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親日)을 더 해야겠다, 친일을. 그 말은 확실히 혜관을 감동시킨 것이다. 용정촌에 군자금을 보낸 행적을 은폐하기 위해 위장을 한다는 뜻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말은 서희의 괴로움, 서희의 갈등, 서희의 냉정, 서희의 총명을 웅변해주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9> , p296/580


 <토지 9>에서는 진주로 돌아온 서희의 복수가 성공을 거두고, 조준구는 오천 원의 돈을 받아들고 평사리의 집을 넘기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로써 어린 시절 평사리에서 쫓겨나 간도로 내몰렸던 서희는 오랜 기간 기다렸던 가문의 복수를 해치웠다. 그러나, 조준구는 너무 무력하게 무너졌기에 서희는 시원함보다 오히려 허무함을 안고 만다. 간도에서 살 적부터 오랜 기간 공양과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던 서희. 복수의 끝에 조준구에게 오천 원을 주고 평사리 집과 허무함을 받은 서희는 이제 그 칼 끝을 조준구가 아닌 자신과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길상에게돌린다. 


 '구경(究竟)열반한들 그것이 무엇이랴. 석가여래께서 입멸(入滅)하셨을 적에 많은 성문(聲聞)들은 어찌하여 울었더란 말이냐. 죽음이기 때문일 것이며, 다시 만나볼 수 없다는 슬픔 때문일 것이며....형체가 있고서야 마음을 보지 아니하겠는가. 마음 없는 형체는 물건이요, 형체 없는 마음은 실재가 아니지 아니한가. 목숨이 오고 가고, 오고 갔을 뿐인데 육도윤회라 하는가. 윤회는 무엇이냐. 내가 모르는 윤회는 없는 것이며 내 목숨 간 곳을 모른다면 그것은 내 목숨이 아니지 아니한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아아-어느 곳에도 실성(實性)은 없느니. 사멸전변(死滅轉變), 내가 없도다!' 불교적 비애, 근원적인 허무의 강을 서희의 생각은 떠내려간다. 가다가, 가다가 자맥질을 한다. '어째서 오천 원을 던져주었을까?' (p336)...  용정촌을 떠나올 때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길상의 얼굴이 눈앞을 지나간다. 조준구와의 어이없는 끝장의 원인이 거기 있는 것을 서희는 깨닫는다. _ 박경리, <토지 9> , p338/580


 다만, 조준구에게 대한 복수가 차가운 냉정함으로 이루어진 복수라면, 길상에 대한 복수는 자신과 아이들을 저버린 것에 대한 뜨거운 감정으로 행해질 복수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을 버린 남편 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군자금 원조라면, 이를 감추기 위한 친일은 복수다. 이러한 서희의 선택이 길상이 아닌 제3자인 혜관 스님에게는 냉정함과 총명함으로 보였겠지만, 분명 그 날카로움은 길상의 가슴 깊이 꽂혔으리라.


 '나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아니야. 친일파 최서희, 내게는 아직 친일파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 자식의 아비요, 내 남편이다.'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돈다. 이성으로는 달래볼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십 년 전에 이동진이 군자금을 요청했을 때 거절한 일이 생각난다. 기본적으로 그때 생각과 오늘의 생각엔 별 변화가 없다. 다만 다르다면 그땐 냉정했었고 지금은 감정이 앞서는 차이점이다. 그리고 또 그때 이성은 편협했지만 지금의 감정은 포용의 폭이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서희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_ 박경리, <토지 9> , p282/580


 이러한 서희의 선택을 보면서, 그가 떠내려 간 비애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조준구에 대한 복수의 끝에 얻어진 허무의 강으로 들어갔을 때,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인과율(因果律)을 깨닫아 열반(涅槃 nirvana)의 길로 가라는 부처의 말씀을 따르는 대신 길상에 대한 복수를 택한 서희. 그의 선택에 종교적 옳음, 그름을 말하기 전에 그 선택이 양날의 검이 되어 서희에게 가져올 괴로움을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나 친척들 사이에는 마땅히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 얼굴이나 말소리는 화평하고 부드럽게 서로 가져라. 만일 마음속에 남을 미워하는 생각을 두면, 금생에서는 비록 작은 다툼을 할 뿐이라 하더라도, 오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큰 원수가 되는 것이다.(p711)...  믿을 수 없는 세상만사를 다 버리고, 몸이 젋었을 때에 부지런히 불법을 듣고 행하여, 죽고 나는 일이 없는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_ 대한불교청년회, <우리말 팔만대장경> <방등경 법문>, p712


