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판문점 체제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추구한  자유주의적 평화 기획이 귀결된 궁극적인 제도적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판문점 체제는 중국의  개입 이후 부과된 정치적 압력하에서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정치적 해결을 유예시킨 군사 정전  체제였다. 그리고 판문점 체제는 미국과 이승만의  협상의 산물로서, 한미  군사동맹  체제  아래에서  경제발전의 모델을 전시하려는 아이젠하워 근대화 정책의 대표 사례였다. 좀 더 일반화 하자면,  판문점 체제는 칸트식 초국적 법치가 지향했던  보편적 영구 평화나 보편적 정의와는 거리가 먼,  특수한 상황에서의 안보, 특수한 동맹  체제하에서의 경제 발전이라는 매우 분명한 홉스적 기획의 산물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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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백성들이 원망하는 사람은 하늘이 제거할것이고, 백성들이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이 줄 것이오. 대사(大事)를 일으키면서 반드시 아래로는백성들의 마음을 따르고, 위로는 하늘의 뜻에 합치되어야 공로는 마침내 이루어질 수 있으며, 만약 강한 것을 짊어지고 용감한 것을 믿고, 마음 가는 대로 방자하다면 비록 천하를 얻더라도 반드시 다시 잃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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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동맹은 1800년경부터는 국가 이전, 국내외, 국가 간, 초국가 그리고 중요한 특수 경우에는 연방국가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프랑스혁명 전후로 결정적인 개념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말안장 시기 Sattelzeits‘ 를 가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련의 비국가적 특성들이 지표가 된다. ‘동맹Bund‘은 점점 더 ‘국가 Staat‘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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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친족법‘과 ‘국가법‘의 대항으로 본 헤겔, ‘남성의 법‘과 ‘여성의 법‘ 다툼으로 본 이리가레이, ‘죽음을 향한 숭고함, 아름다움‘으로 본 라캉의 해석과는 또 다른 버틀러의 해석.

버틀러는 ‘안티고네‘라는 인간 자체에의 균열을 통해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마치 「판관기」속의 삼손이 데릴라에 의해 블레셋인들에게 잡힌 후 죽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건물을 무너뜨리듯,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우리는 기존 양성적 질서를 넘어선 ‘버틀러의 주장‘을 발견한다. 이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근친상간의 금기가 자기 내부에 스스로의 균열을 안고 있는 만큼, 그것은 근친상간을 단순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근친상간을 사회적 해체에 꼭 필요한 어떤 유령으로서 유지하고 또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령 없이는 사회적 관계가 나타날 수도 없는 그런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안티고네》라는 드라마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금기 그 자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즉 금기를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무엇인가를 빼앗는 권력 작용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금지하고 있는 그 죄 자체를 자리바꿈(displacement) 함으로써 자신을 증식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다. 근친상간의 금기와 그에 대한 무서운 비유는 근친상간이야말로 친족에 가장 중추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감추는 친족계보를 그려낸다. 그러면서 규범의 한가운데에 ‘일탈(aberration)‘을세워두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근친상간의 금기가 사회적으로 존속 가능한 친족 일탈의 토대가 될 수도 있는가 하는 점이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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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0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틀러를 삼손에 비유하신 저 표현 너무 멋져요!! 다른 내용은 알듯 말듯 어렵네요.😳

겨울호랑이 2021-05-02 14: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본문에서는 자세하게 논의가 전개되는데, 제가 핵심만 적어서 그런 것 같네요. 리뷰에서는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1-05-02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티고네는 그리스신화에서 드물게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판단기준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던데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있는걸까요? 가끔 저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에서 너무 너무 어려운 이론들을 뽑아내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네요. ^^;;

겨울호랑이 2021-05-02 17:01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안티고네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단순히 ‘휘브리스‘로 해석하기엔 여운이 많이 남는다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로부터 근대 이후의 과제들의 근원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온 것같네요^^:)
 

 

 왕망은 또 고구려(高句驪) 병사를 발동하여 흉노를 공격하려는데, 고구려에서 가려고 하지 아니 하니 군(郡, 요서군)에서 억지로 압박하자 모두 도망하여 요새를 나가고 이어서 법을 범하면서 침구(侵寇)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인 전담(田譚)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그 허물을 고구려후(高句驪候) 추(騶)에게 돌렸는데, 엄무(嚴尤)가 상주하였다. "맥인(貊人)이 범법하는 것은 추(騶)를 좇은 것이 아니어서 바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마땅히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또 그들을 안위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큰 죄가 두텁게 덮어씌운다면 아마 그들은 끝내 배반할까 걱정이고, 부여(夫餘)족속들에게는 반드시 화합함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입니다." 왕망이 안위하지 아니하자 예맥(濊貊)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엄우(嚴尤)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고, 오자 머리를 베어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驪)라고 이름을 고쳤다._사마광, <자치통감 37> 中


