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도널드 서순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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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 그람시 -


 그람시가 묘사하는 위기 국면은 잠재적인 혁명적 상황이 아니라 '병적 징후'들로 가득한 '공백기'였다. 그람시는 낡은 것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지성의 비관주의'와 반대되는 '의지의 낙관주의'를 품은 채 이런 병적 징후들이 진보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를 기대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놓인 공백기의 주요한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오래된 강둑이 뒤에 있지만, 반대편은 아직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물살 때문에 뒤로 밀려서 빠져 죽을 위험도 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짓눌린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1/177


 도널드 서순 (Donald Sassoon, 1946 ~ )의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위기에 빠진 21세기 세계의 해부 Morbid Symptoms: Anatomy of a World in Crisis>은 21세기 들어 쇠퇴하는 유럽의 보편적 가치 - 사회주의, 민주주의 - 대신 미국, 영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극우포퓰리즘의 대두를 지적한 책이다. 인용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 ~ 1937)의 글로부터 우리는 전체적인 책의 논조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소멸한 '낡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는 비교적 쉽다. 사라져가는 낡은 것은 1945년 이후 30년간 서구를 지배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합의,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 Soziale Marktwirtschaft다.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합쳐놓은 체제를 가리키는 독일어 표현이다. 탄탄한 경제 성장과 나란히 모든 사람을 위한 복지 확대와 실패한 이들을 위한 맞춤형 보호가 이루어진 복지자본주의 caring capitalism를 말한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44/177


 추운 겨울에 세균과 해충의 번식이 억제되는 것처럼 냉전(冷戰)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나보다. 냉전 이후 자본주의 일방의 독주 속에 전통적인 가치들은  그 의미를 상실했고, 새로운 가치들이 냉전 이후 사회의 보편기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와 함께 사회의 중심이슈가 정치에서 경제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되었다.


 가치는 변화를 겪는다. 유럽적 가치는 일정한 가치를 장려하고 다른 가치들은 '비유럽적'인 것이라고 깎아내리려고 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구성물이다. '유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통일된 일련의 원리와 가치라는 개념은 실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강령으로서 지식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통일된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21/177


 과거 카르타고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 이후 로마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만들었듯 공산주의가 사라진 세계에서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의 돛을 달고 급속도로 팽창해나갔다. 바야흐로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비용절감과 이윤극대화를  위한 무한경쟁 시대에 맞춰 유효수요창출보다 효율성을 위한 최소한의 개입이 강조(Laissez-faire)되면서 정책의 우선순위도 바뀌게 되었고, 비효율적인(?) 복지비용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복지국가는 비록 그 성원들이 여전히 소득과 부와 교육 수준에서 불평등하지만, 그래도 다른 어떤 종류의 사회체제의 삶보다 선진 자본주의의 삶을 더 낫게 만들 만큼 충분히 응집력이 있는 민족공동체를 창출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처럼 거의 일반화된 통합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20년간에 이르러서야 전통적인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약화시킴으로써 전후戰後 정당체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사회의 위기가 정치의 위기로 바뀌고 있다. 병적 징후들이 넘쳐난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58/177


 이처럼 서순은 공산주의 붕괴 이후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경제적 요소'로 변화하고, 이같은 기준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 또한 변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경제우선주의 사상이 사회보편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정치부문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세금을 억누르면서 복지 지출을 높게 유지하는게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과거 우파의 특권이었던 영역을 점유해야 했다. '현대화', 즉 신자유주의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국유화의 시대, 경제를 기업가 계급에게 맡겨두기보다는 직접 운영하려 한 '온정적 가부장' 국가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시장이 거침없이 활개치게 놔두고 거기서 생겨나는 돈으로 저소득층을 돕는 게 필요했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55/177


 국가주도의 부의 재분배가 아닌 시장 주도의 자율적인 부의 순환이 강조되면서 조세정책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반시장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념과 상관없이 모든 정당의 위치가 우경화(右傾化)되었다. 중도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중도확장을 꾀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은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당들은 자신들만의 고유색깔을 잃어갔다.


 정치인들은 투표의 의미와 중요성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챙기면서 어쨌든 마음 내기큰 대로 해석한다. 유권자들은 투표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표를 던지는 순간, 자기가 가진 권한과 목표, 바람을 자신이 믿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정치인에게 넘겨주는 셈이다. 투표는 불가피하게 권력을 포기하는 행위다. 권력은 불가피하게 소수에게 집중된다. 문제는 이 소수를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분명한 이유 때문에 정치인들은 당원보다 유권자에게 더 신경을 쓴다.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글이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주된 통로는 여론조사다. 정치인들이 접촉하는 유권자들은 보통 불만이나 망상,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이들이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는 실패로 치닫는 중이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47/177 


  대신해서 뚜렷해진 것은 보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극우(極右)움직임이다. 저자는 유럽의 경우 이민자와 무슬림에 대한 적대적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우경화 현상은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린 정치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짙어가는 병색임을 지적한다.