 이 세상은 모두 혼란하고 아득하여, 올바른 도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고, 어느 한 사람 믿을 이가 없으므로, 가난한 이와 넉넉한 이와, 귀한 이와 천한 이 할 것 없이, 쓸데없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가슴속에는 무서운 생각만 가득하여, 천지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만 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것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죄의 항아리가 가득차게 되면, 인과의 법칙은 어길 수 없으므로, 이 세상에서 목숨을 마치자 곧 지옥이나 아귀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_ 대한불교청년회, <우리말 팔만대장경> <방등경 법문>, p713


  <토지 9>에는 서희 말고도 허무의 강에서 좌절하고 있는 또 다른 중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이상현(李相鉉)이다. <토지 인물 사전>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상현... 주권을 잃은 나라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한 무력한 지식인에 불과함을 깨닫는 한편, 덕망 있는 혁명가인 아버지 이동진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본유학을 떠난다. 서울로 돌아와 3.1운동을 맞지만 지식인으로서의 무력함에 방황하며 서의돈, 임명빈, 유읜성, 선우 일, 선우 신 등 '용렬하고 옹졸한 도령'인 지식인들과 교류한다.. _ 이상진, <토지 인물 사전> , p150/214


 서희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다가온 복수의 성공에 허무감을 느꼈다면, 이상현은 3.1운동의 환희에서 빠르게 흥분하고 더 빠르게 식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면서 허무함에 빠져든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잦아드는 불씨처럼 되어가고 대신 해외로 번져서 한때 저조했던 항일투쟁에 기름을 부었다는 자위도 있었으나 상현은 해외에서 움직이는 뭇 단체나, 기라성같이 많은 독립투사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서 상현이 실의의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은 3.1 운동이 성과 없이 끝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다소 심리적인 영향이야 끼쳤을 테지만 상현은 자기 자신, 이상현이란 한 인간에 절망했다는 것이 옳을 성싶다. _ 박경리, <토지 9>, p35/694


 상현은 자신의 인간됨이 선이 가는 것을 안다. 동시에 맹목적 무조건일 수 없는 자신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꽃같이 떨어져라! 꽃같이 떨어질 충격이 있어야 한다. 서의돈과 함께 군중 속에서 울었다. 밟혀 죽어도 여한이 없겠노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체처럼 열정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조선도 고아임을 확인할밖에 없고 상현은 자신도 끈 떨어진 연일 수밖에 없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 비애가 단순할 수 없는 것이다. 비겁한 놈! 유약한 놈! 비애는 다시 멍이 든다. _ 박경리, <토지 9> , p45/694


 3.1 운동 이후 절망하는 이상현의 모습은 당대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 ~ 1924)과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 1870 ~ 1924)입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진 '민족자결주의'란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는 다른 어느 계층보다 지식인들을 흥분시켰지만, 이들이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이라는 현실 속에서 약소국 '대한제국'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더 빨랐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지식인들은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3.1운동 100년 2>속 청년 혁명가 양주흡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상현의 고뇌를 발견한다. 이러한 고뇌는 어디로 향하는가.


