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중등학교 입학부터 취업 이후까지
정연태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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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본국과 식민지 한국 사이에서는 법적(제도적) 차별이 주목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 한국은 일제 본국의 이법지대 異法地帶로서 법적 차별을 피할 수 없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식민지 한국인은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의무교육제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한국은 공장법/건강보험법/차가법 借家法 등 각종 사회/복지 입법, 소원법/행정재판법 등의 적용 대상 지역이 되지 못하였다. 반면 일제 본국과는 달리 식민지 한국에서는 헌병경찰(경찰)의 즉결 처분권이 폭넓게 인정되었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19


 일제 하에서 민족차별은 실제하였는가? 정연태 교수의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민족차별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일본 본국과는 다른 법제도 적용에 따른 법적 차별도 중요하지만, 저자는 법적 차별과 법적 차별이 낳은 1차 결과물인 구조적 차별이 낳은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다.


 식민지 민족차별이 전개되는 층위와 양상은 세 가지로 범주화될 수 있다. 법적 민족차별, 구조적 민족차별, 관행적 민족차별이 그것이다. 법적 민족차별은 명시적인 법 규범이나 제도를 통한 차별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조적 민족차별은 법적 민족차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시적인 법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와 위계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적/사실적 차별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관행적 민족차별은 법적 민족차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나 위계관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편견이나 혐오에 기초한 의식과 문화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정서적/사회적 차별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3


 정연태 교수가 분석한 차별의 층위 - 법적, 구조적, 관행적- 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주장한 3층 구조 - 물질생활, 시장경제, 자본주의 - 를 연상시킨다. 층위(層位)라는 표현에서처럼 이들의 관계는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차이가 있다면, 브로델의 분석 대상인 자본주의는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반면, 정연태 교수의 차별의 층위의 분석 구조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관행적 민족차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말하지 않지만, 차별의 층위는 역(逆)피라미드 형태로 형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관행적 민족차별은 식민자의 일상적 언행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법적 영역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식민지 민족차별의 다채로운 양상과 특성을 드러내준다. 예컨대, 관행적 민족차별은 공적 활동영역에서든 사적 생활영역에서든 지배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지배민족에 대하여 일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경멸하는 시선, 무시하는 태도, 모욕적인 언행, 배제와 차별 대우, 심지어 구타와 폭력 등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렇기에 민족 간 정치경제적 불평등성, 법과 구조의 민족차별성은 물론 식민지 민족차별을 정당화하고 근저에서 지탱해주는 식민자 내면의 의식세계까지 보여준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


 저자는 1920년대 충남 강경에 위치한 강상중등학교에 주목한다. 이 시기 학교 입학과 중퇴, 졸업 및 취업 현황 등의 자료를 통해 교육분야에서 일어난 여러 차별의 유형을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1919년 3.1운동 이후 노골적인 법적 차별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는 대신, 국내 정착 일본인과 한국인들의 경제적 불평등에서 오는 구조적 차별의 모습과 관행적 민족차별을 확인할 수 있다.


 강상 당국은 다른 한/일 공학교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지원 규모에 맞추어 민족별 입학정원을 할당해, 신입생 선발과정에서 노골적인 민족차별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민족 간 합격률의 현저한 격차는 경제력 차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인 것처럼 호도해, 신입생 선발과정상의 민족차별을 은폐, 부정하고자 하였다. 이런 논리로 민족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나 다른 한/일 공학 당국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양태였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49


 법적인 차별이 3.1운동과 같은 집단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로부터 민족차별의 양상은 보다 은밀하게 행해졌다. 마치 오늘날 미국에서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적 발언이 강한 법적 제재를 받지만, 미국 사회에는 뿌리 깊은 인종 간 반목이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노골적으로 차별이 이루어졌다.


 경제 사유 중퇴는 한일 학생 모두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그 비중에서 한국인 학생이 훨씬 높았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보호자인 정正보증인의 직업과 경제력 차이, 구조적 차원에서는 농업 중심의 한국인사회와 상업, 공무자유업 중심의 재한 일본인사회의 정치경제적 격차를 반영한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경제 사유 중퇴 양상의 민족간 차이는 관행적 민족차별과는 관련성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한일 민족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의해 초래된 '결과의 차별', 즉 구조적 민족차별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48


