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하는 집단을 고려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착취당하는 계급의 특징과 경멸받는 섹슈얼리티의 특징이 조합되어 있는 혼종 양식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이 '이가적 bivalent'이다. 이 집단이 집단적으로 차별화되는 원인은 사회의 정치 - 경제 구조와 문화 평가 구조 양자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집단은 정치경제와 문화에 동시적으로 그 원인이 되는 부정의에 시달리는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42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1947 ~ )의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Adding Insult to Injury: Nancy Fraser Debates Her Critics>는 그의 정의론과 이에 대한 비판자들의 논박이 실린 책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비판자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아무래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 )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간의 치열한 논쟁이 이 책을 펼쳐든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쟁을 이번 페이퍼에서 다뤄보려 한다. 


 먼저 낸시 프레이저는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에서 '젠더'와 ' 인종'을 혼종 양식인 '이가적 집단'이라고 규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정치 - 경제' 구조와 '문화 평가' 구조에 모두 위치한 젠더는 이들 구조에서 다른 위상을 갖지면서 모순이 발생한다. 즉, 전자에서는 '재분배' 후자에서는 '인정'이라는 서로 다른 개선책을 요구하면서, 일종의 모순이 혼종집단에서 발생하면서 문제가 생겨난다.


 요약하자면 젠더는 이가적 집단 양식이다. 젠더는 재분배의 범위 안에 속해 있는 정치경제의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젠더는 동시에 인정의 범위 안에 속해 있는 문화 평가의 측면도 포함한다. 물론 이 두 측면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측면은 서로를 변증법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얽혀 있다... 그 결과 문화적인 종속과 경제적인 종속의 악순환이 생겨난다. 따라서 젠더 부정의를 개선하는 것은 정치경제와 문화 모두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젠더의 이가성은 딜레마의 원천이다. 여성이 적어도 두 가지 종류의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부정의에 시달리고 있는 한, 여성들은 적어도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개선책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 개선책은 서로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양자를 동시에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이와 유사한 딜레마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도 발생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44


 프레이저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두 가지 방안인 긍정적 개선안과 변혁적 개선안 중 변혁적 개선안의 손을 들어준다. '재분배 - 인정'의 문제에 있어 현 체제를 인정하면서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집단 간 갈등을 양산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무리없는 변혁적 재분배가 사회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다.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1883 ~ 1950)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에서 말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 속에서 2010년대 초반 사회이슈였던 '선별 급식'과 '무상 급식' 문제를 연상케 된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구도와 해결안을 '젠더', '인종'에서 나아가 '경제정의'문제로 확장시킨다.


 따라서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집단 분화에 대한 서로 다른 논리를 발생시킨다. 긍정적 개선책이 뜻하지 않게 계급 분화 촉진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변혁적 개선책은 분화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와 더불어 두 가지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른 인정 역학을 발생시킨다. 긍정적 재분배는 박탈이라는 손상에 무시라는 모욕을 덧붙이면서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에게 낙인을 찍을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변혁적 재분배는 몇 가지 형식의 무시를 개선하도록 도우면서 연대를 촉진시킬 수 있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 p56


 기존의 틀을 깨버리자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 <젠더 허물기>에서 보여주듯 양성에 의한 기존 구조를 벗어나자는 그의 주장과도 통할 듯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버틀러는 프레이저가 문제의 틀을 정치 -경제와 문화 구조로 이원화(二元化) 시키고, 젠더 문제를 문화 구조로 밀어넣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마치 라캉(Jacques Lacan, 1902 ~ 1981) 의 '미끄러짐'에서 기표(signifier)가 기의(signified)에 채 닿지 못하듯, 버틀러가 바라본 프레이저의 틀은 젠더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문제점을 갖는다. 