 시기는 도래하였으나 어느 곳도 착수할 곳이 없다. 이를 어찌하여야 하는가. 중화민국으로 가려고 여비를 수차례 청구하였으나 회답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


 '혁명'을 스스로 성취하겠다는 이상은 있었지만, 내부 운동에 접속하지 못한 한계와 임시정부 수립이나 파리강화회의 같은 외부에서 전해지는 높은 성취들 앞에서 양주흡은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조급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 조급함을 해소할 현실적 요건을 갖추기는 어려웠다. 양주흡은 독립에 대한 열망과는 별개로 자신이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양주흡을 비롯해 모두가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거대한 운동 속에서 어느 개인이 뚜렷한 전망과 정확한 대안을 지녔겠는가. _ 최우석, <3.1운동 100년 2> <청년 양주흡, 혁명을 꿈꾸다>p188/322


 서희의 허무함이 같은 '복수'로 채워지듯, 지식인들의 허무는 자신들의 무력함과 함께 자신이 원래 가졌던 생각을 강화하는 쪽으로 채워진다. <2.8독립선언의 전략성과 영향> 속에서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2.8 독립선언이 독립에 대해 부정적인 '이 달'과 같은 인물을 잠시나마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는 내용이 다루어진다. 그렇지만, 이 달과 같은 인물들의 독립투사의 면모는 곧 사라지게 되었고, 이는 1919년 민족대표 33인 다수가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과도 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그들은 일본제국 내에서 자치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쪽으로 의식 전환을 해 나간다.


 재일 조선인 유학생의 민족운동은 도쿄에 체재하는 일본인을 비록한 동아시아 지식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또한 <저팬 애드버타이저>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내에 비해 국제 정세에 관한 지식도 입수하기 쉬웠다.. <2.8 독립선언서>가 윌슨의 사상을 분석해 작성되었다는 것은, 국제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던 조선인 유학생의 민족운동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_ 오노 야스테루, <3.1운동 100년 2> <2.8독립선언의 전략성과 영향>, p70/322


 1917년 동양청년동지회 결성 당시 이달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인의 지위 향상을 목표로 했고, 스스로 "일선동화(日鮮同化)"를 제창했다. 그 때문에 조선인 유학생으로부터 "반감을 사"왔다.(p67/322)... 이달이 생각하는 '동양의 평화'는 동양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반(半) 식민지 지배에서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달은 동양청년동지회의 기관지 <혁신시보>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언론의 자유를 비록한 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을 없애기 위한 "일선동화의 방법"을 고려해달라는 주장을 했다. 즉, 이달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인의 지위 향상을 목표로 삼을 뿐, 신아동맹당 같이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상정하지는 않았다._ 오노 야스테루, <3.1운동 100년 2> <2.8독립선언의 전략성과 영향>, p51/322


 그 결과 1930년대 중일전쟁(中日戰爭)과 1940년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통해 일제가 우리에게 강요한 '내선일체(內鮮一體)'사상을 전파하는 것에 당대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후대에 '친일청산'이라는 과제를 던져주게 된다. 다만, 같은 '친일' 이지만, 그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토지>에서도  서희에게 '친일'이 길상에 대한 사랑의 포장이자 복수라는 일시적인 감정의 결과였다면, 이상현으로 표현되는 지식인들의 친일 행적(이상현이 친일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은 절망으로부터 온 신념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의 친일이 '감정의 친일', 후자의 친일을 '이성의 친일'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허무함'이 자리한다.


  최서희와 이상현. 상현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이들 의남매는 같은 시기 다른 이유로 허무에 빠지게 된다. 서희는 허무한 복수의 결말로, 상현은 너무도 빨리 식은 3.1운동의 열망과 결론으로. 그 결과 서희와 상현으로 표현되는 지식인들 다수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친일이라는 불행함으로 가는 여러 길에 공통적으로 '허무함'이 있었음을 이번 주 <토지 9>독서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내선일체(內鮮一體)란 중일전쟁기에서 태평양전쟁기에 걸쳐 조선총독부가 황민화정책과 함께 추진한 전시동원정책의 일환이며, 조선 민족 및 조선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 일본 민족으로 <황민화=동화>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중일전쟁기 내선일체론은 조선 자치론이라는 적극적 입장에서 조선 문화 보존이라는 소극적 입장까지 다양한 차이를 내포하면서도 공통적으로 조선적인 것의 고수를 내세우는 '협화적 내선일체론'과, 조선 민족의 완전한 해체, 즉 전면적인 일본과의 동화를 통해 '신일본민족'을 형성하고자 하는 '철저일체'론, 이 두 가지 내선일체론 사이의 논쟁을 기초로 논의되었다. _ 식민지/근대 초극 연구회, <식민지 지식인의 근대 초극론>, p157