 민족과 민족주의 둘 다 유럽 프로젝트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세다. 실제로 유럽연합의 모든 문서는 더욱 응집력 있는 공통의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언급할 때면 언제나 파편화와 혼란, 충돌을 피해야 하고, 응집과 연대, 보완과 협력을 달성하고 회원국들에서 현존하는 민족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나는 유럽의 정체성을 가르칠 수 없다고 본다. 유럽을 민족국가들의 민족국가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28/177


 서순의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에서 우리는 냉전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해 복지의 쇠퇴와 이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라는 병적 징후에 더해 이를 치료할 정치수단마저 상실한 암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보다 개방적인 가치관과 폐쇄적인 가치관의 대립 속에서 보편가치가 퇴색하는 현상 속에서 깊어가는 우리시대의 병색. 이러한 위기감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우리의 삶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아무리 시대가 병들었어도 계속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간 사람들 덕분이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55/177


 저자인 서순이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결코 밝지 않다. 병적 징후는 완연하지만 차도는 없는 상황에서 깊은 답답함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해야 할까. 당연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자유, 평등, 우애(Liberte, Egalite, Fraternite). 프랑스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표어 속에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상호 충돌할 수 있는 가치가 '우애'를 통해 조화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수의 경제적 자유를 위해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우리 시대의 질병은 우리의 판도라 상자에 남은 마지막 '희망'을 우애에서 놓지 않을때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는 비단 유럽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곳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있다. 이런 패배 가운데 어느 것도 특별히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좌파 정당이 우파의 의제를 그렇게 많이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다. 대다수 사민주의 정당은 조만간 긴축 정책을 받아들이고, 임금이 정체하고 불평등이 증대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3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했다. 또한 불평등이 증대하도록 용인하면서 승승장구하는 수혜자들에게 과감하게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말한 것처럼, "세금을 인하하고 규제를 완화하면 ... 새로운 고성장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론은 철저하게 불신받고 있다."_ p60/177



사실상 모든 보주주의자와 심지어 일부 좌파도 표명하면서 승리를 거둔 사고는, 유럽에서 경제진보를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물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과도한 사회복지이며, 규제완화와 민영화는 어느 정도까지 기회를 확대하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각이 유럽 주요 정당들의 경제 담론에서 굳건하게 중심을 차지했다. 이 시각은 진정한 자유는 시장에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중심적인 전 지구적 서삭 되었다. 실제로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라 워싱턴과 런던에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이르기까지 세계 금융 시스템의 패권적 행위자들이 장려했기 때문이다. _ p134/177

오늘날의 병적 징후들은 앞선 수십년간 이루어진 성장과 번영에 연결되어 있다. 대체로 현재의 불만은 환멸, 희망의 상실과 밀접히 관련되며, ‘담대한 희망‘ 같은 슬로건으로도 희망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오늘날 ‘국제적인‘ 것은 ‘인류‘가 아니라 세계화된 시장이다. 그리하여 대기업과 소수 부자들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나라끼리 싸움을 붙이는 한편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정부 간섭을 비난하면서 밑바닥을 향한 경쟁을 부추긴다. 각국이 다른 나라에게서 투자를 빼앗아오기 위한 경쟁이다. _ p155/177

우파는 승승장구했지만 ‘극‘좌파는 그만큼 선전하지 못했다. 심지어 오늘날 ‘극좌파‘라는 표현 자체가 1945년 이후 30년간 주류 사회민주주의의 일부였던 입장까지 아우를 정도로 확장되고 있다. 극좌파는 마치 새로운 세력처럼 행동하지만 이 신좌파가 구사하는 언어는 대부분 낡았다. 압도적 다수, 즉 야비한 1퍼센트에 맞서 99퍼센트를 대변한다는 포퓰리즘적 주장을 펴는데, 마치 99퍼센트 자체가 계급과 젠더, 정치, 종교, 교육, 지역, 연령에 따라 나뉘지 않은 듯 행세한다. _ p9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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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10 22: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냉전의 핵심이 체제경쟁이었으니 특히 자본주의 체제는 공산주의 체제와의 대결에서 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복지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던 면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박정희가 의료보험체계를 유럽식으로 가져온것도 순전히 북한과의 체제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었으니까요. 대결하던 한 체제가 무너지고 난 이후 자본주의의 극단인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야만적인 자본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네요. 어쩌면 그람시의 저 말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직관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언제가 될지 고민이 많아지기도 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08-10 22:18   좋아요 3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체제간 대립이 격심하던 시기에 약자들에 대한 복지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복지제도가 반드시 예산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과연 갈등과 대립이 모든 이에게 나쁜 것이며, 평화가 모든 이에게 좋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던지게 되네요. 이런 면에서 본다면 향후 미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냉전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바람돌리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8-10 2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었습니다.
좋다고 하시니 장바구니로!