 그녀(낸시 프레이저)는 분리를 재생산하는데, 특정 억압들을 정치경제의 부분에 위치시키고 다른 억압들은 전적으로 문화적인 영역에 귀속시킨다. 정치경제와 문화 사이에 걸쳐 있는 스펙트럼을 가정하면서 그녀는 이러한 정치 스펙트럼의 문화적 극단에 레즈비언과 게이 투쟁을 위치시킨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동성애 혐오는 정치경제적 뿌리를 갖지 않는데 그 이유는 동성애자는 노동 분업에서 구별되는 지위를 점하지 않고, 전 계급 구조에 걸쳐 있으며, 착취당하는 계급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변혁하는 운동이 왜 정치경제가 기능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가?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0


 

이로부터 버틀러의 비판이 시작된다. 맑스주의에 기반한 프레이저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섹슈얼리티'의 다른 기능 - 단순히 문화의 산물이 아닌 사회적 재생산에서 갖는  기능 - 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음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버틀러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유물론과 교환관계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 주의와 선을 긋는다. 본문에서 하부구조를 강조한 유물론과 교환단계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 Karl Marx, 1818 ~ 1883)의 통찰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을 공부한 버틀러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문제의 이원론적 인식과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을 프레이저는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젠더'와 '섹슈얼리티' 모두가 '물적 생활'의 일부가 되는 이유는 이것들이 성적 노동 분업에 복무하는 방식 때문만이 아니라, 규범적 젠더가 규범적 가족의 재생산에도 복무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여기서의 요점은 프레이저와 반대된다. 즉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장을 변혁 시키기 위한 투쟁이 정치경제의 핵심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투쟁들이 무급 착취 노동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재생산과 재화의 재생산 양자를 포함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영역 자체를 확장시키지 않고서는 이 투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p83)... 이렇게 섹슈얼리티가 생산이나 재분배 내에 근본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왜 최근의 맑스주의 혹은 네오맑스주의 논의에서는 섹슈얼리티가 '문화'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걸까?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6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전용했는데, 모스에 따르면 증여는 유물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모스에게 경제는 다양한 문화적 형식을 전제하는 교환의 한 부분일 뿐이며, 경제적인 영역과 문화적인 영역의 관계는 여태껏 그래 왔듯이 명백히 구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p88)... 레비-스트로스는 교환관계가 문화적인 동시에 경제적이라는 점만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는 교환 관계가 그 구분을 부적절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도 드러냈다. _ 주디스 버틀러,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단지 문화적인>, p89


 프레이저는 친절하게도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해 자신과 버틀러의 관점이 어떻게 차이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자신이 '젠더' 문제를 구분해서 파악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자신 역시 젠더 문제를 어느 한 구조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분배'와 '인정' 모두가 똑같이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버틀러를 베버(Max Weber, 1864 ~ 1920)에 빗대며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나의 틀에서 핵심적인 것은 분배의 부정의와 인정 부정의 사이의 규범적 구분이다. 나는 인정을 '단지 문화적인' 것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나의 핵심은 도덕적으로 옹호할 만한 사회 질서라면 반드시 근절시켜야 하는 두 개의 똑같이 주요하고 심각하며 실질적인 종류의 손해 harm가 있는데, 이를 개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p94)...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무시당한다는 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온전한 파트너 full partner로서의 지위를 거부당하는 것이고, 사회 생활에 동료로 참여하는 것에서 배제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관점에서 무시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적 관계이다... 무시는 잘못된 분배에 수단되든 아니든 근본적인 부정의가 된다. 그리고 이 점이 정치적 결과와 연관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95


  내 입장에서 무시 부정의는 분배 부정의만큼이나 매우 심각한 것이며 무시 부정의는 분배 부정의로 환원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문화적 손해가 경제적 손해의 상부구조적 반영이라고 주장하기는커녕,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손해가 모두 근본적이며 개념적으로 환원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애 중심적 무시가 '단지' 문화적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버틀러는 사실 신분과 계급이라는 유사-베버적인 이원론을 정통 맑스주의의 경제 일원론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96