 ps. 최서희의 친일과 일제 하 지식인들의 친일을 구별하면서,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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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곡률금은 기쁘게 생각하지 않고 일찍이 곡률광에게 말하였다. "내가 비록 책은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듣건대 옛날부터 외척 가운데 그의 집안을 보존할 수 있었던 사람은 드물다. 딸이 만약 총애를 입었다면 여러 귀한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게 될 것이며, 만약 총애를 입지 못한다면 천자에게 증오를 받게 될 것이다. "

조정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한 명의 범증(范增)이 있어도 기용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상황이 또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네가 스스로를 범증에 비긴다면 나를 항우로 여기는 것이냐?" 조정이 말하였다.
"항우는 포의의 신분으로 까마귀 떼 같은 무리를 인솔하고 5년이 되어서 패업(?業)을 이루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부형(父兄)의 밑천을 의지하여서 겨우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항우를 경시(輕視)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한 선비가 있었는데, 화사개의 질병을 물더니 마침 의사가 말하였다. "왕의 상한(傷寒)은 극도로 위중하므로 마땅히 황룡탕(黃龍湯)을 복용하여야 합니다." 화사개가 어려운 기색을 띄었다.
한 인사(人士)가 말하였다. "이 물건은 복용하기가 쉬우니 왕께서는 모름지기 의심하지 마시고, 청컨대 왕을 위하여 먼저 그것을 맛보겠습니다." 한 번 들고서 모두 마셔버렸다. 화사개는 그의 뜻에 감복하여 그것 때문에 억지로 복용하고 드디어 나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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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은 사물이 '시간 변수'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말해주는 공식들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설명합니다. 한편 우리는 사물이 '위치 변수'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혹은 '버터 양의 변수'에 따라 리소토의 맛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말해주는 공식을 쓸 수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한편, 버터의 양이나 공간의 위치는 '흐르지 않습니다.' _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 p124/160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 ~ )의 <모든 순간의 물리학 Sette brevi lezioni di fisica>는 물리학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독자들에게 물리학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시간(time)과 공간(space)을 둘러싼 이론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제기하는 '루프양자중력이론oop Quantum Gravity, LQG)'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글의 내용은 매우 매끄러워서 거의 마찰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그는 매끄럽게 글을 써서 독자들이 거의 열받지 않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들면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한다. 

 

 마찰은 열을 생산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열이 있을 때만 발생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현상은 열이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합니다. _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 p116/160


 블랙홀의 열은 세 가지 언어(양자, 중력, 열역학)으로 쓰인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입니다. 이 비석은 현재 누군가가 자신의 암호를 풀어 정말 시간의 흐름이 무엇인지 말해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_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 p130/160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루프양자중력이론가다.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해 통합이론을 제시하는 물리학자로서 자신의 이론을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소개한다. 그의 통합의 범위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으로 나아간다.


 루프양자중력이론의 개념은 간단합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공간이 생기 없는 딱딱한 상자가 아니라 무언가 역동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존재하는 이 공간이 유동성 있는 거대한 연체동물과 같아서 압출이 될 수도, 비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양자역학은 모든 종류의 장이 '양자로 이루어지고' 미세한 과립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물리적 공간 역시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_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 p99/160


 루프양자중력이론의 핵심은 공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무한하게 나누어지지도 않지만 알갱이로, 즉 '공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원자들의 크기는 원자핵 중에서 가장 작은 원자핵보다 수십, 수천억 배나 작은 아주 미세한 크기입니다. 루프양자중력이론은 수학적 형식으로 이러한 '공간 원자'와 원자들의 진화를 정의하는 방정식을 설명합니다. _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 p100/160

 루프양자중력이론에서 공간이 연속적이지 않고 무한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알갱이 이듯, 우리 인간들 한 명 한 명이 미세한 '공간'이라고 했을 때, 흐르듯 흐르지 않는 시간은 '자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시간-공간'이 하나이듯, '인간-자연'도 하나라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말하는 저자는 후속작에서 '흐르지 않는 시간'에 대해 말한다.


