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시켜서 정탐을 해보니 그러한 것이 모두 없었으니, 나는 이로써 멀리까지 말을 몰아 깊숙이 들어가면 큰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소. 군사들이 이미 서로 접전하게 되면 우리의 기세는 바야흐로 예리하였으며 저들의 기세는 바야흐로 꺾여 있어서 만약 이 기회를 타고 신속히 그들을 치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디게 한다면 이기고 지는 것은 알 수 없었소. 이는 내가 빠르게 싸워서 승리한 까닭이며 피로해있고 편안하게 있는 것으로 대처하는 보통의 이론을 가지고 하였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오."

석경당이 심히 탄복하였다.

유(幽, 북경시)·계(?, 천진시 계현)·영(瀛, 하북성 하간시)·막(莫, 하북성 임구시 북쪽 막주진)·탁(?, 하북성 탁주시)·단(檀, 북경시 밀운현)·순(順, 북경시 순의현)·신(新, 하북성 탁록현)·규(?, 하북성 회래현)·유(儒, 북경시 연경현)·무(武, 하북성 선화현)·운(雲, 산서성 대동시)·응(應, 산서성 응현)·환(?, 산서성 삭주시)·삭(朔, 산서성 삭주시)·울(蔚, 하북성 울현) 16주(州)를 잘라서 거란에 주고 이어서 매년 비단 30만 필을 보내주기로 허락하였다.

황제는 거란과 더불어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그들이 다시 영무(靈武, 영하성 영무현)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계사일(9일)에 다시 장희숭을 삭방절도사로 삼았다.

송제구(宋齊丘)가 이덕성(李德誠)의 아들인 이건훈(李建勳)에게 말하였다. "존공(尊公)은 태조의 원훈(元勳)인데 오늘 땅을 쓰는군요."

이에 오의 궁중(宮中)에서 괴이한 일이 많이 일어나자, 오주가 말하였다. "오의 운명이 그 끝에 왔구나!"

좌우에서 말하였다. "이는 마침내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고려의 왕건(王建)이 군사를 부려서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쳐서 깨뜨리니,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하게 되어 2경(京), 6부(府), 9절도(節度), 120군(郡)이 있었다.

무릇 제왕(帝王)이 천하를 통어하는 데는 믿음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영공(令公, 석경당)에게 큰 믿음을 잃었으며 가까이하거나 귀한 사람들도 또 스스로 보전할 수 없는데 하물며 소외되고 비천한 사람이겠습니까? 그가 멸망하는 것은 발돋움하고 서서 기다릴 정도이니, 어찌 강함이 있겠습니까?" 석경당이 기뻐하며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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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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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나의 얼굴은 점점 내 방에 걸린 아버지의 영정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은 당신과 나 사이에 놓여 있던 세월의 간격은 물론 불편했던 여러 과정들을 일시에 제거하면서 나를 바로 아버지의 그 자리에 옮아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나는 아무 완충 없이 죽음과 직접 연관 지어졌다. 그러니까 내 얼굴 모습이 영정 속의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것은 그다음의 죽음은 내 차례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이 궁극적으로 나를 자연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538/542


 나이 오십 줄에 들어 머리털이 헤실헤실 벗어지고 있는 지금,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 흉측한 흉터가 다시 드러남을 본다. 그와 함께 그 옛날 땜통 시절의 소심증도 되살아나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로 흉터를 가려보려고 자꾸만 머리에 손이 올라간다. 그렇다. 어릴 적 흉터가 늙어서 다시 드러나고 그 흉터를 통해서 잊혔던 그 시절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43/542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현기영(玄基榮, 1941~ )의 자전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저자. 아버지의 죽음 후 다음 순서는 자신임을 직감하며,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죽음의 길. 그렇지만,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인간이라는 한 개체의 소멸만을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묻혔던 공동체의 기억의 소생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깨달은 이제는 오십 살의 장년이 된 소년. 그가 바라봤던 제주 4.3의 모습이 작품 속에서 그려진다.


 죽음이 곧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죽음이 인간 개체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한다. 죽어서도 내 마음속에 뚜렷이 살아 있는 아버지 모습이 그것을 증거한다.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는 내 의식에 자주 출몰하고 있는데 마치 당신이 내 마음속으로 이사해와 거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 아버지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닌가. 나의 얼굴 모습도 점점 아버지와 닮은 꼴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목숨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자식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다. 종말은 단절이 아니라 그 속에 시작이 있다는 것, 따라서 나의 존재는 단독의 개체가 아니라 혈족이라는 집단적 생명의 한 연결 고리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10/542


