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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도널드 서순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2년 6월
평점 :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 그람시 -
그람시가 묘사하는 위기 국면은 잠재적인 혁명적 상황이 아니라 '병적 징후'들로 가득한 '공백기'였다. 그람시는 낡은 것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지성의 비관주의'와 반대되는 '의지의 낙관주의'를 품은 채 이런 병적 징후들이 진보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를 기대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놓인 공백기의 주요한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오래된 강둑이 뒤에 있지만, 반대편은 아직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물살 때문에 뒤로 밀려서 빠져 죽을 위험도 있다.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짓눌린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1/177
도널드 서순 (Donald Sassoon, 1946 ~ )의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위기에 빠진 21세기 세계의 해부 Morbid Symptoms: Anatomy of a World in Crisis>은 21세기 들어 쇠퇴하는 유럽의 보편적 가치 - 사회주의, 민주주의 - 대신 미국, 영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극우포퓰리즘의 대두를 지적한 책이다. 인용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 ~ 1937)의 글로부터 우리는 전체적인 책의 논조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소멸한 '낡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는 비교적 쉽다. 사라져가는 낡은 것은 1945년 이후 30년간 서구를 지배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합의,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 Soziale Marktwirtschaft다.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합쳐놓은 체제를 가리키는 독일어 표현이다. 탄탄한 경제 성장과 나란히 모든 사람을 위한 복지 확대와 실패한 이들을 위한 맞춤형 보호가 이루어진 복지자본주의 caring capitalism를 말한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44/177
추운 겨울에 세균과 해충의 번식이 억제되는 것처럼 냉전(冷戰)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나보다. 냉전 이후 자본주의 일방의 독주 속에 전통적인 가치들은 그 의미를 상실했고, 새로운 가치들이 냉전 이후 사회의 보편기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와 함께 사회의 중심이슈가 정치에서 경제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되었다.
가치는 변화를 겪는다. 유럽적 가치는 일정한 가치를 장려하고 다른 가치들은 '비유럽적'인 것이라고 깎아내리려고 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구성물이다. '유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통일된 일련의 원리와 가치라는 개념은 실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강령으로서 지식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통일된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21/177
과거 카르타고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 이후 로마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만들었듯 공산주의가 사라진 세계에서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의 돛을 달고 급속도로 팽창해나갔다. 바야흐로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비용절감과 이윤극대화를 위한 무한경쟁 시대에 맞춰 유효수요창출보다 효율성을 위한 최소한의 개입이 강조(Laissez-faire)되면서 정책의 우선순위도 바뀌게 되었고, 비효율적인(?) 복지비용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복지국가는 비록 그 성원들이 여전히 소득과 부와 교육 수준에서 불평등하지만, 그래도 다른 어떤 종류의 사회체제의 삶보다 선진 자본주의의 삶을 더 낫게 만들 만큼 충분히 응집력이 있는 민족공동체를 창출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처럼 거의 일반화된 통합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20년간에 이르러서야 전통적인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를 약화시킴으로써 전후戰後 정당체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사회의 위기가 정치의 위기로 바뀌고 있다. 병적 징후들이 넘쳐난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58/177
이처럼 서순은 공산주의 붕괴 이후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경제적 요소'로 변화하고, 이같은 기준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 또한 변화되었다고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경제우선주의 사상이 사회보편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정치부문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세금을 억누르면서 복지 지출을 높게 유지하는게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과거 우파의 특권이었던 영역을 점유해야 했다. '현대화', 즉 신자유주의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국유화의 시대, 경제를 기업가 계급에게 맡겨두기보다는 직접 운영하려 한 '온정적 가부장' 국가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시장이 거침없이 활개치게 놔두고 거기서 생겨나는 돈으로 저소득층을 돕는 게 필요했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55/177
국가주도의 부의 재분배가 아닌 시장 주도의 자율적인 부의 순환이 강조되면서 조세정책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반시장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념과 상관없이 모든 정당의 위치가 우경화(右傾化)되었다. 중도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중도확장을 꾀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은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당들은 자신들만의 고유색깔을 잃어갔다.
