.(논리가 부족하단 말은 절대 아님~ㅋ)
토지문화재단에서 겨울호랑이님이 챌린지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할 듯하네요~👍

겨울호랑이 2021-08-07 13:1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덕분에 좋은 프로그램 알게 되었고, 쏟아지는 과제(?)를 하다보니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어 좋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바람돌이 2021-08-08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지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들뢰즈까지...
우와 대단한 연결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08 06:55   좋아요 0 | URL
사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에서두 작품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연결이 기발했다면 공은 들뢰즈 몫이고, 무리했다면 제 부족함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간단히 말하려고 그저 ‘죽음’이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들만큼 많은 죽음이 있다. 전속력으로 모든 방향에서 달려오는 죽음, 이런저런 사람을 향해 운명이 보낸 능동적인 죽음,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볼 수 있는 감각이 없다.(p7/339) - P7

알베르틴과의 삶은 내가 질투를 느끼지 않을 때는 권태로웠고, 질투를 느낄 때는 고통스러웠다.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해도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베크에서 캉브르메르 부인의 방문이 있은 후 그렇게도 행복했던 저녁에 내게 영감을 주었던 그런 현명한 정신에서, 나는 우리의 관계를 계속해 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와 헤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가 그녀에 대해 간직할 추억은, 피아노 페달에 의해 연장되는 일종의 진동과도 같은 이별의 순간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감미로운 이별의 순간을 택하고,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p253/339) - P253

사건이란 사건이 일어난 순간보다 훨씬 거대해서, 그 순간 속에 완전히 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사건은 물론 우리가 간직하는 기억을 통해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시간에도 그 자리를 요구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때 우리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겠지만, 추억 속에서도 사건은 변경되지 않던가?(p262/339) - P26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1-08-06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7 - 내년 또는 내일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죠. 가능한 일인데 말이죠.

P253 - 마음속에서 오래 진동하는 이별, 이란 표현이 참 좋네요.

P262 - 살면서 과거의 사건이 마음속에서 많이 변경되는 걸 경험하죠. 특히 제가 특별한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시각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옳았던 게 틀린 게 되고, 틀렸다고 여긴 게 옳았음을 경험하기도 하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다, 입니다.

문장을 잘 뽑으신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8-06 15:45   좋아요 0 | URL
모든 종교의 기원은 ‘죽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누군가 말했던 생각납니다. 죽음이 주는 불안과 공포가 결국은 언제 올지 모르는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죽음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도 연관됨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 속의 사건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 문장이 독립적인 듯 유기적으로 잘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의 문장들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를 지니면서 전체적으로 얼마나 잘 조화되는지 책을 읽을 때마다 느낍니다. 페크님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08-06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겨울호랑이님!
자치통감도 매일 읽으시고 이 책도 매일 읽으시고...
어려운 책은 다 읽으시면서 다른 책도 만만치않고, 도대체 이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

겨울호랑이 2021-08-06 16:49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한 번에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조금씩 정리해 둔 것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긴 하지만 아직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아 채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