 어쨌거나, 이제 죽음의 계절은 끝이 났다. 죽음을 뚫고 솟구치는 생명의 부활, 엄청난 수의 인명 파괴에 맞먹는 종족 번식의 대공사가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 생명의 푸른 불씨를 일궈내어 마침내 초토의 검은 땅을 푸르게 덮어야 했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436/542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그려진 제주4.3사건은 철없는 아이의 눈에 비춰진 의미없는 끔찍한 기억이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소년의 눈에 학살은 잔혹함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는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나이였다. 아무 뜻도 없이 그냥 재미로 벌레를 죽이는 어린애가 어찌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겠는가.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39/542


 3.1사건 이후 일년 동안, 육지부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청이 자행한 무자비한 탄압이 마침내 "앉아서 죽느니 일어나서 싸우자"라는 절망적 항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4.3의 봉기는 곧바로 5.10선거 보이콧으로 이어졌는데,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어린 나에게는 단지 풍문일 따름 별로 실감이 없었다.(p61)...  그리하여 한라산과 해변 사이 주우산간 지대의 백삼십여개의 마을들이 불에 타 사라졌다. 불바다와 함께 대살육극이 시작되었으니, 주민들 절반은 산으로 달아나 폭도라는 누명 아래 사살의 대상이 되고 절반은 명령에 따라 해변으로 소개했으나, 그중의 많은 부로(父老), 아녀자들의 폭도 가족이라고 처형당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소도 닥치는 대로 학살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물정을 잘 모르는 읍내 아이였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68/542


 잿더미가 되버린 마을터의 참혹한 현실들이 수풀에 덮히듯, 제주 4.3의 아픈 기억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에 덮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소년에게 넘어야 할 벽이었고 장애물이었으며, 떠나야 할 변경이었다. 아픔의 기억은 잔흔처럼 남겨졌지만, 이 역시도 극복의 대상이었기에 무시당하며 무의식의 내면으로 소리없이 유폐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움막의 어둠을 밝히던 접시부의 조그만 불방울과 지예의 머루알같이 빛나던 그 눈망울, 그리고 검은 재와 숯더미 속에 푸르게 솟아난 어린 오동나무는 훗날 생명의 강한 상징으로서 나의 심중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다. 아이는 무조건 자라나야 한다. 무조건 자라는 것이 아이의 의무이므로, 아이는 결코 과거에 붙들리지 않는다. 그래서4.3의 유복자들은 막무가내로 자라나서 4.3의 저 검은 폐허를 푸른 풀로 덮게 되는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102/542


 물론 그 가혹한 시절은 어린 내 가슴에도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죽음의 어두운 이미지와 우울증을 심어놓은 게 사실이다. 그 우울증의 결과로 나는 오랫동안 말을 더듬었는데 그 흔적은 아직도 내 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자신의 성장에 해로운 것은 본능적으로 피해가게 마련이다. 슬픔, 외로움이야말로 성장에 유해한 물질이 아닌가. 몸 가벼운 만큼이나 마음 또한 가벼워 울다가도 금방 웃을 줄 아는 것이 아이들이니, 어떠한 슬픔에도 기쁨의 양지를 향하여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104/542


 그러한 영육의 불화, 분리는 자연의 한 부속물이었던 내가 거기서 떨어져나옴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자연은 야만, 무지, 변경과 같은 말이었고,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미래는 가난 때문에 극히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었다. 변경을 벗어난다는 것은 가난한 소년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꿈이었다. 고교 공부도 어려운 처지에, 과연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 저 수평선을 넘을 수 있을까? 나를 키운 모태인 바다가 도리어 비상하려는 나의 발목을 잡는 질곡이라는 뼈아픈 자각, 그랬다, 수평선은 내 목에 걸린 올가미였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536/542


 그리고, 이런 아픔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리를 찾게 된다. 소년이 극복하고자 했던 변경이 사실은 세상의 중심이고, 자신이 되돌아가야할 원초적 생명임을 깨달으면서 건조한 사건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한 개인의 죽음이 불러낸 집단의 기억. 이것이 아버지 죽음이 가져온 진정한 의미다.


 허리까지 잠기는 풀밭을 이리저리 거니노라면 내 영혼에 예리하게 침투하는 야초의 독한 향내...... 거기에서 나는 내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의식과 함께 내 죽음 자체에도 관대해진다. 내 아버지, 내 조상들이 묻힌 곳, 그 초원은 모든 섬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어서 다시 돌아가는 어미의 자궁인 것이다. 그러나 피맺힌 한으로 해서 조금도 관대해질 수 없는 무자, 기축년의 그 주검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도 거기로 돌아가 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지만 그들의 삭일 수 없는 여한은 어찌할 것인가.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94/542


 이처럼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서는 소년의 눈에 비친 제주 4.3사건을 그린다. 때문에, 사건의 잔혹함이나 긴박감 등을 작품에서 느끼기 어렵지만, 대신 사건이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와 함께 하나의 사건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 그 사건은 먼저 우리 안에 온전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교훈을 독자들은 전달받는다. 이런 면에서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순이 삼촌>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좋은 작품이라 여겨진다... 


