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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중등학교 입학부터 취업 이후까지
정연태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1월
평점 :
일제 본국과 식민지 한국 사이에서는 법적(제도적) 차별이 주목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 한국은 일제 본국의 이법지대 異法地帶로서 법적 차별을 피할 수 없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식민지 한국인은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의무교육제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한국은 공장법/건강보험법/차가법 借家法 등 각종 사회/복지 입법, 소원법/행정재판법 등의 적용 대상 지역이 되지 못하였다. 반면 일제 본국과는 달리 식민지 한국에서는 헌병경찰(경찰)의 즉결 처분권이 폭넓게 인정되었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19
일제 하에서 민족차별은 실제하였는가? 정연태 교수의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민족차별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일본 본국과는 다른 법제도 적용에 따른 법적 차별도 중요하지만, 저자는 법적 차별과 법적 차별이 낳은 1차 결과물인 구조적 차별이 낳은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다.
식민지 민족차별이 전개되는 층위와 양상은 세 가지로 범주화될 수 있다. 법적 민족차별, 구조적 민족차별, 관행적 민족차별이 그것이다. 법적 민족차별은 명시적인 법 규범이나 제도를 통한 차별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조적 민족차별은 법적 민족차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시적인 법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와 위계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적/사실적 차별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관행적 민족차별은 법적 민족차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나 위계관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편견이나 혐오에 기초한 의식과 문화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정서적/사회적 차별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3
정연태 교수가 분석한 차별의 층위 - 법적, 구조적, 관행적- 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주장한 3층 구조 - 물질생활, 시장경제, 자본주의 - 를 연상시킨다. 층위(層位)라는 표현에서처럼 이들의 관계는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차이가 있다면, 브로델의 분석 대상인 자본주의는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반면, 정연태 교수의 차별의 층위의 분석 구조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관행적 민족차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말하지 않지만, 차별의 층위는 역(逆)피라미드 형태로 형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관행적 민족차별은 식민자의 일상적 언행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법적 영역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식민지 민족차별의 다채로운 양상과 특성을 드러내준다. 예컨대, 관행적 민족차별은 공적 활동영역에서든 사적 생활영역에서든 지배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지배민족에 대하여 일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경멸하는 시선, 무시하는 태도, 모욕적인 언행, 배제와 차별 대우, 심지어 구타와 폭력 등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렇기에 민족 간 정치경제적 불평등성, 법과 구조의 민족차별성은 물론 식민지 민족차별을 정당화하고 근저에서 지탱해주는 식민자 내면의 의식세계까지 보여준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
저자는 1920년대 충남 강경에 위치한 강상중등학교에 주목한다. 이 시기 학교 입학과 중퇴, 졸업 및 취업 현황 등의 자료를 통해 교육분야에서 일어난 여러 차별의 유형을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1919년 3.1운동 이후 노골적인 법적 차별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는 대신, 국내 정착 일본인과 한국인들의 경제적 불평등에서 오는 구조적 차별의 모습과 관행적 민족차별을 확인할 수 있다.
강상 당국은 다른 한/일 공학교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지원 규모에 맞추어 민족별 입학정원을 할당해, 신입생 선발과정에서 노골적인 민족차별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민족 간 합격률의 현저한 격차는 경제력 차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인 것처럼 호도해, 신입생 선발과정상의 민족차별을 은폐, 부정하고자 하였다. 이런 논리로 민족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나 다른 한/일 공학 당국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양태였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49
법적인 차별이 3.1운동과 같은 집단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로부터 민족차별의 양상은 보다 은밀하게 행해졌다. 마치 오늘날 미국에서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적 발언이 강한 법적 제재를 받지만, 미국 사회에는 뿌리 깊은 인종 간 반목이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노골적으로 차별이 이루어졌다.