 강상 중등학교에서 구조적 민족차별의 결과는 경제 사유 중퇴에서 잘 드러난다. 열악한 처지에서 공부해야 하는 한국학생의 중퇴율이 높다는 단순한 결과는 일본학생이 보다 높은 학구열이 있다는 것으로 왜곡하여 보다 많은 입학정원을 허용하는 법적 차별를 합리화시켰으며, 취업과정에는 관행적 민족차별과 연계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이를 통해 저자의 다른 저작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을 떠올리게 된다.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이 일제 권력, 일제 자본, 지주, 농민들의 역학관계를 분석했다면,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법적 차별, 구조적 차별, 관행적 차별이 단독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취업과정에서도 민족차별이 자행되었다. 당시 신입직원 채용의 주요 사정자료는 학교장의 소견표나 추천서였다. 그런데 선발 사정이 이들 소견표나 추천서 작성의 주요 근거자료인 학업(지력)평가와 조행평가의 결과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인 졸업생이 한국인 졸업생과 비교할 때, 학업평가 결과에서는 월등히 더 나빴음에도 두 분야의 취업률에서는 더 좋았다. 조행평가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이들 평가 이외의 다른 변수를 배제하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양상이다. 바로 그 외적인 변수란 다름 아니라 일제권력의 식민지배, 일본자본의 압도적 우세, 일본인 교장/교사의 학생 평가/추천이라는 삼중 三重의 민족적 위계구조가 구축된 식민지 현실과 연관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취업과정의 차별은 관행적 민족차별인 동시에 구조적 민족차별의 성격을 동시에 띤다고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0


  그렇다면, 저자는 왜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 것일까. 이는 정치적인 법적 차별과 경제적인 구조적 차별에 비해 차별의 의식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구조에서 차별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법적 차별과 구조적 차별을 정당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저자는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다. 그리고, 관행적 차별이 생산되는 교육기관을 분석대상으로 본문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알베르 멤미 Alvert Memmi의 차별주의론에 따르면, 식민 지배민족은 자신의 특권과 공격, 그리고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피지배민족과의 차이를 발견하고 강조한다. 만약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이를 날조하기조차 한다. 이때 강조되고 날조되는 차이의 핵심은 지배민족의 우수성, 긍정성과 대비되는 피지배민족의 열등성, 부정성이다. 민족 위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민족은 이러한 실제 또는 가공 架空의 위계적 차이에 대해 결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집단의 차이는 민족 전체의 차이로, 한 시기의 차이는 시대를 초월한 차이로, 국부적 차이는 신체, 심리, 사회, 지리, 문화, 역사 등을 포괄한 일반적 차이로까지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민족차별은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요약하며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2 


 이처럼 정연태 교수의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1920년대 한 중등학교의 기록을 바탕으로 민족차별에 대해 분석하기에 언뜻 우리의 삶과 무관해 보인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 문제와 엘리트 세습의 출발이 교육에서 시작된다는 점과 함께 우리 주변의 모든 종류의 차별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틀 - 차별의 3층 구조 - 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리뷰를 마치기 전 식민지 근대화론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 여겨지는 내용을 옮겨본다. 아래 내용은 일제 하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무조건 차별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차별받는 상황에서도 몇몇 소수는 승진하며 보다 높은 지위로 나아간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차별이 없었다, 일본을 통한 근대화의 혜택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는 논지는 당연하게도 무리한 해석일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취업과정에서 민족차별이 자행되는 가운데서도 일제 말기 강상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일부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졸업생 중 일부는 일제의 전쟁 총동원정책과 일본자본의 대륙 팽창이란 전시상황을 활용해 성장해나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직위 승진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된다. 일제 말기 한국인 졸업생의 성장도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한 상대적 성장에 불과하였고, 식민지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미약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인 졸업생의 성장이란 것도 '일본인=상급관리자, 한국인=하급 실무자'라는 식민지적 위계구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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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31 0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자신의ㅠ협력자를 찾는건 당연한 일이고 때문에 일부 식민지인들이 출세를 하거나 하는데 이를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걸까요? 이런 실증적 연구들이 한국사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해주네요.

겨울호랑이 2022-07-31 08:5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식민지 근대화론은 적은 사례로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일제 식민 시기 이전을 안정기, 이후를 급격한 분화기로 구분하고, 산업화=근대화 도식을 적용하는 식민지 근대화 이론은 학술적으로도 폐해가 심하지만, 최근 독일 소녀상 문제에서도 나타나듯 현실에 있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우사관이라 생각됩니다... 이영훈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출발이 극좌인 점을 생각해보면, 극과 극은 통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원자력발전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문제라 생각된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여부가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인정여부를 결정하는 주요 전제이니만큼 처분시설 부지 확보와 건설은 미래 에너지원으로 원자력 발전에 필수요소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고준위 처리시설을 운영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원자력에 대한 불안감을 씻어 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간신히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부지를 확보하고 2단계 건설을 하는 상황에서 수십년동안 주민들 설득에 실패하고 겨우 5년동안 이름뿐인 ‘탈원전 정책‘에 국내 원자력산업이 폭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울좋은 핑계가 아닐까.

