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를 어떻게 상징화할 것인가, 즉 비판적으로 서사화할 것인가의 문제를 단지 기후위기에만 한정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기후위기의 재현이라는 문제가 직면한 곤란은 곧 자본주의의 재현이라는 문제를 거듭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문화적 상징화를 통해, 즉 서사적 재현을 통해 경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공급망이란 오늘날 세계 전체를 에워싼 자본의 생산과 유통 사슬을 가리킨다. 그것은 자본 스스로도 분명히 그려낼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나타난다. 그들은 그것을 투입과 산출의 경제적 과정에서 상품의 흐름이라는 추상으로서 인식할 뿐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공급망 지도 그리기의 어려움과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어려움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란 신자유주의의 경제·사회적 질서에 기꺼이 침묵하면서 다양성과 차이 등에 근거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적극 동원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리킨다. 즉 다원적 인정의 정치를 옹호하되 노동계급과 민중을 위한 분배의 정치를 포기한 것이 진보적 신자유주의였다. 반면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적극 옹호하되 반민족주의적·반이민자적·친기독교적 지위 질서를 또한 두둔했던 것은 초반동적 신자유주의이다. 그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이끈 계급과 민족의 정치를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 점에서 반동적 신자유주의든 진보적 신자유주의든 모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분배의 정치를 지지하였지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인정의 정치라는 차원에서의 대립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하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급진적 대안정치가 개인의 경험과 자본주의적 총체성을 매개하는 상징적 서사 없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러한 서사를 생산하는 장소가 전처럼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장(場)이기는 어렵겠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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