 삶이란 궁극적으로 그러한 아침에 의해 격려받고, 그러한 아침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아침 빛으로부터 병든 자는 삶의 의욕을 얻고, 절망한 자는 용기를 얻고, 그리고 용기 있는 자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더 밝고 더 아름다운 아침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칠 결심을 하는 순간도 그러한 아침의 햇빛 속에서일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252/542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 나는 한시적이고, 저 바다는 영원한 것이므로. 그리하여 나는 그 영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모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도정에 있는 것이다. _ 현기영, <지상에 숟가락 하나> , p539/542 



자연의 일부였으므로 부끄럼 없고 죄 없이 무구한 시절, 그리하여 나에게 그 시절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세월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섬 땅에서 정작, 내가 태어나 그 탯줄을 묻은 함박이굴 마을은 지금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메타포를 통해서 세상 보는 일에 익숙한 글쟁이여서 그런지, 1948년 토벌대의 방화로 소진된 이래 그 부락은 오직 검은 재의 폐허로만 내 의식에 각인되어 있다. _ p14/542

한창 자라나는 어린 나에게 한달 넘게 계속되는 결식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었다. 처음에 어머니는 아침밥을 반쯤 남겼다가 점심에 먹는 게 어떠냐고 권했지만, 오히려 허기만 더 자극할 뿐이어서 아예 점심을 굶어버렸다. 한사발의 밥이 제대로 배 속에 들어가야 한때나마 그 무서운 허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허기, 정말 그랬다. 허기는 본능적인 공포, 살이 조금씩 깎여들어간다는 두려움을 예리하게 일깨워주곤 했다. 굶주림의 그 생생한 감각은 나의 성장하는 정신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남겨, 지금도 나는 공복상태가 두려워 어쩌다 한끼라도 때를 놓치면 사뭇 안절부절못하는 버릇이 있다. _ p166/542

그러나 죽음의 시절은 이제 일단락 났다. 그해 여름, 보리 풍작과 함께 그보다 더 큰 기쁨이 날아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휴전 소식이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온 것이다. 모든 전선에서 총성이 멎고 휴전선이 획정되었다는 소식이었는데, 과연 그것을 입증하듯이 도두봉의 기총 사격도 그쳤다. _ p350/542

누구나 사춘기 열병을 앓게 마련이지만, 고교 시절의 나는 아무래도 남보다 더 갈등이 심했던가보다. 영과 육의 불화. 영혼도 육체도 제각기 뭔가를 몹시 갈구하건만, 영혼이 바라는 바를 육체가 따르지 못하고, 육체의 요구를 영혼이 들어주지 못했다. 무구하던 영혼이 격정과 불만으로 들끓던 그 악바리 소년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_ p536/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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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07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해 4월 3일은 제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깊고 좋았어요. 어린 아이가 이념이 무엇인지 어찌 알았겠어요 동네 사람들이 도망가고 죽는 끔찍한 현장을 목도했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을테구요. 그 당시 이념 뿐 아니라 가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있었을텐데 참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ㅠ 이제 4.3하면 현기영님이 저는 가장 먼저 떠올라요^^

겨울호랑이 2022-04-07 16:33   좋아요 1 | URL
^^:) 그러셨군요. 거리의화가님께 더 의미있는 4.3이었겠습니다. 마치 롤스가 ‘정의‘라는 한 주제에 천착한 것처럼, 현기영 작가는 4.3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작가라 생각되기에, 저 역시 4.3과 현기영 작가를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네요. 거리의화가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그레이스 2022-04-07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기영씨도 너무 마음 아픈 소설가예요.
글을 너무 잘 쓰는데, 과거의 사건에 매여 있어서,,,
이책의 글들은 소름돋게 좋은데 너무 가슴아팠던 기억이 나요

겨울호랑이 2022-04-07 23:20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의 말씀처럼 4.3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작가의 모습이 여러 작품에 투영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같은 불행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겠지요...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손광헌은 미세한 것을 보고 간할 수 있었고, 고종회는 좋은 의견을 듣고 고칠 수 있었으며, 양진은 공로를 이루고 물러날 수 있었으니, 예로부터 국가를 가진 사람이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무릇 어찌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무너뜨리며 몸을 죽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비록 무궁한 재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교만한 사졸들의 마음을 채울 수 없으니,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위급하고 곤란한 속에서 손을 잡고 천하를 얻었습니다. 무릇 나라의 존망(存亡)은 오로지 후한 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역시 법도(法度)를 닦고 기강(紀綱)을 세우는 데에 있습니다.