겨울호랑이 2022-08-10 22:51   좋아요 3 | URL
우리 시대의 문제점에 대해 통찰력있게 짚어 준 책이라 생각됩니다. 그레이스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과거에 갖고 있던 믿음을 내려놓도록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뻔한 속임수를 알기 쉽게 설명해줬을 때도 그러하니,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닐까? 나는 이제 내가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대신 내 논리를 최대한 명확하게 밝히고, 상대방이 앞으로도 계속 충분한 정보와 대안적인 설명을 접한다면 언젠가는 훌륭한 증거로 뒷받침되는 설명을 받아들일 거라고 바랄 뿐이다.

나는 교육과 인내 그리고 정직함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그중 무엇도 빠른 효과를 내지는 못한다.

요약하자면 항성처럼 살아 있지 않은 물질은 자연 법칙 외에 과학이 감지할 수 있는 그 어떤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단기적 목적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 바로 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적은 특정 물리적 분자와 세포 복합체 그리고 신체에 한정되어 있으며, 장기적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유기체의 진화가 가져온 결과다. 한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은 수천 세대 앞의 미래를 내다보며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장기적인 형이상학적 목표, 목적, 운명 같은 것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실재한다는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은 소설 《모비 딕Moby Dick》의 에이햅Ahab 선장을 통해 운명이란 개념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에이햅 선장은 자신의 인생이 운명에 의해 통제되며, 흰 고래 모비 딕을 잡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 고래를 사냥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믿는 듯 보인다.

목적론적 믿음을 갖는 사람들 중에는 종교를 통해 그렇게 된 사람이 많지만, 일부 사람들은 우주 그 자체가 어떤 신비로운 방식을 통해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미리 예정되어 있는 어떤 최종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기도 한다. 초기의 일부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미리 운명 지워진 경로를 따라 펼쳐지는 과정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런 믿음의 핵심적인 요소는 이렇게 진화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결국 인간이 무대에 등장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목적론은 본질적으로 목적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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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덕성도 그렇지만 용맹에도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넘는 순간 우리는 어느덧 악덕의 길 위에 서 있게 된다. 이 한계를 잘 알지 못하면 용맹에서 무모함, 고집불통, 어리석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과오와 악의에서 비롯된 과오를 엄격히 구별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자연이 우리 내면에 새겨 놓은 이성의 법칙을 의식적으로 거스르는 것이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바로 그 자연을 우리 쪽 증인으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그 같은 결핍과 결함을 넣어 준 장본인으로 말이다.

공포는 참으로 기이한 정념이다. 의사들은 어떤 정념도 공포만큼 빠르게 우리의 판단력을 평정 상태에서 몰아내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공포 때문에 분별을 잃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도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끔찍한 혼란을 겪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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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9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10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공지능이 문자 그대로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지는 경우와(이 경우 인공지능은 자아인식이 가능하다.) 인간과 동일해 보이지만 의식이 없는 경우, 인공지능 특이점의 본성은 완전하게 다를 것이다. 만약 인간과 같은 내적 인식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비추어볼 때 어떤 종류의 ‘본질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의식을 가진 존재와 의식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존재는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 차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초인공지능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 내적 인식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과 실제로 내적 의식을 가지는 대상을 원리적으로 구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대상이든 비생물학적 대상이든) 어떤 존재자가 실제로 의식적 경험을 가지는지를 원리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질문 자체를 무효화할 수 있다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질문은 전적으로 유효하다. 로봇이 모든 우주를 개척하더라도 그 개척자가 문자 그대로의 ‘의식’을 가지지 않는 한 내적 경험의 부재는 본질적 가치의 축소를 의미할 뿐이다.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의 우생학eugenics은 이런 욕망을 과학의 지위에 올려놓으려는 기획이었다. 그는 문명으로 인해 자연선택이 사라진 상황에서 인위선택을 통해 인간의 자질을 개선하고 사회적 진보를 이루려 했다. 그의 기본적 전제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특성은 유전되는데 이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인간의 사회적 성공 능력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전적 요인을 통제하여 인간의 타고난 질을 개선해야만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생학적 주장들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에 관여하는 어떠한 생물학적 본성도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이념과 가치를 탑재한 과학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우생학적 사상은 20세기에 미국과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구체화되었고 독일 나치에 이르러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가장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형태인 우생학적 조치로 귀결되었다. 이제는 국가 주도의 극단적인 우생학은 폐기되어 사라졌다.