정치인들은 투표의 의미와 중요성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챙기면서 어쨌든 마음 내기큰 대로 해석한다. 유권자들은 투표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표를 던지는 순간, 자기가 가진 권한과 목표, 바람을 자신이 믿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정치인에게 넘겨주는 셈이다. 투표는 불가피하게 권력을 포기하는 행위다. 권력은 불가피하게 소수에게 집중된다. 문제는 이 소수를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분명한 이유 때문에 정치인들은 당원보다 유권자에게 더 신경을 쓴다.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글이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주된 통로는 여론조사다. 정치인들이 접촉하는 유권자들은 보통 불만이나 망상,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이들이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는 실패로 치닫는 중이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47/177
대신해서 뚜렷해진 것은 보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극우(極右)움직임이다. 저자는 유럽의 경우 이민자와 무슬림에 대한 적대적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우경화 현상은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린 정치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짙어가는 병색임을 지적한다.
민족과 민족주의 둘 다 유럽 프로젝트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세다. 실제로 유럽연합의 모든 문서는 더욱 응집력 있는 공통의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언급할 때면 언제나 파편화와 혼란, 충돌을 피해야 하고, 응집과 연대, 보완과 협력을 달성하고 회원국들에서 현존하는 민족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나는 유럽의 정체성을 가르칠 수 없다고 본다. 유럽을 민족국가들의 민족국가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28/177
서순의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에서 우리는 냉전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해 복지의 쇠퇴와 이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라는 병적 징후에 더해 이를 치료할 정치수단마저 상실한 암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보다 개방적인 가치관과 폐쇄적인 가치관의 대립 속에서 보편가치가 퇴색하는 현상 속에서 깊어가는 우리시대의 병색. 이러한 위기감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우리의 삶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아무리 시대가 병들었어도 계속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간 사람들 덕분이다. _ 도널드 서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p155/177
저자인 서순이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결코 밝지 않다. 병적 징후는 완연하지만 차도는 없는 상황에서 깊은 답답함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해야 할까. 당연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자유, 평등, 우애(Liberte, Egalite, Fraternite). 프랑스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표어 속에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상호 충돌할 수 있는 가치가 '우애'를 통해 조화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수의 경제적 자유를 위해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우리 시대의 질병은 우리의 판도라 상자에 남은 마지막 '희망'을 우애에서 놓지 않을때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는 비단 유럽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곳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있다. 이런 패배 가운데 어느 것도 특별히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좌파 정당이 우파의 의제를 그렇게 많이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다. 대다수 사민주의 정당은 조만간 긴축 정책을 받아들이고, 임금이 정체하고 불평등이 증대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3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했다. 또한 불평등이 증대하도록 용인하면서 승승장구하는 수혜자들에게 과감하게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말한 것처럼, "세금을 인하하고 규제를 완화하면 ... 새로운 고성장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론은 철저하게 불신받고 있다."_ p60/177
사실상 모든 보주주의자와 심지어 일부 좌파도 표명하면서 승리를 거둔 사고는, 유럽에서 경제진보를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물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과도한 사회복지이며, 규제완화와 민영화는 어느 정도까지 기회를 확대하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각이 유럽 주요 정당들의 경제 담론에서 굳건하게 중심을 차지했다. 이 시각은 진정한 자유는 시장에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중심적인 전 지구적 서삭 되었다. 실제로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라 워싱턴과 런던에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이르기까지 세계 금융 시스템의 패권적 행위자들이 장려했기 때문이다. _ p134/177
오늘날의 병적 징후들은 앞선 수십년간 이루어진 성장과 번영에 연결되어 있다. 대체로 현재의 불만은 환멸, 희망의 상실과 밀접히 관련되며, ‘담대한 희망‘ 같은 슬로건으로도 희망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오늘날 ‘국제적인‘ 것은 ‘인류‘가 아니라 세계화된 시장이다. 그리하여 대기업과 소수 부자들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나라끼리 싸움을 붙이는 한편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정부 간섭을 비난하면서 밑바닥을 향한 경쟁을 부추긴다. 각국이 다른 나라에게서 투자를 빼앗아오기 위한 경쟁이다. _ p155/177
우파는 승승장구했지만 ‘극‘좌파는 그만큼 선전하지 못했다. 심지어 오늘날 ‘극좌파‘라는 표현 자체가 1945년 이후 30년간 주류 사회민주주의의 일부였던 입장까지 아우를 정도로 확장되고 있다. 극좌파는 마치 새로운 세력처럼 행동하지만 이 신좌파가 구사하는 언어는 대부분 낡았다. 압도적 다수, 즉 야비한 1퍼센트에 맞서 99퍼센트를 대변한다는 포퓰리즘적 주장을 펴는데, 마치 99퍼센트 자체가 계급과 젠더, 정치, 종교, 교육, 지역, 연령에 따라 나뉘지 않은 듯 행세한다. _ p9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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