 우리를 만들고 이글어온 이 자연 속에 있는 동안, 우리가 자연과 문명, 이 두 세상에 양다리를 걸쳐놓고도 또 다른 무엇인가를 얻으려 자연에서 멀어진대도 자연은 웅리를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줄 겁니다.  _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 p152/160


 시공간이 하나라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of Ephesus, BC535 ~ BC475)의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잘 들어맞아 보이는 '시간'과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9 ~ BC55)의 '클리나멘 Clinamen'의 '공간'이 같다는 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보다 어쩌면 더 실감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가,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모두 '세상'이라는 '전체'에 대한 '부분'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다른 사물들과 똑같이 별 가루로 만들어졌고, 고통 속에 있을 때나 웃을 때나 환희에 차 있을 때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_ 카를로 로벨리, <모든 순간의 물리학> , p152/160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물리학을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 ~ 1996)은 물리학 시간에 진도를 멈추고 학생들의 관심거리를 들어주는 선생님이라면, 최무영 교수는 진도를 빼면서도 학생들과 교감하는 스타일이라 느껴진다. 이 둘의 사이 어딘가에 카를로 로벨리가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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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1-11-04 2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는 이 책 몇 번을 시도했는지 모를 정도로 지루하더라고요. 대충 아는 이론이라 금방 넘어갈 줄 알았는데 … 다시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이상하게 저는 최근의 유럽 과학이론가들하고는 안 맞나,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시간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알고 싶어서 로벨리책도 도전한 거 였는데 생각만큼 풀리지 않네요!!!!

겨울호랑이 2021-11-04 23:28   좋아요 1 | URL
로벨리의 책이 갖는 장점이 물리학 책임에도 수식 하나 없이 물리학의 핵심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점이라 생각됩니다. 반면, 그 점으로 인해 대중에게 폭넓은 이해를 전해주지만, 기억의집님과 같이 깊이있는 분들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지 않나 여겨 집니다. 로벨리 책을 비롯한 여러 저자의 책을 접하시다보면 어느새 원하시는 바를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레이스 2021-11-04 2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벨리 좋아해요!

겨울호랑이 2021-11-05 07:30   좋아요 3 | URL
로벨리는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과학자임을 그레이스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바람돌이 2021-11-05 0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칼 세이건과 최무영, 카를로 로벨리에 대한 정의가 인상적이네요. 물론 저는 저 책들 중 한권도 읽지 않았다는게 부끄러움이고 슬픔이지만 말입니다. ㅠ.ㅠ 겨울호랑이님 날이 추워져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시는건가요? 그래도 감기조심하시고 좋은 글도 계속 써주세요. ^^

겨울호랑이 2021-11-05 07:29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께서 마음내키실 때 읽는 책이 최고의 책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정신없이 바빴는데, 요즘 일들이 마무리되면서 정리할 시간도 함께 생기네요. 바람돌이님께서도 건강에 유의하시고,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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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신하로서 주군을 섬기면서 마땅히 장차 그 좋은 점을 받들어 따르고 그의 나쁜 점을 바로잡아 구제하여야 합니다. 공환은 진(陳)에 있으면서 심복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사직의 큰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진실로 세조[진천]의 말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였다면 마땅히 두영(竇?)처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변론하거나 원앙(袁?)처럼 조정에서 싸워서 미세한 것을 방비하고 점차 커지는 것을 막아서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끊었어야 하였습니다.

"음식을 물리치고 무기를 물리쳐도 신의는 물리쳐서는 안 되는데,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를 지키고 저버리지 마십시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내리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리면 선행을 하는 사람은 나날이 늘어날 것이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들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몸을 세우는 기초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세 번 생각하고 말씀하시고 아홉 번 고려하고서 행동하시어 과오가 생기지 말도록 하십시오. 천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를 신중히 하십시오." 황제가 두 번 절하고서 말을 받으니, 우근은 답례로 절하였다. 의례가 끝나자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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