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과거란 잊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오륙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저승차사라고 손가락질하며 흉물스럽게 여기던 까마귀들도 본래의 평범한 새로 돌아가 있었고, 까마귀 날갯빛처럼 불길했던 검은 경찰 제복도, 시체를 쪼는 까마귀 부리 같던 제모의 에나멜 차양도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밀고자의 운명이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헌신짝처럼 가차 없이 버림을 받는 것,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 현관문턱에서 구두나 고치면서 먹고살아라,가 전부였다.
그러나 죽음의 시절은 이제 일단락 났다. 그해 여름, 보리 풍작과 함께 그보다 더 큰 기쁨이 날아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휴전 소식이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온 것이다. 모든 전선에서 총성이 멎고 휴전선이 획정되었다는 소식이었는데, 과연 그것을 입증하듯이 도두봉의 기총 사격도 그쳤다
그런데 이러한 전시생활의 암담함을 일시에 걷어내준 것이 6학년 2학기 때 찾아온 휴전이었다. 휴전은 고달픈 삶의 한 세월을 과거지사로 돌려버리는 새로운 전기였다. 모든 것이 바쁘고 활기차게 흥청거렸는데,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바쁘게 돌아갔다. 수업 내용이 충실해졌고 아이들도 비로소 면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선생도 학생도 모두 수업에 열심이었다. 이제, 지식은 미심쩍은 것이 아닌, 출세의 확실한 수단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중1 시절은 완충기였던 것 같다. 그 시기는 여러 면에서 초등학교 6학년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나는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그것의 한 분자였고, 또래집단에서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그 구성원이었다. 그런데도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속에서 변화가 이뤄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예컨대 계절은 한창 여름인데, 백중이 지나면 귀뚜라미 울음과 함께 물이 차지면서 여름 속에 가을이 배태되듯이, 어린이의 무구한 몸과 정신 속에서 이차성징과 함께 폭풍의 징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쇠퇴와 맹아가 동시에 이뤄지는 이행기. 이제 그 어린이는 늙어버렸다. 그 무구한 혼과 육체는 소멸하고 그 대신에 무자비한 수컷이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병아리도 닭도 아닌, 어중간한 중성의 상태, 말하자면 멋대가리 없게 생긴 중병아리가 그때의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밑창이 터져 저승과 통한다는 용연의 그 푸른 심연에서도 저승 물이 아닌, 싱싱한 현실의 생수가 솟았다. 무진장의 생수가 거기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쳐올랐는데, 그래서 물빛이 더욱 푸르렀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밑 지하에서 솟구치는 생수의 양이 얼마나 엄청난지 썰물 때면 알 수 있었다. 썰물에 바닷물이 빠져나가 수위가 반쯤 줄어들면, 해수보다 생수가 훨씬 양이 많아져서, 그 넓은 용연 전체가 시리도록 물이 차가워지고, 물빛도 한결 푸르게 맑아지곤 했다. 정드르의 여러 동네 사람들이 길어다 먹는 샘물 통은 서편 물가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물도 역시 밀물이면 바닷물 속에 잠겼다가 썰물이면 드러나는, 해수 속의 생수였다.
그렇다. 해수 속의 생수, 그것이야말로 용연이 보여준 최고의 압권이었다.
그리하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용연의 신비로운 푸른빛은 이제 나의 내면으로 옮아와 하나의 상징, 하나의 생활지표로 바뀌어 자리 잡고 있다. 용이 잠자고 있는 그 심연의 파란 물빛이 문득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삭막함을 뚫고 희열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회색의 도시 공간 속에서 싱싱한 샘물이 솟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처녀·총각들의 혼사도 그해에 많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칠년 동안 거의 끊기다시피 했던 혼사들이 그해에 부쩍 성행하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 많은 젊은이들이 귀향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대 갔던 사촌 형이 무사귀환하여 결혼식을 올린 것도 그해였다.
어쨌거나, 이제 죽음의 계절은 끝이 났다. 죽음을 뚫고 솟구치는 생명의 부활, 엄청난 수의 인명 파괴에 맞먹는 종족 번식의 대공사가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 생명의 푸른 불씨를 일궈내어 마침내 초토의 검은 땅을 푸르게 덮어야 했다.
책 읽기는 우울한 나의 침묵에 잘 어울렸다. 나는 말을 잘 안하는 대신에 그 침묵을 책 읽기로 채웠다. 책을 읽고 나면, 좋은 말 상대를 만나 한참 다변스럽게 얘기를 주고받은 것 같은 흐뭇함이 느껴졌다. 책들은 나에게 까닭없는 슬픔, 이른바 ‘고독’이란 걸 가르쳐주기도 했다. 슬퍼할 일도 없는데 공연히 허무해져서 눈물을 글썽거릴 때가 종종 있었고, 그런 눈물일수록 감미롭게 느껴졌다. 나의 미래는 그다지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의 우울이 그렇게 만들 것만 같았다. 가난한 글쟁이, 막연하지만 그것이 나의 미래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꼭 문학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한 영육의 불화·분리는 자연의 한 부속물이었던 내가 거기서 떨어져나옴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자연은 야만·무지·변경과 같은 말이었고, 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미래는 가난 때문에 극히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었다. 변경을 벗어난다는 것은 가난한 소년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꿈이었다. 고교 공부도 어려운 처지에, 과연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 저 수평선을 넘을 수 있을까? 나를 키운 모태인 바다가 도리어 비상하려는 나의 발목을 잡는 질곡이라는 뼈아픈 자각, 그랬다, 수평선은 내 목에 걸린 올가미였다.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 나는 한시적이고, 저 바다는 영원한 것이므로. 그리하여 나는 그 영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모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도정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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