사회는 개량될 필요가 있다는 믿음과 유전학의 잘못된 만남은 개인의 책임의식을 훼손하고 은밀한 형태의 우생학을 부추길 수 있다. 언론을 통해 유전자에 의해 지능이나 행동이 결정된다는 연구결과에 많이 노출될수록 유전자형을 개선하고 싶은 욕구가 커질 것이다. 그래서 본성과 양육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스포츠 소비의 결정에 외부집단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외부집단은 문화나 민족의 경우처럼 미묘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고, 친구 손에 이끌려 지역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처럼 노골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한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들(하지만 모든 사람은 아니다!)은 생활방식을 결정할 때 그 집단의 선호도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어느 스포츠를 선택해서, 그것을 얼마나 즐기고 훈련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회문화적 요소는 전문성의 발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데도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 한 사회가 특정 스포츠 종목에 얼마나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가에 따라 성공 달성 여부가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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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 -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2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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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사가 조르주 르페르브 Georges Lefebvre는 두려운 심리가 ‘방어의지‘와 ‘처벌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혁명기 사람들은 공권력이 저지를 ‘폭력‘에 스스로 방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무장하게 되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을 직접 처벌하고 싶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혁명기 민중의 무장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무장한 민중 때문에 무질서 상태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왕이 동원하는 무력에 온전히 대응하려고 민병대를 조직한 부르주아 계층의 대응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_ 주명철, <1789> , p79/300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2권 <1789-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Liberte>의 주제는 앙시앵레짐(Ancien Regime)의 붕괴(崩壞)다. 우리는 2권을 통해서 ‘문화적 앙시앵레짐‘의 파괴로 혁명의 배경이 만들어졌다면, 1789년에 일어난 2개의 사건 - 바스티유 함락, 인권선언 - 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바스티유 함락은 ‘정치적 앙시앵레짐‘의 끝장을, 인권선언의 승인은 ‘사회적 앙시앵레짐‘의 종언을 알리며 이제 구체제는 부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월 5일과 6일에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그리고 파리가 100여 년 전에 잃었던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되찾았다. 파리 아낙네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해 가지 않았다면 왕은 헌법과 인권선언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10월 5일까지 거부권으로 버티던 왕은 마침내 국민의 의지에 굴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왕과 국민 또는 왕과 국회 사이의 무게중심이 국민 편으로 더 많이 이동했다. 국회 안에서도 좌파가 점점 두드러진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원제 의회, 절대적 거부권을 주장하는 파는 혁명을 세 달 만에 끝내고 싶어했지만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해 누구 하나 앞날을 계획대로 만들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일이 있다. 앙시앵레짐이 죽어가면서 이제 더는 회생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_ 주명철, <1789> , p289/300

그렇지만, 앙시앵레짐의 붕괴까지 단계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누구보다도 반(反)혁명의 선두에 서 있던 것이 루이16세였고, 그를 둘러싸고 특권을 놓치 않으려는 1,2신분의 저항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실제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제3신분의 요구를 짓밟으려는 반혁명 세력의 시도가 있었기에 이 시점에서 혁명은 분명 위태로워 보였다.

왕은 종교인과 귀족이 제3신분(‘평민‘)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충성해준다면 ‘평민‘을 고립시키고 원래 목적대로 전국신분회의 기능을 되살려 체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그리하여 그는 6월 23일에 군대를 집결시켜 힘을 과시하고 회의실에 일반일을 들이지 않은 채, 다시 말해 평민 대표들을 고립시킨 채, 그날을 위해 준비한 각본을 국무대신으로 하여금 대표들에게 읽도록 했다. _ 주명철, <1789> , p51/300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결국 절대군주와 특권층의 반격을 좌절시킨 것은 국회로 표현되는 제3신분의 일반의지였다. 절대군주로부터 입법권을 국회로 가져오면서 역사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불온한 기운의 반란‘이 ‘새로운 시대의 혁명‘으로 명분을 얻으면서 제3신분의 행동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혁명은 점차 가속화되었다.