탈원전 정책이 시행되어도 폐기물 처리는 주어진 과제임에도 주민 홍보 부족과 부지 확보 실패 책임을 지난 정부에 덮어씌운다는 이미지를 받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 탈원전 정책이 공식 폐기된 지금, 부지 확보를 위한 주민설득과 건설이 5년 내 개시되겠지. 지켜볼 일이다...






사용후핵연료가 정말로 위험하고 후손들에 항구적인 멍에가 될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용후핵연료 처분장 부지 확보에 대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관한 저의 생각은 원자력안전 전문기관의 객관적이고 철저한 심사 및 검사 하에 사용자가 시설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노화 관리 프로그램 등을 갖추면 미국의 원자력규제기관인 NRC가 발표했듯이 사용후핵연료를 포함하는 방사성 폐기물은 습식 및 건식 저장으로 안전하게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P161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의 핵심은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과 이행 절차 등을 국민적 공감 하에 여야 합의로 법제화하여 국가차원에서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법제화 대상은 사용후핵연료 저장 · 운반·처분 등에 관한 것이고요. 이와 관련하여 각 원전의 임박한 사용후핵연료 저장용량 포화에 대비하여 부지 내 임시저장시설을 적기 확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해 보입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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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정당들은 반유대주의와 달리 이슬람 혐오가 용인된다는 것을 안다(실제로 일부 정당은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 때문에 뜻밖에 손을 맞잡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 주요한 성과는 의제를 오른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반수가 아니라 ‘점잖은’ 당들을 겁줄 만큼 필요한 표만 얻으면 된다.

오늘날 서구의 외국인 혐오는 일정한 형태의 민주적 정당성에 의지한다. 주요한 변화나 새로운 현상이 모두 그러하듯, 외국인 혐오의 부상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특히 세계화와 그로 인한 대규모 탈산업화가 서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다른 나라들(가령 독일)보다 몇몇 나라(영국 등)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또한 인구 고령화에 따라 연금, 의료, 사회적 돌봄 지출이 많아지는 탓에 과세 수준이 높아지거나 긴축 정책이 시행되고, 또는 양자가 결합된다.

정치인들은 흔히 선거운동 기간에는 실질적인 제약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처지에 내몰린다.

빈곤을 줄이는 것은 개혁이 아니다. 빈곤 감소란 빈곤을 낳는 원인을 해결하지 않은 채 공공 자금을 지출하는 것(또는 고용주에게 임금 인상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신노동당이 이룬 이 업적은 나중에 원상복구되었다.

소멸한 ‘낡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는 비교적 쉽다. 사라져가는 낡은 것은 1945년 이후 30년간 서구를 지배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합의,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다.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합쳐놓은 체제를 가리키는 독일어 표현이다. 탄탄한 경제 성장과 나란히 모든 사람을 위한 복지 확대와 실패한 이들을 위한 맞춤형 보호가 이루어진 복지자본주의caring capitalism를 말한다.

부유한 서구 전체에서 복지국가가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도와줄 가치도 없는 빈민’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점차 마지못해 국가의 복지 혜택에 의지해 삶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미국(푸드뱅크가 시작된 나라), 독일,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영국 같은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구걸인과 홈리스의 수가 늘어나고 푸드뱅크 사용이 널리 확산되었다. 자유시장의 혜택에 관한 온갖 선전이 넘쳐났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시장은 사회적 보호를 제공하지 않으며, 세계화가 모든, 아니 대다수 시민을 위해 작동하는 것을 보장해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비록 그 성원들이 여전히 소득과 부와 교육 수준에서 불평등하지만, 그래도 다른 어떤 종류의 사회체제의 삶보다 선진 자본주의의 삶을 더 낫게 만들 만큼 충분히 응집력이 있는 민족공동체를 창출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처럼 거의 일반화된 통합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20년간에 이르러서야 전통적인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약화시킴으로써 전후戰後 정당체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사회의 위기가 정치의 위기로 바뀌고 있다. 병적 징후들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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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브로커들 - 일제강점기의 일본 정착민 식민주의 1876~1945 역사도서관 22
우치다 준 지음, 한승동 옮김 / 길(도서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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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나는 상인 고바야시 같은 이주 정착민들을 '제국의 브로커들'(brokers of empire)이라고 부르겠다. '브로커'라는 말은 매일의 상업적 노력에서부터 대규모 청원 운동에 이르는 정착민 활동을 이끈 이익추구형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을 가리킨다. 제국의 브로커들의 핵심적 과제는 일본인 동료들에게 자신들의 활동과 팽창하려는 제국의 고투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그런 역할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p30)... '브로커'라는 말은 또한 식민권력의 대리인(agent)이나 앞잡이(pawn) 역할도 했던 정착민들의 중재자적 지위를 포착하게 해준다. 정착민들과 국가간의 모호한 경계, 바로 이것이 제국의 브로커들에게 식민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31