황제가 학사(學士) 마윤손(馬胤孫)에게 말하였다.

"짐은 새로 천하에 다가갔으니 의당 언로(言路)를 열어야 할 것이며, 만약 조정의 인사들이 말한 것으로 죄를 짓는다면 누가 감히 말할 사람이겠는가! 경이 짐을 위하여 조서를 짓고 짐의 뜻을 선포하도록 하시오."

마침내 조서를 내려서 말하였는데, 그 대략이다.
"옛날에 위징(魏徵)은 황보덕참(皇甫德參)에게 상을 내리라고 요청하였는데, 지금 유도 등은 사재덕을 물리치라고 요청하고 있으니, 일은 같은데 말은 다르니 어찌 그것이 차이가 크단 말인가! 사대덕의 마음이 가슴에 품은 것을 기울여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어찌 책망할 만하겠는가?"

가만히 앞의 왕조를 보면 상원(上元, 당 숙종의 연호) 이래로 연영전(延英殿)을 설치하고 혹은 재상이 주문을 올려 논의하려고 하는 것이 있거나 천자가 자문하려고 하는 것이 있으면 옆에는 시위를 없앴으니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이 옛날에 있었던 일을 회복시키고, 오직 추요(樞要)의 신하들만이 옆에서 시중들도록 허락하십시오.

노왕이 성에 올라 울면서 밖에 있는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관례를 올리지 않은 나이에서부터 돌아가신 황제를 좇아 백번 싸워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온 몸이 쇠붙이에 상처를 입으면서 오늘의 사직을 세웠는데, 너희들이 나를 좇았으니 눈으로 그 일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 조정에서는 참소하는 신하들을 신임하고 골육(骨肉)을 시기하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임을 당하겠는가?"
이어서 통곡하였다. 듣던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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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과거란 잊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오륙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저승차사라고 손가락질하며 흉물스럽게 여기던 까마귀들도 본래의 평범한 새로 돌아가 있었고, 까마귀 날갯빛처럼 불길했던 검은 경찰 제복도, 시체를 쪼는 까마귀 부리 같던 제모의 에나멜 차양도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밀고자의 운명이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헌신짝처럼 가차 없이 버림을 받는 것,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 현관문턱에서 구두나 고치면서 먹고살아라,가 전부였다.

그러나 죽음의 시절은 이제 일단락 났다. 그해 여름, 보리 풍작과 함께 그보다 더 큰 기쁨이 날아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휴전 소식이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온 것이다. 모든 전선에서 총성이 멎고 휴전선이 획정되었다는 소식이었는데, 과연 그것을 입증하듯이 도두봉의 기총 사격도 그쳤다

그런데 이러한 전시생활의 암담함을 일시에 걷어내준 것이 6학년 2학기 때 찾아온 휴전이었다. 휴전은 고달픈 삶의 한 세월을 과거지사로 돌려버리는 새로운 전기였다. 모든 것이 바쁘고 활기차게 흥청거렸는데,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바쁘게 돌아갔다. 수업 내용이 충실해졌고 아이들도 비로소 면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선생도 학생도 모두 수업에 열심이었다. 이제, 지식은 미심쩍은 것이 아닌, 출세의 확실한 수단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중1 시절은 완충기였던 것 같다. 그 시기는 여러 면에서 초등학교 6학년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나는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그것의 한 분자였고, 또래집단에서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그 구성원이었다. 그런데도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속에서 변화가 이뤄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예컨대 계절은 한창 여름인데, 백중이 지나면 귀뚜라미 울음과 함께 물이 차지면서 여름 속에 가을이 배태되듯이, 어린이의 무구한 몸과 정신 속에서 이차성징과 함께 폭풍의 징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쇠퇴와 맹아가 동시에 이뤄지는 이행기. 이제 그 어린이는 늙어버렸다. 그 무구한 혼과 육체는 소멸하고 그 대신에 무자비한 수컷이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병아리도 닭도 아닌, 어중간한 중성의 상태, 말하자면 멋대가리 없게 생긴 중병아리가 그때의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밑창이 터져 저승과 통한다는 용연의 그 푸른 심연에서도 저승 물이 아닌, 싱싱한 현실의 생수가 솟았다. 무진장의 생수가 거기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쳐올랐는데, 그래서 물빛이 더욱 푸르렀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밑 지하에서 솟구치는 생수의 양이 얼마나 엄청난지 썰물 때면 알 수 있었다. 썰물에 바닷물이 빠져나가 수위가 반쯤 줄어들면, 해수보다 생수가 훨씬 양이 많아져서, 그 넓은 용연 전체가 시리도록 물이 차가워지고, 물빛도 한결 푸르게 맑아지곤 했다. 정드르의 여러 동네 사람들이 길어다 먹는 샘물 통은 서편 물가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물도 역시 밀물이면 바닷물 속에 잠겼다가 썰물이면 드러나는, 해수 속의 생수였다.

