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지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길상은 생각에 빠져서 자신이 달구지를 타고 있다는 것을, 읍에 심부름 가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거의 잊었다. 꾸불꾸불 밀려오는 물굽이가 바닷가의 방죽을 치고 또 치는 것처럼 잇닿아 밀려오는 공상은 그에게 다시없이 감미로운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수많은 생각들은 마치 만화경같이 찬란하고 다양했다. 갖가지 빛깔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과거에서 미래까지 추억과 꿈은 마음대로 끝도 시작도 없이 그의 생각 속 넓은 공간을 비상하는 것이다. 추억의 창문에서는 어느 길모퉁이에서 들었던 소슬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장님이 불고 가던 피리 소리가 들려왔고 범패(梵唄)소리, 새벽 산사에 울리던 장엄한 인경 소리가 들려왔고 강물을 건너오는 뱃사공의 노랫소리, 추억의 창문에서 명주 수건으로 감싼 월선아지매의 얼굴이 보였다. 월선아지매의 모습은 별당아씨의 뒷모습으로 변해갔고 산을 바라보던 슬픈 그 구천이의 옆얼굴이 나타났다. (p114/518) _ 박경리, <토지 3>
어느새 토지 독서챌린지에서 <토지 3>를 읽고 있다. 아버지 치수의 죽음과 조준구 일가의 등장으로 긴장감이 서서히 생기는 도중에 달구지를 타고 가는 길상의 상상에 눈이 멎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시각(視覺), 청각(聽覺)의 이미지. 절에서 자란 길상의 과거와 현재 최참판 댁 몰락의 전조인 별당아씨와 구천의 도피까지 현재에 이르는 이미지들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쪽으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u cote de chez Swann>의 유명한 마들렌 과자를 먹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은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_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p54/226
마들렌 과자의 미각(味覺)이 불러온 수많은 추억과 이미지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이 장면을 '기호'로 받아들인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호'안에 숨겨진 의미(진리)를 찾는 과정으로 인식하는데, 미래를 향한 '찾기'의 과정에서 이러한 기호들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 장면들은 아름다운 몽환적 이미지의 표현이 아닌 작품 전체에 대한 과제 부여의 성격이 강하다.
세번 째 세계는 인상 혹은 감각적 성질 qualites sensibles의 세계이다. 어떤 감각적 성질은 우리에게 야릇한 기쁨을 주는 동시에 일종의 <명령>을 전해 준다. 이런 식으로 체험된 성질은 더 이상 그 성질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대상의 속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가 해독하려고 시도해야만 하는 <완전히 다른> 대상의 기호로 나타난다.(p34)... 우리는 이 성질, 이 감각적 인상을 마치 물 속에 넣으면 열려져서 갇혀 있던 형태가 드러나는 일본 종이처럼 펼쳐 낸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특별한 기쁨이 찾아오고, 그 결과 이 기호들은 그 직접적인 효과로 인해 이전 상태[기쁨을 주기 이전의 사물들'과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유 작업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숨겨진 대상을 건네주면서 기호의 의미가 나타난다 (마들렌이 콩브레를, 종탑들이 소녀들을, 포석들이 베니스를 건네 주는 식으로 말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6
그렇지만, 이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작품 끝에 <되찾은 시간> 전까지 미뤄진다. 그 전까지 독자들은 마들렌 과자로부터 시작된 기호들의 의미를 '사교계', '사랑의 그룹', '기호의 세계' 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이라는 다른 시간선들의 교차에서 끊임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여행의 끝은 '되찾은 시간'에서 비로소 풀려나간다.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가 마지막의 현시를 미리 암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은 추억의 문을 열어준다는 장점, 그리고 콩브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되찾은 시간>의 첫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되찾은 시간>을 모르고 이 작품을 읽어가는 독자의 눈에는, 콩브레 이야기로 옮겨가는 것은, 인위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가장 단순한 서술적 관례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독서에 이르러 내용을 보다 잘 알게 되면, 서재에서의 사색이 마침내 깨닫게 된 소명을 검증하는 시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주는 것처럼, 마들렌 과자의 도취 상태는 유년기의 되찾은 시간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의 이러한 균형은 작품 구성을 주도하는 원칙임이 드러난다. _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 2>, p284