 우치다 준(Jun Uchida)는 <제국의 브로커들 Brokers of Empire Japanese Settler Colonialism in Korea, 1876~1945)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정착민들에 대해 분석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가 관(官)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저자는 정착민(民)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조선총독부와 협력은 물론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자본가 계급과의 협력 또한 불사한 독립 변수(變數)였다.


 브로커들의 개인적 행동과 정착민들이 가한 집단적 충격은 대행자가 식민권력의 작동구조와 마주치게 되는 통치양식에서 선명한 것과 모호한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각각 대변한다... 정착민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부딪침의 도가니가 되고 제국의 핵이 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동역학(dynamic)이며, 조선에서의 일본 제국주의가 강력하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특성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동역학 때문이었다. _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33 


 정착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제국의 중심부에서 제국의 주변부로 자원을 끌어오려고 했고, 조선인 엘리트들 또한 제국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정착민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1919년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해가는 과정을 저자는 정착민들의 국가주의와 조선인의 민족주의의 융합으로 파악한다. 


 정착민 지도자들과 조선인 자본가 엘리트들은 똑같은 부류였다. 함께 선전활동을 벌이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일본인과 조선인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조선반도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이면 그것이 산업화의 문제든 지역자치의 문제든 종종 함께 확고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종종 근본적인 목적이 완전히 엇갈렸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형제와 같으면서도 까다로운 관계였다... 두 동맹세력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의 원천인 식민국가와의 협력관계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까지 서로간의 이권투쟁을 극대화해갈 수 있을지를 놓고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7


 일관된 원칙보다는 문화적 열망과 경제적 필요, 그리고 정치적 기회주의 등으로 뒤엉킨 복합적인 매트릭스가 각 단계의 정착민들 활동을 떠받쳐주었다. 식민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입지가 취약할 때, 제국의 브로커들은 정부의 정책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거기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의제를 추구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물질적 이해관계, 정치적 보상을 추구했던 조선인 엘리트들과도 종종 협력했다. 이런 야누스적 동맹관계 속에서 일본인 정착민들은 통치체제에 반대하기도 하고 그것을 수용하기도 하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위기의 시대에 그들은 서로 의지했지만 조선인 반체제세력에 대처하는 전략을 놓고서는 서로 충돌했다. 공유된 열망과 충돌하는 의제들이 정착민 식민주의의 내부동역학을 만들어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3


 국가주의(state nationalism)와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간의 미묘하고 함축적인 긴장, 즉 역사학자 케빈 도악(Kevin Doak)이 식민본국(일본)의 정치논쟁 속에서 확인했다고 주장한 그 긴장은 일본 국적자들이 국민으로서의 정치적/법률적 경계 안에 불완전하게 편입되어 있던 해외영토인 조선에서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202


 저자는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를 거치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격렬한 대립과 융합이 있었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 전쟁(태평양전쟁)의 총력적 체제 하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표면적으로는 사라졌으나, 사실은 허구로 판명되었음을 밝힌다. 결국, 저자는 <제국의 브로커들> 안에서 제국의 변경지역인 조선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회색지대의 두 세력 - 식민지 정착민과 조선인 엘리트 - 들의 결합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격렬한 화학적 반응과 실패한 융합으로 결론짓는다. 