그렇다. 해수 속의 생수, 그것이야말로 용연이 보여준 최고의 압권이었다.

그리하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용연의 신비로운 푸른빛은 이제 나의 내면으로 옮아와 하나의 상징, 하나의 생활지표로 바뀌어 자리 잡고 있다. 용이 잠자고 있는 그 심연의 파란 물빛이 문득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삭막함을 뚫고 희열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회색의 도시 공간 속에서 싱싱한 샘물이 솟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처녀·총각들의 혼사도 그해에 많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칠년 동안 거의 끊기다시피 했던 혼사들이 그해에 부쩍 성행하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 많은 젊은이들이 귀향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대 갔던 사촌 형이 무사귀환하여 결혼식을 올린 것도 그해였다.

어쨌거나, 이제 죽음의 계절은 끝이 났다. 죽음을 뚫고 솟구치는 생명의 부활, 엄청난 수의 인명 파괴에 맞먹는 종족 번식의 대공사가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 생명의 푸른 불씨를 일궈내어 마침내 초토의 검은 땅을 푸르게 덮어야 했다.

책 읽기는 우울한 나의 침묵에 잘 어울렸다. 나는 말을 잘 안하는 대신에 그 침묵을 책 읽기로 채웠다. 책을 읽고 나면, 좋은 말 상대를 만나 한참 다변스럽게 얘기를 주고받은 것 같은 흐뭇함이 느껴졌다. 책들은 나에게 까닭없는 슬픔, 이른바 ‘고독’이란 걸 가르쳐주기도 했다. 슬퍼할 일도 없는데 공연히 허무해져서 눈물을 글썽거릴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런 눈물일수록 감미롭게 느껴졌다. 나의 미래는 그다지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의 우울이 그렇게 만들 것만 같았다. 가난한 글쟁이, 막연하지만 그것이 나의 미래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꼭 문학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한 영육의 불화·분리는 자연의 한 부속물이었던 내가 거기서 떨어져나옴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자연은 야만·무지·변경과 같은 말이었고,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미래는 가난 때문에 극히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었다. 변경을 벗어난다는 것은 가난한 소년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꿈이었다. 고교 공부도 어려운 처지에, 과연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 저 수평선을 넘을 수 있을까? 나를 키운 모태인 바다가 도리어 비상하려는 나의 발목을 잡는 질곡이라는 뼈아픈 자각, 그랬다, 수평선은 내 목에 걸린 올가미였다.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 나는 한시적이고, 저 바다는 영원한 것이므로. 그리하여 나는 그 영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모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도정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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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체제 4 -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 1789-1914년 근대세계체제 4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박구병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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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프랑스 혁명이 정치적 변화의 정상 상태라는 개념과 주권이 군주(통치자)가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는 사상을 정당화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한 쌍의 신념이 빚어낸 결과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첫 번째 결과는 이런 새롭게 보급된 개념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세 가지 근대적 이데올로기 -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 의 출현이었다. 제4권 전체의 논지는 중도적 자유주의가 다른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길들이고" 19세기의 승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뒤 이는 무엇보다 당대 가장 강력한 두 국가 - 영국, 프랑스 - 에서 자유주의 국가들의 탄생에 특권을 부여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사회과학의 형성을 독려하고 구속하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서문 , p16


 영국과 프랑스는 1651년부터 1815년까지 자본주의적 세계경제 내의 헤게모니를 두고 길고긴 전쟁을 벌였다. 1815년에야 영국은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곧 두 국가는 주목할 만큼 신속하게 핵심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새로운 정치적 모델을 확립하고자 함께 노력하는, 암묵적이지만 매우 뜻깊은 동맹관계에 돌입했다. 이는 자유주의 국가라는 모델로서 인민주권의 시대에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정당화에서 핵심적 요소를 차지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9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4 The Modern World-system>의 주제는 '자본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다. 이 책이 그리는 19세기는 어떤 시대일까. 최후의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프랑스마저 영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면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기까지 영국의 페권에 도전할 세력을 없을 터였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영국의 헤게모니에 최대의 반격을 가하려던 시도는 이후 유럽 각국에 민족주의와 함께 인민주권의 개념을 확장시키면서 역설적으로 영국 헤게모니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이전 시대의 중심이 '자본주의'였다면, 이제 시대의 중심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한 '이데올로기'로 옮겨간다.