루이 16세는 브로이 원수가 지휘하는 병력 2만 명을 베르사유에 집결시켰음에도 그들에게 명령하여 국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브로이 원수는 기꺼이 무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고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루이 16세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p60)... 제3신분이 국회를 선포하고 주도하면서 왕의 의지를 꺾은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그들은 ˝루이, 당신만 신성한가? 우리도 신성하다˝라는 듯이 의원의 면책특권을 결의했다. 이로써 국회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였고 왕은 즉각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혁명‘은 수많은 사건과 함께 흘러간다. 전국신분회의 제3신분이 국회의 ‘평민‘이 되었고, 왕처럼 ‘신성한 존재‘가 되면서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로써 정치적 앙시앵레짐은 6월 23일로 죽었다. _ 주명철, <1789> , p61/300

‘프랑스 혁명=바스티유 함락‘이라는 공식을 떠올릴 정도로 바스티유 함락이 프랑스 혁명에서 갖는 의미는 상징적이다. 그것의 실상이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14세의 절대정으로의 회귀를 원했던 루이16세에게 입헌군주라는 현실을 알려주었다는 점과 혁명의 소식을 지방으로 널리 전파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대혁명의 과정에서 이는 하나의 분기점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왕은 충성스러운 의원들을 보면서 ˝국회는 왕의 의도와 바름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언제라도 왕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확인해주었다. 이 말을 들은 의장은 ˝국회는 오래전부터 국왕과 국민의 대표 사이에 아무런 중개자가 끼어들지 않고 직접 소통하기 바랐다˝고 강조했다. 왕이 베르사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기뻐했다. 왕이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여인은 무릎을 꿇고 왕의 발을 껴안으려 했다. 사방에서 ˝왕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르사유 궁의 마당으로 들어설 때까지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p131)... 바스티유가 정복된 결과 왕이 의도했던 일은 물거품이 되었다._ 주명철, <1789> , p132/300

대공포의 물결이 프랑스를 휩쓸고 지나가는 기간을 7월 20일부터 8월 6일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기간의 앞뒤로 도시나 농민이 조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대공포의 원인이 모든 곳에서 한결같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세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 이상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영주권에 대한 농민의 반발, 도적떼에 대한 두려움, 귀족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농민은 소문을 듣고 약탈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직접 처벌하려고 찾아다녔다. _ 주명철, <1789> , p168/300

본문에서는 바스티유 함락과 함께 인권선언의 승인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여러 의원들의 치열한 논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이를 감상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도록 하자. 다만, 여기서는 인권선언에 영향을 준 계몽사상과 관련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리뷰 URL을 표시하는 것으로 넘기도록 하자.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리뷰 :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3794501

먼저 정치적인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리고 나서 사회적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린 지 보름 뒤에 나온 인권 선언은 계몽사상을 반영했다. 그러나 계몽사상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계몽사상가들이 똑같은 관념을 똑같이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평생 서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각각 다른 시기에 주장한 내용까지 18세기에 나온 것이라고 해서 계몽사상으로 지징하는 것은 분명 무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몽주의자들이 앙시앵레짐의 시대의 자유(일종의 특권)와 다른 종류의 자유(모든 구성원의 자유)를 주장하고, 게다가 앙시앵레짐 시대의 신분사회에서 부정하는 사회적 평등을 주장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_ 주명철, <1789> , p203/300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2권 <1789-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은 이처럼 앙시앵레짐의 붕괴를 다룬다. 정치적 앙시앵레짐의 붕괴로 국회의 권위를 높이고, 이어서 사회적 앙시앵레짐의 붕괴를 통해 특권을 소멸하여 인권선언을 채택하는 일련의 과정안에서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큰 흐름과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혁명이 채 끝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8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혁명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직 절대왕권의 꿈을 못버린 루이16세와 특권층의 불만이 아직 채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 같은 시점 국회는 이미 이런 절대정과 ‘헤어질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이들의 불안한 동거는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인권선언에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가는 제2의, 제3의 혁명은 어쩌면 이때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호한 상황을 피하고 시간을 지체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만일 당신이 우리를 여기서 내보낼 임무를 띠고 왔다면, 당신은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왜나하면 오직 총칼의 힘을 빌려야만 우리를 이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모든 의원이 미라보의 말을 따라 외쳤다. ˝이것이 국회의 결심이다.˝ _ 주명철, <1789> , p5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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