 조선인들의 활동이 협력과 저항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거부한 것처럼 정착민들의 정치적 행동도 윤해동이 공적 활동과 자각의 '회색지대'라 부른 영역을 만들어내면서 언제나 타협과 무언의 대결이 벌어지는 공간인 중간지대에서 이뤄졌다. 제국의 브로커들과 그들의 조선인 동맹세력이 공동의 이익이라고 여긴 것을 증진하기 위해 함께 일한 곳은 이런 경계가 애매한 접촉지대였지만, 그들은 또한 동시에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오랜 상호투쟁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어느 정도는 쌍방 모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자들과 피식민자들 사이에 일정부분의 융합이 이루어졌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9


 최고의 역설은 내선일체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던 많은 정착민들이 전쟁 말기에 가장 무모한 내선일체의 신봉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총후활동이나 일상적인 제국의 의례행사에 조선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천황에 대한 충성의 공개적 표시로 점점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내선일체 정책의 모든 장치들이 토대로 삼고 있던 허구였다. 믿음에 눈이 멀어 그들에게 가장 가까웠던 조선인들이 '위장된 친일파, 체념한 친일파, 총구 앞의 친일파'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으며, 대다수 조선인들의 굴종이 총력전 체제 아래서 강요당한 허구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29


 <제국의 브로커들>은 일제시대의 권력 구조를 총독부라는 관(官) 뿐 아니라 정착민과 조선인 자본 엘리트 계층을 추가 변수로 투입하여 분석했다는 점에서 동역학(動力學) 구조로 식민농정을 파악한 정연태의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구조가 일제시대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사실이고, 한일 양국에서 잊혀진 존재들인 정착민들을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렸다는 점에서는 분명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이는 책의 장점이다. 그렇지만, 책에 비판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937년 이후에 조직적인 저항이 사라졌지만, 많은 정착민들 눈에 그것은 단지 종족적 민족주의 정신이 내선일체의 틀 내에서 새로운 국민자격 허용요구로 모습을 바꾼 것이었을 뿐이다. 식민지 시절 내내 조선의 민족주의는 여러 가지로 형태를 달리하면서 표출되었다. 제국의 브로커들은 온건한 민족주의자들과 뒤섞이고 자본가 엘리트들과 협력하면서, 그리고 조선 사회의 각계각층과 함께 국민자격 요구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바뀌고 대립하는 외형을 지닌 조선의 민족주의와 대면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538


 저자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근대화, 산업화 구조를 가진 제국주의 내에서 국가주의와 결합시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은 민족주의를 근대화의 산물로 바라보는 겔너(Ernest Gellner, 1925~1995)의 주장과 같은 관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점이라면, 만주와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투쟁을 벌인 이들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반(反)근대화 세력에 불과한 것일까. 민족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반응제 수준으로 한정짓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부정당하는 것이 아닐까. 본문에서는 비록 이러한 논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19세기 말 신채호(申采浩) 같은 조선인 학자들과 일본인 만선사(滿鮮史 : 만주, 조선사) 연구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만주로 간 선구자들인 1백만 조선인 동포들'이었다. 그들의 정치적 목표는 다양하게 갈렸지만. 그 두 집단의 연구자들을 모두 '만주와 조선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들은 고대 왕국이었던 고구려의 영토경계가 만주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들의 간도로의 이주는 "조상의 옛 땅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대륙을 향한 일본의 야심과 조선의 오랜 고토수복 추구가 다시 한 번 만주로 집결했다. 신채호와 같은 저자들은 민족부활의 꿈을 조선의 고대 왕국들이 지배했던 '북쪽 땅들'에 고정시켰고, 일본인 저자들은 조선인 '동포'의 활기를 자민족의 대륙확장을 촉진하는 데 활용했다. _ 우치다 준, <제국의 브로커들> , p427


 저자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의 예로 신채호 선생(申采浩, 1880~1936) 등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만주침략 시기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들고 있다. 구한말 민족의식을 깨우려는 역사연구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역사연구가 결국 같은 방향을 지향했다는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1940년대 일본의 내선일체가 허구였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인의 강제 징용을 적극적인 참여로 착각한 정착민들처럼, 저자는 구한말의 민족주의 정신을 제국주의 침략 정신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저자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다. 식민지 정착세력과 조선인 지식인들간의 결합은 각자 이익을 위해 행동한 이기주의,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 행동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제국의 브로커들>은 이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조선정착민에 대한 시선을 그려낸 얼마 안되는 책이라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제국은 조선인들에게 광범위하고 때로는 파멸적인 변화를 안겨주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특별한 이력을 쌓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주자들의 삶은 불확실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빈손으로 되돌아갔으나, 또한 수많은 이들이 성공해서 한밑천 잡았고 제국을 떠받치는 토대가 됐다... 고바야시의 이력은 정착민들이 국가에 협력도 했지만 그들 독자적인 식민지 사업들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사업들은 국가의 공식정책에 늘 부합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해외이주 정착민들은 식민통치의 모든 국면에 걸쳐 중요하고 독자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이것이 이 책에서 다룰 핵심적인 논점이다 - P26