 우리는 왜 프랑스 혁명이 "자본주의"를 설치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파악될 수 없는지를 설명했다. 그 까닭은 프랑스가 훨씬 전에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부분적으로는 패권국이 되려는 투쟁에서 영국을 물리치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본질적으로 실패했지만, 근대세계체제의 역사에서 등장한 "반체제적"(말하자면 반자본주의적) 혁명으로 간주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12


  1815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세계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정치적 현실은 당시의 시대정신에서 정치적 변화가 당연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주권의 자리는 군주나 입법부(의회)로부터 훨씬 더 눈에 띄지 않는 어떤 존재, 즉 "인민"으로 이동했다...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는 변화라는 정상상태에 영향을 미치면서 인민주권 개념의 실행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의 요구와 각국에서 그리고 세계체제 전체 내에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끝없이 자본을 축적하는 능력을 보증하려는 저명인사들의 욕망을 어떻게 조정하는가의 문제였다. 우리가 언뜻 보아 갈등을 일으키는 이해관계 사이에 도저히 좁혀질 것같지 않은 깊은 간극처럼 보이는 것을 해결하려는 이런 노력에 부여한 이름이 이데올로기(Ideology)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1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는 월러스틴이 분석한 이데올로기의 세 얼굴이다. 그리고, 월러스틴에 의하면 이들 중 최후의 승자는 '자유주의'다. 다만, 자유주의는 승리를 거두기 위해 처음에는 사회주의와, 나중에는 보수주의와 손잡으면서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보였으며, 월러스틴은 이를 '중도적 자유주의'라 지칭하며, <근대세계체제 4>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장기의 19세기까지 세계체제의 정치경제학과 그것의 산만한 수사학 사이에 괴리가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다. 제4권에서 우리는 근대세계체제의 세 가지 주요 이념인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의 발전에 의해서 이 괴리의 극복을 필수적이게 만든 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영향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 어떻게 항상 중도적 원칙이자 신조였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중도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다른 두 이념을 사실상 중도적 자유주의의 화신(化身)으로 변형시키면서 "길들여왔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장기의 19세기의 끝무렵에 중도적 자유주의가 세계체제의 지문화의 지배적인 신조였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13


 세 가지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적절한 역사적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단지 누가 인민의 주권을 구현하는가에 대한 탐색에서 요구되는 세 가지 출발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이른바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이른바 전통적 집단이었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38


 확실히 중도는 단지 추상이며 수사적 기교이다. 누군가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단지 양극단을 규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중도적 위치에 자리잡게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일을 그들의 기본적 정치 전략으로 채택하고자 결정한 이들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9


 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 동맹은 18세기의 자유롭고 평등주의적인 사상, 그리고 절대왕정에 맞선 투쟁 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 동맹은 두 이데올로기가 근대 국가의 사회정책을 위한 기본 조건으로 인식한 생산성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증대했기 때문에 19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융성했다(p43)... 다른 한편 1830년 이후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848년 이후 그 구분은 훨씬 더분명해졋다. 동시에 1848년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화해와 조화가 시작된 해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4


 자유주의 국가는 중간계급의 정치적 역할을 정당화하고 (따라서 그들에게 합법성을 부여받으면서) 지정학적 영역에서 그들의 지배를 보증하기 위해서 화친 협정에 불만을 품은 노동계급에 대한 국내적 억압을 결합시켰다. 이는 처음에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48년 유럽 대륙을 휩쓴 혁명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취약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139


 세계체제로서 중도적 자유주의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이미 자본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상황에서, 월러스틴은 '인민주권'에 주목한다. 세계질서의 위계는 결정된 상황에서 문제는 얼마만큼 주변부가 확장되는가가 문제되던 19세기. 체제의 문제는 외부 확장이 아닌 내적 분화의 형태로 표현된다.


 우리는 어떻게 중도적 자유주의가 그 이념을 세 가지 중요한 영역에 부과했는지를 자세히 검토했다. 첫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가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모범 사례로 부각되었듯이, 세계체제의 중심부에 "자유주의 국가"가 창설된 것이었다. 두 번째는 포함에서 배제로 시민권의 원칙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우리는 여성, 노동계급, 그리고 종족적/인종적 "소수집단" 등 배제되었던 세 주요 집단들을 언급함으로써 이를 예시했다. 세 번째는 자유주의 이념의 반영이자 지배 집단들이 피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적 사회과학들의 출현이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414


 불평등은 잘 알려진 모든 역사적 체제에서 그랬듯이, 근대세계체제의 본질적인 현상이었다. 다른 점, 무엇보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독특한 점은 평등, 즉 시장 내의 평등, 법 앞의 평등,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모든 개인들의 근본적인 사회적 평등이 체제의 목적으로 선포되었던 점이다. 근대 세계의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질문은 평등에 대한 이론적 용인과, 그 결과로 생긴 현실의 기회와 만족의 양극화가 지속적일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극심해지는 상황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라는 과제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17