 아침마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 資治通鑑>를 읽는다. 전국시대로부터 오대십국 시대를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 겨우 왕망(王莽, BC45~AD23)의 신(新)나라 부분을 읽고 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는 전체 294권 중에서 37권에 해당한다.)  중국의 역사를 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주변국과의 관계도 역사의 일부분이기에 우리나라 역사도 다루어진다. 그리고, 당연히 그 부분을 더 주의 깊게 읽게 된다. 마침 오늘은 왕망이 부하장수를 시켜 흉노(匈奴) 원정을 거부하는 고구려를 침략하는 부분이 서술된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왕이 죽음을 당했다는 부분에 눈이 멎는다. 고구려왕 중 외적에게 죽임을 당한 왕이 고국원왕 외에 또 있었을까. 동천왕 시기 아버지 미천왕의 시체가 중국쪽으로 끌려갔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그런 기억은 언뜻 나지 않아 같은 시기를 다룬 <삼국사기>도 함께 펼쳐본다. 기록에<자치통감>에서 죽임을 당한 고구려 왕은 추(騶)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발음에 따라 '추모(鄒牟)'로 불리는 1대 동명성왕(東明聖王, BC 58~BC 19)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삼국사기 三國史記>를 따라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BC38~AD18)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여겨진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죽음을 당한 인물의 기록이 충돌한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리왕 31년(서기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莾)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무(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로하여 안심시켜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夫餘)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驪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37년(서기18) 겨울 10월에 왕이 두곡의 별궁에서 죽었다. 왕을 두곡의 동쪽 들판에서 장사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_김부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p323


  전반적인 상황은 비슷하지만, <자치통감>에서 고구려에서 죽임을 당한 이는 왕으로 , <삼국사기>에서는 부하장수로 기록되어 있어 이들의 기록이 서로 충돌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기록을 참고해야 하겠지만, 우리 고대사의 경우 많은 기록이 중국 쪽 자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중국쪽의 기록이 정설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기록의 양이 워낙 차이가 나니 이러한 현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 기록의 객관성이다.  중국의 기록들이 모두 객관적으로 남아있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만, 중국의 기록 역시 공자(孔子, BC551~BC479)의 <춘추 春秋>이래 중국/유교 중심의 포폄(褒貶)사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자료의 많은 부분을 중국의 <자치통감>에 의존한 <삼국사기>에서도 이 부분의 기록은 다르게 나타난 것을 보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라 여겨진다.


 두 개의 내용을 보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몇 군데 글자를 바꾸거나 추가했을 뿐이다.... 이것들을 검토하여 보건대 의도적으로 고쳤다고 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필사과정에서 당시에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로 적은 것이거나,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자치통감>과 <삼국사기>가 그 이후 내려오면서 착간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부분도 <신,구당서>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필법(筆法)에 대한 철저한 고려를 하지 않은 것 같고, <자치통감>에서 필법이 엄정하여 글자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신주하게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따라서 김수식은 <자치통감>을 자료로 본 것이고, 필법은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만큼 역사학 이론에서 아직은 <자치통감>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_권중달, <자치통감전> 中


 한 예(例)지만, 우리나라 고대사의 경전인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와 다른 중국 사서들 간의 서로 충돌하는 파편의 기억들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를 넘어서 지역적으로 떨어진 ,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시간의 흐름을 오늘날 세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 관점이라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을 안고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역사>을 시작한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역사'는 이미 경험된 것과 아직도 경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는 개념 ein regulativer Begriff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단순항 이야기나 역사학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다.(p12)...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Geschichte an und fur sich' 개념 속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의미의 결이 유입되었다. 근대적 역사 개념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전의 의미 영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서 결합하였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p13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면서 ‘역사‘는 이미 경험된 것과 아직도 경험되고 있는 모든 것을 규율하는 개념 ein regulativer Begriff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 개념은 단순항 이야기나 역사학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다.(p12)... ‘즉자와 대자로서의 역사 Geschichte an und fur sich‘ 개념 속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의미의 결이 유입되었다. 근대적 역사 개념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지 않고, 예전의 의미 영역들 가운데 많은 부분을 자기 안에서 결합하였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6 : 역사>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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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1-06-10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있는 사기에 불신만 가졌었는데, 당대의 중국 역사관을 함께 보는 것도 방법이 되겠네요. 양적으로 방대하나... 객관성이 문제. 그 역시 공감합니다.
짧게 짧게 올려주신 덕에 재밌게 읽고 갑니다:-)

겨울호랑이 2021-06-11 07:03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역사‘는 과거의 사건 중에서 일부에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학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객관적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면에서 역사가의 방대한 해석보다는 짧은 사실의 나열이 후대 역사가들에게는 오히려 도움되는 면이 있을 듯 합니다. 갱지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