조선의 쌀 교역이나 식민정부의 행정부처 문제, 또는 총력전 대비태세와 관련한 총독통치의 진로설정에는 본국의 수요(필요)가 영향을 끼쳤다. 마찬가지로 정착민들의 발언권이 컸던 식민지 통치체제의 수요와 방법이 거꾸로 본국에 영향을 끼쳤다. 정착민 정치와 조선인 동화에 대한 불안도 단일민족(그렇게 추정된)국가와 다민족제국 건설이라는, 일본제국의 국민 핵심부에서 동시에 추진된 사업에 내재된 긴장을 증폭했다. 혁명적인 시대의 산물이자 그 대리인들인 정착민들은 국가(state)와 사회, 중심과 주변, 민족(nation)과 제국의 점점 속에서 살아가면서 근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병진적인 전환 속을 헤쳐나갔다. - P532

제국통합시기 - 1905년의 통감부 체제부터 1910~19년의 무단통치 첫 10년까지 -를 통해 간파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은 정착민들이 조선인들과의 부딪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점차 투쟁으로 점철되어간 식민국가와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실체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치제도를 보호하려는 정착민들의 끈질긴 운동, 또 패배 이후에 장차 닥쳐올 더 많은 투쟁에 대비하려는 그들의 무대설정이다. - P201

과잉조직된 전시(戰時)운동의 기제도 내선일체의 의도된 목표들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그 의미를 파악하게 하기보다 단신히 가담하게 만드는 것이 식민지 동원운동가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였다. 달리 말하면, 동원(mobilization)은 그 자체가 이념이 되었다. 경찰의 기록과 메모들이 보여주듯이, 조선인들이 징병 등 의무수행의 대가로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경향이 증대되어간 추세가 조선 민족의 포기 또는 ‘친일‘로 자동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현상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일본인 정착민들도 조선인들의 모든 행동 뒤에는 민족적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 P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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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29 21: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인 정착민들이 조선의 상층 부르조아들과 결합해가는 방식은 흥미가 가네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로운 주제를 얻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7-29 21: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 하루 잘 마무리하세요! ^^:)
 

도덕은 독단적이고 상대적이고 문화에 구속된 것이 아니다. 도덕은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도덕 감각을 갖고 태어나며 도덕 감정들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침반이 된다. 동시에 이러한 도덕 감정들은 그 지역의 문화, 관습, 양육의 영향을 받는다. 본성은 약속과 사회적 의무를 어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지만 양육이 그 죄책감의 수위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다. 따라서 도덕은 ‘저 밖’의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재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인간 본성의 일부로 존재한다.

우리가 도덕적 진보의 증거들과 그러한 진보를 가져온 여러 원인들을 살펴보는 동안 기억해둘 것은, 우리가 밝혀낸 도덕적 진보의 원인이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진보라는 목표를 이루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원인이 왜 우리가 애당초 도덕의 영향권을 확장하고 싶어 하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과거 몇 세기의 도덕적 발전은 대부분 종교적 힘이 아니라 세속적 힘의 결과였으며,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 출현한 이 많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과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과학과 이성이라는 말을 아주 폭넓게, "일련의 논증들을 통해 추론한 다음 경험적 검증을 통해 그 결론이 참임을 확인한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나아가 나는 도덕의 궤적이 단지 정의만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를 향해 구부러지며, 이러한 긍정적인 결과들의 대부분은 더 세속적 형태의 통치와 정치, 법과 법학, 도덕적 추론과 윤리적 분석을 향해 사회가 이동한 결과였음을 증명할 것이다.

내 생각에 셔머와 나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셔머는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경험적 검증’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명시적으로 말했지만, 그가 의미하는 바의 과학과 그것의 기여는 결국 이성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반면 나는 과학, 증거, 실험, 관찰, 모델링이 앞서 논했던 도덕적 관점의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항상 의구심을 지녀왔다. 나는 그것이 과학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셔머의 말대로 각 개인이 어떻게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대한 것이지 도덕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도덕의 궤적이 직감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인도된다는 주장에는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철학자도 여기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도덕의 궤적이 모든 측면에서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가 수집한 과학적 증거에 의해 인도되어 왔고 인도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면, 나는 어떤 연구도 셔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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