해석자는 마들렌이나 종탑의 경우에서 자신의 이해가 미치지 못했었던 것에 대해 "찾기"의 끝 부분에 와서 비로소 이해한다. 즉 물질적 의미는 그것이 구현하는 관념적 본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_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p37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토지 3>의 길상의 생각 장면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실, 별 관련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논의를 진행시켰으니 조금 더 나가보자.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길상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과거 절에 있었던 시기를 생각하면서 부처님도 자신을 공포로부터 구원하지 못했음을 두려워하며 달구지 위에서 잠을 깨어난다.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영상을 내버려두고 길상의 생각은 별안간 달음박질쳐서 엉뚱한 곳으로 간다. 어느 한낮에 꾼 꿈으로 날아갔다. 다시 뛰어서 우뚝 멈춘 곳은 숲 속이며 개울가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물맴이가 도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서워졌다.... 길상은 자신이 달구지 위에 있음을 깨달았다.(p115/518) _ 박경리, <토지 3>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길상은 평사리가 아닌 간도에서 자신의 생각 속에서 스쳐갔던 인물 김환(구천)을 다시 만난다. 그 전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구천 출생의 비밀과 서희와의 관계가 이 만남을 통해 밝혀지게 되고, 이를 통해 과거 구천에 대한 경외(敬畏)감이 재생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진리 찾기'와 '되찾은 시간'이 완성되었다고 본다면 무리가 있을까. 구천은 달구지 위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통해 '별당아씨 - 구천'의 관계라는 '기호'를 무의식 중에 부여받았다면, 객줏집에서 만남을 통해 '되찾은 시간' 속에서 출생의 비밀이라는 진리와 '기호'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십 년 세월만 무서운가? 이 무서운 인연들. 목구멍으로 술이 타고 내려가는데, 뜨거운 빼주가 넘어가는데 머릿속이 차츰 맑아온다. 선명하게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지난 일들이 새롭게 눈앞을 지나가고 있다. 소년 길상이는 구천이를 두려워했다. 쥐어박히며 탱화 그리기를 가르치는 혜관보다 남몰래 손짓하여 데려가서는 글을 가르쳐주던, 말이 적고 엄격해 보이던 사람.(p447)... "별당아씨가 어떤 여자던고? 어떤 여자였던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었던, 현세와 하늘에 순명할 수 없었던 사람, 땅을 끊을 수 없었던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그 굴원은 돌을 안고 멱라(汨羅)에 빠졌건만, 그 기나긴 방류(放流)도 끝이 났건만 어찌 나는 살아 있는가." 한 사나이가 어둠 속에서 통곡하고 있었다.(p360/518)... 꿈도 멀어져갔다. 빛깔과 빛깔이 난무했다. 우관스님이 거기 서 있는 듯했으나 그 모습도 사라졌다. 길상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객줏집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_ 박경리, <토지 8>, p457/656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기호'의 의미로부터 해방된 길상의 모습은 이후 길서상회를 정리하고 간도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서희와의 이별 장면에서 잘 표현된다. 구천과의 만남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별당아씨 - 구천'의 사랑을 인정하는 길상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서희. 서희는 남편 길상과 함께 돌아가려 하지만, 길상은 이런 서희 곁을 떠나고 만다. 마치, <갇힌 여인>의 알베르틴이 화자의 곁을 떠나듯. 상처입은 아름다운 나비 서희의 여행은 그래서 <토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보복을 하기 위해서...... 별당의 그 여자를 유인해 갔다 그 말씀이시오?" 목에 잠겨 몸부림치듯 서희는 말을 밀어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소." 서희는 절을 향해 갈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길상은 떠났고,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으며 용정촌에는 풍문이 돌았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모시옷의 최서희,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상처입은 나비같이, 그래도 그는 아름다웠다._ 박경리, <토지 8>, p618/656
사실 갇힌 사람은 알베르틴이 아니라, 자신의 질투와 의혹에 갇힌 화자이다. "질투는 상상력의 실패이며(......) 질투를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은 사랑의 아픔에 맞서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라는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어쩌면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은 그 미친 듯한 욕망인 질투를 통해,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계되는 지극히 내밀한 몸짓과 시선이라 할지라도 끝도 한계도 없는 탐색 작업을 통해 그 미세한 내면의 사건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려는 고통스러운 여행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_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p279/336 작품 해설 中
ps.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 전개가 상당히 무리하고 관련없는 두 작품을 끌어다가 페이퍼를 작성한 듯 하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재미로라도 두 대작(大作)과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