'자유(自由)'라는 개념으로부터 주권(主權)이 1인으로부터 다수(多數)에게로 옮겨지면서, 당연하게도 예전에는 동질한 '인민들'이 주도권을 갖느냐에 따라 다시 분화(分化)되었다. 이로부터 생겨난 불평등 문제는 계급안으로의 '포함'과 '배제' 문제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화의 모습은 극단적으로는 '혁명'의 모습으로, 보다 온건한 형태로는 '선거권의 확대'로 나타난다. 18세기 이전의 '중심부-주변부' 문제가 국가 단위의 문제였다면, 이제 인민 내부의 문제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를 '시민혁명'이라는 또 다른 혁명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의 시대 구분 '혁명의 시대 - 자본의 시대 - 제국의 시대' 도식 대신 다른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1830-1832년 무렵 자유주의 중도파가 통치하는 자유주의 국가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 당시 산업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세 국가- 에서 수립되었다. 전체적으로 세 국가는 세계체제의 경제적, 문화적 핵심을 구성했다. 자유주의 국가의 모델은 자신의 활용뿐 아니라 그에 필적하는 번영과 안정을 달성하고자 열망하는 다른 이들의 활용을 위해서 고안되었다. 신성동맹과 핵심 지역의 과격파는 억제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완패했다. 보수주의자들과 급진파는 중도적 자유주의를 단순한 변형으로 사실상의 변모를 시작했다. 과격파가 효과적으로 제압을 당했다면, 봉기를 모색하던 혁명가들은 특히 세 곳의 전형적인 자유주의 국가에서 어떤 정치적 존재도 거의 과시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124


 19세기 세계질서의 전환점은 1866-1873년, 즉 "19세기 후반의 역사가 바뀌는 거대한 경첩(이음새)같은" 시기일 것이다. 미국은 연방을 유지했고, 1866년 독일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따라서 두 신흥 강국은 각기 지정학적 역할을 강화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이라는 대도약에 합류할 참이었다. 1867년 영국의 의회 개혁은 상당히 정확하게 "한 시대의 종말"로 비춰졌다. 1870-1871년 프랑스의 폭발과 더불어 1867년 영국의 개혁법은 1815년에 시작된 위험한 계급들 - 특히 도시 프롤레타리아 - 의 길들이기 과정, 즉 이들을 체제 내로 정치적으로 통합해서 이들이 양국의 기본적인 경제, 정치, 문화 구조를 뒤엎지 않도록 만드는 과정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상징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200


 한편, <근대세계체제>에서 언급된 인민주권에 의해 발생한 불평등 문제, 계급 문제는 다른 한편으로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계몽주의 전통에 의해 새로운 '사회과학(社會科學)'을 탄생시킨다. 과거 중세의 질서가 신학(神學)에 기초하였다면, 근대의 질서는 정량화된 과학(科學)에 근거하게 되었다. 인민이 분화되듯, 학문도 분화되면서 저마다의 이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론(理論)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렇게 설명된 질서는 다시 근대세계체제를 강화하게 되었다... 


 다양한 사회적 출신을 가진 사람들의 차이와 불평등은 19세기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차이와 불평등은 오랫동안 존재해왔으며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며 실제로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19세기의 새로운 점은 공동 협치(協治)의 기반이자 중도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서 평등에 대한 수사학적 합법성과 시민권의 개념이었다. 이는 이분법의 이론화, 그 구별을 논리적으로 동결하고 사회의 규칙뿐만 아니라 과학의 규칙까지 반대하여 사실상 경계를 가로질러 횡단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또 새로운 점은 법적인 구속으로부터 그들의 해방이나 최소한 부분적 해방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이런 이분법의 구체화가 배제한 모든 사람들이 사회조직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민권은 항상 누군가를 포함하는 것만큼 누군가를 배제시켰다. 19세기에는 정체성이라는 완전히 현대적인 개념 장치가 탄생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323


 순조롭게 기능하고 특히 위험한 계급들의 반자유주의적인 압력을 앞지르기 위해서 자유주의 국가들은 계속 진행 중인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세 가지 법칙정립적 사회과학 -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 의 기능이 되었다. 이 세 가지 분야에 관해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이것이 일종의 삼위일체라는 점이다. 과거에 대해서 기록할 때, 새롭게 떠오른 대학 조직은 이른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영역을 단일한 "분야"로 결합시켰다. 그러나 현재에 관심을 두자마자, 사회과학자들은 이 단일한 분야가 별도로 연구되어야 할 세 개의 개별적인 분야라고 강조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분열이 발생했는가? 원인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근대성(modernity)"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 사회구조를 서로 상당히 다른 세 가지 구획으로 차별화하는 것이었다는 자유주의 사상의 강력한 주장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은 시장,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였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 p361