 프레이저는 이들(재분배-인정)의 문제는 두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해법으로 해결 가능함을 지적한다. 문화 평가 구조에서의 인정관계를 바꿈으로써 정치 - 경제 구조에서의 잘못된 배분 문제를 해결하자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문제 해결방안의 선후(先後)관계이지, 관계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성애 중심주의의 어떤 형식이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경제적 손해를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하나의 가능성은 맑스주의자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파악하는 것처럼 이러한 경제적 손해를 사회 경제 구조의 직접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버틀러가 승인한 듯이 보이는 이런 해석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이 겪는 경제적 취약함은 생산관계에 결박되어 있아. 이의 개선은 이런 관계의 변혁을 요구한다. .. 또 다른 가능성은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이성애 중심주의가 초래하는 경제적 손해를 더 근본적인 무시 무정의의 간접적인 (잘못된) 분배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이성애 중심주의의 뿌리는 '인정 관계'이다. 즉 이성애를 규범적인 것으로,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긋으로 구성하는 제도화된 해석 및 평가 패턴이 바로 그것이며, 그럼으로써 게이와 레즈비언은 참여 동등을 거부당한다. 인정관계를 바꿔라, 그러면 잘못된 분배는 사라질 것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0


 

 이와 함께 프레이저는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 역공에 나선다. 섹슈얼리티에 의해 발생한 경제적 문제를 모두 자본주의 문제로 귀속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적이라는 것이다. 여러 현상으로 나타난 문제는 하나의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며, 이들간에 관계를 맺으며 확대재생산 되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해체주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2 ~ 2004)의 해체주의를 연상시키는 해결안에 이어, 프레이저는 젠더의 수행성이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는 버틀러의 주장을 '관념적인 생각'으로 비판한다. 이와 같은 프레이저의 글을 읽다보면 헤겔 사후 헤겔 우파의 관념론적인 목소리를 비판하는 헤겔 좌파의 모습을 스치듯 느끼게 된다.


 기능주의적 주장을 펼침으로써 버틀러는 내 생각에 1970년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지녔던 최악의 측면 중 하나를 부활시켰다. 즉 서로를 완벽하게 강화하는 맞물려 있는 억압 구조들의 일원론적 '체계'로 자본주의 사회를 과잉 전체화 overtotalized 바로 그 시각이다. 이 관점에서는 '간격'이 포착되지 않는다... 기능주의를 무엇으로 대체하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은 나의 재분배/인정 틀에 대한 세번째 주장과 관련된다. 이 주장은 해체주의적이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5


 역사화를 통해서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이 사회 구조적으로 분화되고 역사적으로 특화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또한 반기능주의적 계기, 즉 대항 체계적 행위자성 agency과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위치 지을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은 언어의 추상적인 초역사적 특성 안에서, 즉 '재의미화'나 '수행성' 등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특정한 사회 관계의 실제적인 모순적 성격 속에서 나타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8


 

낸시 프레이저는 글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마무리하지만, 프레이저와 버틀러의 논쟁은 치열하고도 독자들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전체적으로 '정치- 경제 구조와 문화 비평의 구조'에서 시작된 이들의 논의 안에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이원론(dualism)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 문제의 상호연관성을 인정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 차이는 동일성 안에 수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 앞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듯 석학(碩學)들의 오가는 논리와 논리 속에 담긴 대가(大家)들의 사상을 찾는 것은 흥미도 감동도 없었던 도쿄 올림픽 시청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들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패배의 그림자가 어느 학자의 눈을 감겼는지는 독자들마다 다른 결론을 내리겠지만 ...


 오늘날 사회 정의는 결국 재분배와 인정 모두를 요구한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확신컨대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해 버틀러와 나는 동의한다. 그녀가 사회 정의의 언어를 상기시키는 것을 꺼려하고, 우리가 이론적으로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정치의 최상의 요소들을 되살리고 그것을 '신사회운동들' 정치의 최상의 요소들과 통합시키고자 노력한다. _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이성애 중심주의, 무시 그리고 자본주의>,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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