경제 사유 중퇴는 한일 학생 모두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그 비중에서 한국인 학생이 훨씬 높았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보호자인 정正보증인의 직업과 경제력 차이, 구조적 차원에서는 농업 중심의 한국인사회와 상업, 공무자유업 중심의 재한 일본인사회의 정치경제적 격차를 반영한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경제 사유 중퇴 양상의 민족간 차이는 관행적 민족차별과는 관련성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한일 민족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의해 초래된 '결과의 차별', 즉 구조적 민족차별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48
강상 중등학교에서 구조적 민족차별의 결과는 경제 사유 중퇴에서 잘 드러난다. 열악한 처지에서 공부해야 하는 한국학생의 중퇴율이 높다는 단순한 결과는 일본학생이 보다 높은 학구열이 있다는 것으로 왜곡하여 보다 많은 입학정원을 허용하는 법적 차별를 합리화시켰으며, 취업과정에는 관행적 민족차별과 연계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이를 통해 저자의 다른 저작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을 떠올리게 된다.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이 일제 권력, 일제 자본, 지주, 농민들의 역학관계를 분석했다면,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법적 차별, 구조적 차별, 관행적 차별이 단독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취업과정에서도 민족차별이 자행되었다. 당시 신입직원 채용의 주요 사정자료는 학교장의 소견표나 추천서였다. 그런데 선발 사정이 이들 소견표나 추천서 작성의 주요 근거자료인 학업(지력)평가와 조행평가의 결과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인 졸업생이 한국인 졸업생과 비교할 때, 학업평가 결과에서는 월등히 더 나빴음에도 두 분야의 취업률에서는 더 좋았다. 조행평가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이들 평가 이외의 다른 변수를 배제하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양상이다. 바로 그 외적인 변수란 다름 아니라 일제권력의 식민지배, 일본자본의 압도적 우세, 일본인 교장/교사의 학생 평가/추천이라는 삼중 三重의 민족적 위계구조가 구축된 식민지 현실과 연관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취업과정의 차별은 관행적 민족차별인 동시에 구조적 민족차별의 성격을 동시에 띤다고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0
그렇다면, 저자는 왜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 것일까. 이는 정치적인 법적 차별과 경제적인 구조적 차별에 비해 차별의 의식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구조에서 차별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법적 차별과 구조적 차별을 정당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저자는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다. 그리고, 관행적 차별이 생산되는 교육기관을 분석대상으로 본문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알베르 멤미 Alvert Memmi의 차별주의론에 따르면, 식민 지배민족은 자신의 특권과 공격, 그리고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피지배민족과의 차이를 발견하고 강조한다. 만약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이를 날조하기조차 한다. 이때 강조되고 날조되는 차이의 핵심은 지배민족의 우수성, 긍정성과 대비되는 피지배민족의 열등성, 부정성이다. 민족 위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민족은 이러한 실제 또는 가공 架空의 위계적 차이에 대해 결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집단의 차이는 민족 전체의 차이로, 한 시기의 차이는 시대를 초월한 차이로, 국부적 차이는 신체, 심리, 사회, 지리, 문화, 역사 등을 포괄한 일반적 차이로까지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민족차별은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요약하며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2
이처럼 정연태 교수의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1920년대 한 중등학교의 기록을 바탕으로 민족차별에 대해 분석하기에 언뜻 우리의 삶과 무관해 보인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 문제와 엘리트 세습의 출발이 교육에서 시작된다는 점과 함께 우리 주변의 모든 종류의 차별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틀 - 차별의 3층 구조 - 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리뷰를 마치기 전 식민지 근대화론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 여겨지는 내용을 옮겨본다. 아래 내용은 일제 하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무조건 차별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차별받는 상황에서도 몇몇 소수는 승진하며 보다 높은 지위로 나아간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차별이 없었다, 일본을 통한 근대화의 혜택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는 논지는 당연하게도 무리한 해석일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취업과정에서 민족차별이 자행되는 가운데서도 일제 말기 강상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일부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졸업생 중 일부는 일제의 전쟁 총동원정책과 일본자본의 대륙 팽창이란 전시상황을 활용해 성장해나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직위 승진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된다. 일제 말기 한국인 졸업생의 성장도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한 상대적 성장에 불과하였고, 식민지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미약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인 졸업생의 성장이란 것도 '일본인=상급관리자, 한국인=하급 실무자'라는 식민지적 위계구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