 월러스틴의 <근대세게체제> 시리즈는 4권에서 마무리되지만, 본인은 5권과 6권도 계획한 듯하지만, 아쉽게도 저자가 2019년 타계하면서 그 뒤를 알 수 없게 되버렸다.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놀라운 저작을 더 읽지 못하는 부분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이후 시대를 '세계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로 해석할 여지가 남겨진 점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만일 내가 지금 계획하는 대로 제5권이 1873년부터 1968/1989년까지 펼쳐진다면, 내가 오래 살 수 있다면 제6권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로서 그것이 다루는 범위는 1945년/1968년부터 21세기 중엽, 예컨대 2050년쯤까지일 것이다. 그 무렵에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들어서지 않을까 예상한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 서문, p17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에는 2개의 기둥이 더 있었다. 바로 강력한 국가와 강력한 국가 간 체제였다. 우리가 이제 몰두할 문제는 그 2개의 기둥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절대군주제는 강력한 국가를 세운 적이 없었다. 절대주의 체제는 내부에서 약한 국가들이 더 강력해지려고 분투하는 발판일 뿐이었다. 진정으로 강력한 국가 - 즉 절절한 관료조직과 사리에 맞는 대중의 묵인을 갖춘 국가 - 의 수립은 1789년 이후 세계체제의 표준적 변화와 인민주권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체제의 핵심 지역에 그런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던 이들은 오직 자유주의자뿐이었다. 관료제의 성장은 경제 성장, 즉 최소한 당시 자본가들이 기대하고 기술적으로 가능했던 규모의 경제 성장에서 꼭 필요한 부속품이었다. - P173

국가가 주도하는 개혁의 정당성에 대한 동일한 자유주의적 확신은 자유무역에 적용되었다. 영국 정부는 일단 유럽 시장에서 인도의 경쟁자들이 초래한 어떤 위협에 맞서 랭커셔를 안전하게 보호하게 되자, 인도를 면직물 수출국에서 원면 수출국으로 강제로 변화시키면서 영국의 면직물 제조업자가 자유무역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허용했다... 한 휘그당파 의원은 1846년 의회토론에서 자유무역을 "우리에게 외국을 통치할 책임을 부과하지 않고 외국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식민지가 될" 유익한 원천으로 서설할 수 있었다. - P185

자유주의 제국은 개인 권리의 극대화에 대한 신의를 특징으로 삼지 않았다. 자유주의 제국을 구별해주는 것은 경제성장(또는 오히려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는 동시에 위험한 계급을 길들이는 (그들을 시민으로 통합하고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들에게 제국이 지닌 경제 규모의 일부를 제공함으로써) 국가의 지능적인 개혁에 대한 헌신이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유주의 제국은 정치적 중도파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반동이나 혁명의 낌새가 있는 체제를 회피해야만 했다. 물론 이를 실행하려면 어떤 국가는 외부인들과의 관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심각한 민족주의적 문제가 없어야 하고 국내에 불만을 품은 강력한 소수집단도 없어야 했다. 또한 그 국가는 집단적 번영의 전망이 비현실적이지 않을 정도로 세계경제에서 충분히 강력해야 했고 외세의 지나친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충분한 군사력이나 강력한 동맹국들을 보유해야 했다. - P208

전 세계적으로 19세기는 유럽의 절정기였다. 유럽 혈통의 백인 남성들이 [이토록] 도전을 덜 받으면서 [세계를] 지배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군사력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에 의해서 보증되었다. 유럽은 문명이라는 통합적 체계의 건설을 통해서 ‘유럽화‘되었다. 다른 모든 문화권들은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고 분류될 수 있었다. 국가들은 균질적인 시민들로 이루어진 국민을 만들고자 시도하면서 동시에 생시몽이 옹호한 "세계의 후진 지역에 맞서 싸우는 성전(聖戰)"을 통해서 백인(유럽계) 인종을 창출하고자 했다. 성전은 식민화를 수반했다. - P317

중도적 자유주의는 항상 각종 제도들의 신중하고 정당한 개혁에 전념해왔고, 우리가 보아왔듯이 19세기 중엽에 이 목표는 현재를 연구하는 신흥 사회과학들에게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회 운동가로서 또는 그저 사회 개혁가들이 목표를 시행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분석 연구들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간주하기로 했는가? 비라보와 콩도르세와 같은 사상가들이 최초로 사회과학(social scie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들은 그 용어를 사회적 기술(social art)과 동의어로 만들었다. 사회적 기술은 "공공정책과 사회의 재건에 대한 합리적인 지침으로 실용적이고 개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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